잃어버린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5:1-7▪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5: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15: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설교작성 노트
본문은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또는 탕자의 비유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 중심으로 볼 때에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 중심으로 볼 때에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요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비유인 것이다.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엡 1:17)고 간구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 이것이 신학이요, 하나님중심이다.
그리고 주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라고 말씀하신다. 본문을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강론
먼저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부터 생각해 보아야만 하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1-3>,이것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4>고 물으십니다.
형제가 양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형제가 잃은 것이 양이 아니라 자식이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본문에는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중심적인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 먼저 3-10절에 “잃었다"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관찰해 보십시오. 그러면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누가 무엇을 잃었다는 것입니까? 양입니까? 드라크마 한 푼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셨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 다음은 3-10절에서 “찾는다"는 말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세어 보십시오. “잃었다"는 말과 “찾는다"는 말은 이 비유에 있어서 핵심적인 단어들입니다. 그 중에서 어느 편에 더 강조점이 주어진 것 같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찾는다"에 있습니다. 뉘라서 잃어버리는 것을 좋아할 이가 있겠습니까?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 하겠느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지으신 것은 사람이 덜 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갈 환경을 먼저 조성하시고 그 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는 그토록 선하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탄의 유혹을 쫓음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맘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한 <죄>때문이었습니다.
㉢ 그러므로 “죄"란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서 또 하나의 중심단어 중 하나인 것입니다. <1, 7, 10 18, 21>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19:10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도록 찾아 다니시는 것이 성경 역사인 입니다.
그렇다면 죄 값에 팔려 사탄의 노예가 된 그들을 찾아 구원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죄의 값을 대신 갚아주는 “대속"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 값은 사망이라고 선언하셨으므로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하나님이시라도 아니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하심으로만이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으심이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 하나님의 찾으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단어가 본 비유에 있어서 중심적인 단어 중 하나입니다. <7, 10>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학자들은 양의 비유나 드라크마의 비유에 비해서 탕자의 비유는 소극적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앞의 두 비유에서는 “찾도록 찾는” 적극성이 나타나 있으나 탕자의 비유에서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로는 여기에 조화와 균형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구원사역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선수적인 사역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강조하다 보면 인간의 책임을 등한히 여기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찾으심에 대하여 인간의 반응인 회개가 뒤따라야하는 것입니다. “이에 일아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20>, “회개”란 돌아서는 것입니다.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 있다면 “탕자의 비유”에서는 회개에 강조점이 주어진 듯싶습니다.
㉤ 이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찾으심이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6),…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3),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25), 아시겠습니까? 찾으심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즐거워함이 있습니다. 잔치가 벌어집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에도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자기 백성을 찾으셨을 때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하십니다.
여러분이 태어나던 날, 돌을 맞이했을 때 가족들이 모여 잔치를 했겠지요.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거듭나던 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를 잃어버리신 후에 얼마나 형제를 찾으셨는지 짐작이 갑니까? “찾도록 찾아” 부지런히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다시 찾으신 날 “내 자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늘의 사자들을 모으시고 잔치를 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이점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찾으심이, 그리고 거듭남이,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그냥 된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점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가능해졌다는 점입니다. 이점을 사도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고 감격해하고 있습니다.
또 명심해야 할 점이 무엇인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 21>는 말씀입니다. 보내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지상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심과 같이, 주님께서 다 “다 이루었다”하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해주어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우리를 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한 돌아온 탕자가 그 후에 아버지의 집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식노릇을 하였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우리의 도전이 있고 결단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중대한 요점을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도록 찾으시는 데는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하신 하나님과 이름과 명예가 걸려 있다는 점입니다.
간악한 사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손상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곧 명예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과 명예가 걸려 있는 하나님의 나라건설에 부름을 받은 용사요, 건축자들인 것입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다윗도 그리고 바울도 이 싸움을 싸운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고 안식하는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투하는 교회에 속해서 이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쟁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완성하시고야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예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한 사람 또 한 사람 찾을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며 하늘에서는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예와 그 거룩하신 이름을 위하여 이 선한 싸움의 선봉에 서지 않으시렵니까? 아멘.
뭇 성도 피를 흘리며 큰 싸움하는데
나 어찌 편히 누어서 상 받기 바랄까
나의 주 그리스도 나를 속량했으니
나 십자가를 벗은 후 저 면류관 쓰리 (35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