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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여행1 - 남해에 도착해 팬션에 체크인을 하고 독일 마을 맥주 축제에 가다.
남해 독일마을로 가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서 진주 못미쳐 엣날 지명 개양에서 좌회전을 해서
삼천포가 속한 사천시로 들어가는데... 옛 속담에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 는 말의 바로 그 도시 입니다.
말의 유래는 장사꾼이 진주로 가려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애 할 것을 잘못해 좌회전을 해서 사천을
지나 삼천포로 간 때문에 장사를 못한데서 유래했다고 하며 다른 하나는 삼천포가 육지 끝자락에
있는지라 한번 들어가면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으니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합니다.
또는 진해에 해군기지가 생긴 이후 서울에서 휴가를 보내고 귀대하는 해군 사병들이 삼랑진
에서 삼천포로 가는 기차로 잘못 갈아타는 바람에...... 저런 속담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가장 사실적 유래는 부산(釜山)에서 출발해 진주와 삼천포로 가는 경전선 열차가 있었으니
이 열차는 앞 부분은 진주행, 뒷부분은 삼천포행으로 운행되었는데 개양역에서
열차를 분리한 다음에 앞 부분은 그대로 진주로 가고 뒷부분은 뒤로 빠져 삼천포로 갑니다.
물론 안내방송이 나오기는 했지만 부산에서 진주까지 거리가 멀다보니 뒷 객차에서 술을
마시거나 피곤해서 잠이 든 사람이 분리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타고 있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흔했으니 따라서 삼천포로 빠지지 않았다면 진주로 갔을 것입니다.
또 1910년에 진주 부호들이 진주에서 삼천포로 가는 진삼선 철도 건설을 추진하다가
국권 상실로 중단되었고, 1936년에 시도된 건설은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으며 해방 후인 1946년의 시도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단(中斷) 됩니다.
그러다가 1953년에 사천에 군용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개양 - 사천 구간이 군용 목적으로 먼저 개통되고,
1960년에 사천 - 삼천포 사이 공사가 시작되지만 5.16 쿠데타로 중단디후 1964년에 다시 재개되어
1965년 12월 7일 개통되었으니 6번 시도와 5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서야 진삼선이 개통된 셈입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적자 노선으로 바뀌면서 15년만에 사천-삼천포 구간부터 중단되면서 철도 대신에
도로로 바뀌니 선로(線路)는 사라졌지만 삼천포역 건물은 복싱연맹체육관으로 남아 있고, 개양-
사천 구간에 있는 철도터널인 죽봉터널은 영화 "살인의 추억 " 촬영(撮影)지로 주목(注目) 받기도 했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삼천포로 길을 잘못 들어갔는데 그곳의 자연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푹 눌어 앉아서 그렇다는 기분이 좋은 유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는 삼천포의 매력에 푹빠진 사람들이 생겼으니.... “응답하라 1994” 의 삼천포의 매력에
흠뻑 젖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 얼굴 하얗고 이쁜 애 있잖습니꺼." 본명은 배우 이름과 마찬가지로
김성균, 컴퓨터공학과 94학번, 호적상 1977년생. 이름처럼 경상남도 삼천포시 출신이라 별명이 붙혀졌다나.
77년이라 하기에는 극강의 노안으로 나정이네 식구들과의 첫 대면에서 나정이네 식구들을 본능적으로
존댓말이 나오게 해버렸는데 처음 나간 미팅에서 상대 심지어 무역과 여대생들이 선생님 혹은
복학생으로 착각하고..... 해태를 면회갔을 때는 해태의 선임들이 은사님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나요?
또한 페이스가 악당스러워서 쓰레기에게는 허구한날 이 살인범 같이 생긴 새끼라고 구박받는데 20화
에선 토크쇼에 나간 칠봉이가 신촌 하숙 친구들의 이름을 다 불러서 자랑하려고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뉴스에 나온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등 어머니한테도 살인범같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성격은 순하고 착하며, 훗날 여친이자 아내가 되는 조윤진도 나름 잘 챙겨주는 편이며 또한 집안은 한번
출항 나가면 기름값만 1,500만원이 든다는 대형 안강망 어선을 세척이나 갖고있는 부자로 고향에서는
삼천포 장국영이란 별칭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삼천포의 엄마가 장국영을 닮았다고 하라고 한다나요?
차는 사천공항을 지나는데 옛날에는 군용 비행장이었지만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항공기업인 한국항공
우주산업(KAI)의 본사가 있으니 사천공항을 활용해 항공정비사업(항공MRO) 분야를 발전 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나 활주로가 짧아 광동체 항공기와 화물기의 이륙과 착륙이 불가능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가 터진후 수습 과정에서
현대우주항공, 삼성항공 우주산업, 대우중공업등 3개 대기업의 항공기
사업 부문이 빅딜 대상 2호로 선정되면서 만들어진 대규모 기업이라고 합니다.
국산 항공기를 생산하고 있는 핵심 방위산업체로 본사는 서울에서 2005년에 경상남도 사천시 사남면
유천리로 이전했으며 미 공군의 F-16 정비사업을 수주하는등 해외사업에도 진출하고 있다는데
그런데 본사가 위치한 유천리 옆에 "선진리" 가 있으니 작은 언덕으로 포구에는 굴이 많이 잡히고
봄이면 벚꽃이 흐드르지게 피는 아름다운 곳인데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사천신성" 이 있던 곳입니다.
벚꽃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신성(선진리성) 도 좋지만 동쪽 울산시 서생면 진하해수욕장 뒷산에 조성된 가토 기요마사의 서생왜성도 아름다운데.... 진해나 군산처럼 일제 식민지 시절에 일본인들이 심은게 아닌가
싶은데, 그 나무들은 오래되어 다 죽고 현재 보이는 벚꽃은 몇십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심은 것이라 봅니다만....
1597년 명나라와 강화협상 결렬로 일본군이 재침해 정유재란이 일어나니 일본군은 14만으로 이에
맞서는 조선군은 3만 8천 이고, 명군은 11만 7천에 달했는데... 일본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격멸한후 고니시등 좌군 5만 6천은 명군 3천과 조선군 1천이 지키는
남원성을 함락하고, 가토등 우군 6만 4천은 황석산성의 조선군 500명을 격파하고는
전주 점령후 모리등 4만은 충청도 직산까지 진출해서 명군 해생과 파새의 4천과 일전을 치릅니다.
일본군은 1592년 임진왜란시 보급 부족 과 명나라 대군 파병에 겨울 추위로 고생한데서 교훈을 얻었으니
전라도와 충청도를 유린하고 음력 10월 2일까지 철수해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28개 왜성에서 겨울을
보내고 다음해 봄에 출진하길 되풀이하면 하삼도를 얻을수 있다고 여겨 히데요시 명에 따라 철군 합니다.
가또 기요마사는 10월에 아사노 요시나가 등에게 명해 울산에 새로 도산성을 쌓으니 명나라 경리 양호는
대병력을 집결해 울산성을 함락하여 전세를 결정지으려고 계획하니 28개 왜성 중에 대표격인 두
성인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 중 누구를 먼저 쳐야할지 권율과 의논 후에
"울산이 왜군의 본거지" 라는 이유로 1597년 음력 12월 가토 기요마사가 새로 쌓은 울산성을 공격합니다.
서생포 왜성의 가또 기요마사가 울산성으로 달려가니 1만 5천 가또군은 축성을 시작한지 2달도 안된지라 미처
완성되지 못했고 우물이 없는 울산 도산성에서 조명 연합군에 포위되는데 1597년 음력 12월 23일 양호는
명군 2만을 양산과 부산쪽으로 보내서 일본군의 원군에 대비케한후 자신이 직접 제독 마귀와 함께 명군 3만
6천에 권율의 조선군 1만 1천등 4만 7천 연합군으로 울산도산성을 공격하니 명군의 대포에 성벽이 무느집니다.
일본군은 나무로 방벽 을 세우고 조총으로 대응하여 막아내는데 왜군 구원군이 오는지라
조명 연합군은 양산에 군대를 보내 왜군을 저지하고 서생포 왜성에서 오는 수군
40척을 이여매의 절강성 병사 2천과 파새의 기마군 1천이 울산 태화강에서 전멸시킵니다.
성이 완전히 포위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성 밖의 우물을 조선군이 메워버린지라 눈을 녹여
식수로 사용하며 말 오줌과 소변 을 받아 마시고 말고기와 인육 을 먹는등 아수라
지옥 같은 상황에 빠지니 가토 기요마사는 항복 대신 "할복자살" 을 결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왜군의 저항으로 공격하는 명군의 손실이 커지자 양호는 장기전으로 가니 순천의 고니시를
비롯 20여개 남해안 왜성에서 도착한 구원병은 그 수가 8만 에 이르니 양산의 명군
저지선을 뚫고 울산성에 이르러 조명연합군을 포위하고 왜 수군이 태화강 으로 들어옵니다.
포위에 직면한 조명 연합군은 전멸을 피하려고 1598년 음력 1월 4일 경주로 후퇴하니 울산성
전투는 종결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1만 5,000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도 수천명이 전사했다고 추측되며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 으로 철수합니다.
이에 대비해 울산의 조선인 주민 들을 끌고가 건축한 구마모토성 에는 120개의 우물과 고구마 줄기로
된 다다미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구마모토시에는 포로들의 거주지 “우루산마치” 동네가 있습니다.
1598년 음력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으로 철수 준비를 하던 왜군에 대해 명군의 형개는 다시 대군
을 조직하였으니 마귀는 울산성, 동일원은 사천성, 유정은 순천성을 공격하며 수군도독 진린은
조선 수군과 협력하여 수로를 공략해 왜군의 상호 구원을 차단케 하는 등의 사로병진책을 실시합니다.
1598년 음력 9월 22일 울산 도산성은 마귀의 명군 2만 5천 과 김응서와 선거이의 조선군
1만 5천 합계 4만 대군이 공격해오니 제2차 울산성 전투 가 벌어지는데 항왜병 사야가
김충선 이 맹활약을 하지만 조선군 대장 선거이가 전사 하는등 공격은 순조롭지 못합니다.
한편 진린과 이순신의 순천만 공격 장도해전은 수심이 얕은지라 조선수군의 대형 판옥선이
기동하는데 불리하고, 진린의 함대가 썰물때 좌초되어 왜군의 공격으로 불타는등 실패로
돌아가 철수 했으며 서로군 유정은 순천 왜교성 공격에 소극적인 가운데 소강상태가 됩니다.
1598년 9월 18일 조명연합군은 사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주로 향했으니 이때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 지휘하에 사천신성(泗川新城)에 본진을 두고 9천명의 병력을 배치하였으니,
진주 남강 연안의 망진채(望晉寨), 영춘채(永春寨), 곤양채(昆陽寨) 에 1천여명, 사천성에 수백명을 배치합니다.
시마즈군의 병력은 시마즈 요시히로와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가 인솔하는 9천명이라
남해의 대마도 소(宗)군이나 고성의 타치바나(立花)군이 원군을 제의했지만, 요시히로는 지휘 체계가
복잡해지는 점을 염려해 이 제의를 거절하고는 시마즈 가의 군세만으로 조·명의 대군을 맞아 싸우게 됩니다.
제독 동일원이 지휘하는 3만 6천 8백명의 명군과 정기룡이 지휘하는 2천 2백명의 조선군을
합쳐 4만 조명연합군은 사천성을 항해 남하하기 시작했으니 명군은 성주에서 고령을
거쳐 진주로 향하였는데..... 1598년 9월 20일 명군의 선봉군이 진주남강을 지키던
일본군을 급습했고, 일본군은 도주하여 곤양채를 거쳐 사천성에 주둔한 왜군과 합류합니다.
이윽고 명군이 망진채와 영춘채를 점령하자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성의 군사에게 사천신성
(선진리 왜성)의 병력과 합류하도록 명령했는데 사천성의 왜군이 철수 준비를 하던
28일 밤 경상 우병사 정기룡의 조선군은 이 정보를 알고 야습을 감행했으니 당황한
왜군은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사천 신성으로 들어갑니다.
조명 연합군은 사천성(사천읍성) 을 점령하고 10월 1일 사천신성(선진리 왜성) 공격을 시작했는데 전투
도중 가와카미 다다노리는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 에게 명해 적의 식량 창고를 불태워 버립니다.
조명 연합군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식량 창고가 불타버리자 한층 더 궁지에 빠지고,
단기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사쓰마(규슈 남부 가고시마)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선진리 왜성의 뒤에 굳세고 튼튼한 진을 치고 복병을 배치합니다.
9천명 왜군을 지휘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3만 조명 연합군의 공격에 대량의 총을 사용하고 지뢰
를 묻는 방법으로 연합군의 공격을 잘 방어했으며 명군 유격장수 팽신고의 부대가 총포
를 이용한 공격을 가하며 동문으로 접근하였고, 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그 와중에 나무 기둥을 이용하여 성내로 진입할수 있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명군 진영에서 유격장수 모국기 휘하 포병부대 불랑기포가 과열해 파열된 포신으로 부터
발생된 불꽃이 화약더미에 옮겨붙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명군은 우왕좌왕하며 진열이
흩어졌고, 이를 본 시마즈 요시히로는 전 병력을 출동시켜 명군을 공격하였으니 명군은 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와해되었으며 거기다 식량까지 부족해지자 진주 방면으로 달아나 성주까지 후퇴합니다.
병력이 5배에 가까웠으니 승리할수도 있었는데 이기지 못한 아쉬운 전투였으니 만약 사천이
함락되었으면 부산과 순천의 연락이 끓겨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를
고립시킬수 있었을 것이고 그리되면 서로군의 순천 왜교성 전투도 승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훗날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승리를 두고 전대미문의 대승리라고 평가했는데 이 때 붉은 여우와 흰 여우가
성안으로부터 명군 진영을 향해 달려 나갔고, 이를 본 왜군은 승리를 암시하는 징조로 여겨
사기가 매우 높아졌으며 이 두 마리의 여우에 관한 춤이 가고시마 무형 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교토에 귀무덤 (耳塚 미미즈카) 이 있는데 사천 전투에서 조선인과 명군의 코를 만명이나
베었고..... 남원성과 황석산성, 전라도 등지에서 벤 귀나 코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가 전공 확인후 묻어 조성한 것으로 조선인과 명군 12만 6000명 분의 코 가 묻혀 있습니다.
울산성을 재차 공격중이던 동로군은 사천을 공격하던 동일원 중로군이 몰살당했다는 비보를 접하자 질겁한
마귀가 황급히 철수하니.... 다시 살아난 가토 기요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는 일본으로 철수하는데
그는 무단파로 히데요시 사망후 이시다 미쓰나리의 정책 수행에 반발하는 시치쇼의 일원으로 활동합니다.
그런데 저 사천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을 전멸시킨 사쓰마번의 시마즈 요시히사는 의리가 있는 인물
이니.... 남해안 28개 왜성에서 일본군이 철수할 때 대부분은 조선군이나 명군의 방해가
전혀 없이 모두 노획한 보물에다가 조선인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서는 모두 편안하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가장 서쪽에 있던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만은 사정이 달랐으니 27개 왜성의 일본군이
평화롭게 철수한데 비해, 그는 이순신 장군이 명나라 진린 제독과 함께 해상을 봉쇄하자 구원군
을 요청하니 시마즈씨는 형식적으로 20척 정도 배에 1천명 정도 병력만 보내도 체면은 설 것인데.....
당장 귀국후 일본의 주인 자리를 놓고 내란이 벌어질 것이니 자신의 병력을 온전하게 철수해야
함에도, 8천여명 전군에 남해의 소 요시토시,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그리고 부산에서
수군을 불러 300척 함대를 동원하니 노량해전으로..... 일본측은 무려 200척이 파손되었습니다.
그는 2년후 1600년에 18만 동서양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에 불과 1,500명만 인솔하니
피해가 막심했음을 알만한데....... 자신의 병력을 대거 잃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어리석은 자 일까요? 아니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처럼 의리가 있는 무장이었던 것일까요?
이런저런 엣날 생각을 하는 새에 차는 2003년에 개통된 창선도와
육지를 잇는 창선-삼천포대교를 지나 "창선도" 에 접어 듭니다.
차는 올망졸망한 예쁜 섬인 창선도를 지나서는 1980년에 개통된.....
창선도와 남해 섬을 잇는 창선교를 지나 "남해 섬" 에 접어듭니다.
그러고는 계속 달려서 10여분 후에 드디어 삼동면에 자리한 남해 독일 마을에 도착해서는
오른쪽 길로 마을로 들어가서는 산 중턱에 우리가 미리 예약한 팬션을 찾아갑니다.
"남해 독일 마을" 은 1960년대에 산업 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되어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독일 거주
교포들이 나이들아 은퇴한 후에 한국에 정착할수 있도록 삶의 터전을 제공해주고, 독일의
이국문화를 경험하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2001년 부터 조성한 곳인데 오늘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첫댓글 옛 속담에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 는 말의 바로 그 도시가 삼천포가 지금은 사천으로 바뀌었죠?
저도 어릴때는 삼천포지명 많이 들엇습니다.
예전에 가시고 최근에 다시 다녀오셧군요. 부산에서는 한 두시간정도 걸리시죠?
사천군에서 삼천포시가 독립했다가
다시 사천시로 합쳐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