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은 상고시대 동이족임은 이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석굴은 바로 동이족인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에 의해 꽃피워진 엄청난 거석문화예술이다. 오마이뉴스 기자가 취재한 사진과 글을 올려본다. 글을 소화해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참고:<환단고기>에...
*옛글에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이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 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혹은 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혹은 白多國) 사납아국 선 비국(혹은 국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합해서 12국이다.
*15세 단군 대음(혹은 후흘달) 기미 40년 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 *<<삼성밀기>>에서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또는 필나국),객현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또는 직구다국),사납아국,선비이국(또는 시위국,통고사국이라 함.),수밀국이니 합쳐서 12국이라.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영양무원호태열제때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 나라는 부하고 백성은 성했다. 수나라왕 양광은 본래 선비의 유종족인바, 남북의 땅을 통합하여 그 여세를 모아 우리 고구려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니, 상국을 업신여기고 자주 대병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미 대비가 있어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다. 홍무 25년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해와서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여러겹으로 포위케했다. 관병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니 바햐흐로 평양을 습격하려 했다. 제께서는 이를 듣고 완병술을 쓰려 했다. 계략을 꾸며 곡사정을 보냈다.
때마침 조의 가운데 일인이라는 자가 있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한 끝에 함께 표를 양광에게 바쳤다. 양공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소매 속에서 작은 활을 꺼내 쏘아 그의 뇌를 맞혔다.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게하여 작은 배로 갈아타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명을 내려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양광은 좌우에 말하여 가로대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겼는가?' 라고 했다. 양명 등은 얼굴색이 검게 변하여 대답 못하고 말았다. 후인들은 이를 노래로 불러 가로 대,
오호 어리석은 한나라 어린애들아 요동은 향하지 마라.개죽음이 부른다. 문무의 우리 선조 한웅이라 불렀느니 자손들은 이어져서 영웅호걸 많단다. 주몽 태조 광개토님 위세는 세상에 울려 더할나위 없었고] 유유 일인 양만춘은 나라 위해 못 바꿔 스스로 사라졌다 세상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니 오랑캐 왜구 다 물리치고 평화를 지켰다. 유철 양광 이세민도 보기만해도 무너져서 망아지처럼 도망갔다. 영락기공비는 천 척 만가지기가 한 색으로 태백은 높단다.
라고 하였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괴에게 패하여 핍박 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재빨리 생각하기를 '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오니 어디간들 이루지 못 할 것인가?'라고 했다.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맡겨서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게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옛날 흉노가 멸망하고 선비(鮮卑)가 남만주에서 몽골고원으로 진출하여 2세기 무렵에 기마민족국가를 세웠으나 그것은 3세기 중엽에 몇 개의 부족으로 분열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중국으로 들어가서 5호16국(五胡十六國) 중의 몇몇 나라를 건설하였는데, 마침내는 선비의 부족인 탁발(拓跋)이 화북(華北)에서 북위(北魏)를 세웠다.
북위는 북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중국 내부에 수립한 최초의 큰 왕조이다. 몽골고원에서는 유연(柔然:5세기 초∼6세기 중엽)·돌궐(突厥:?∼8세기 무렵)·위구르(?∼9세기 중엽), 그리고 거란·몽골·준가르 등 유목 기마민족이 흥망하였다. 이들 중에서 흉노·유연·돌궐·거란·몽골·준가르 등이 끝내 그의 본거지를 확보한 이유는 그들이 본디 유목민이었기 때문이고, 선비족이 그의 본거지를 버리고 농업지대로 이주한 것은 그것이 원래 목축과 함께 농업도 하였기 때문이다.
*을지문덕 장군에 대해:‘을지’라는 성에 대하여 고구려 관위명(官位名)의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가부장(家父長)을 뜻한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을’만이 성이요 ‘지’는 존대의 접미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또,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성인 ‘울지(尉遲)’씨와 같은 것으로 보아 을지문덕을 선비족계통의 귀화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의 기록은 ‘탐라(耽羅)’의 명칭과 대외관계, 풍속 등을 살피는 데 유용한 자료들로 오늘날 학계에서 논쟁의 중심에서 거론되고 있다.
이 중에서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의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기록은 탐라의 명칭과 교역관계를 살필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자료들이다. 또한 탐라를 지칭했던 ‘주호(州胡)’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200년 뒤 출간된 범엽(范曄)의 ‘후한서’에는 ‘주호’가 ‘주호국(州胡國)’으로 바뀌었다.
‘주호’ 관련 삼국지 위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또 주호라는 지역이 있는데, 마한(馬韓)의 서해(西海) 중 큰 섬 위에 있다. 그곳 사람들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韓과 같지 않으며, 모두 머리를 깎아서 마치 선비족(鮮卑族)과 같다. 다만 가죽옷을 입었으며, 소와 돼지를 즐겨 길렀는데, 그 옷은 유상무하(有 上無下)이어서 나체와 진배없다. 배를 타고 中韓에 왕래하며 교역을 한다.” ‘주호’는 ‘섬의 오랑캐’란 뜻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사이관(四夷觀)에서 나온 것이다.
‘주호’를 제주도로 비정한 학자는 일본 백조고길(白鳥庫吉)로 그는 이 기록을 보고 북방계 종족인 선비족이나 오환족(烏丸族)이 해상으로 제주에 들어가 거주한 주민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주호 사람들의 머리 모양과 가죽옷 착용, 가축 사육 등 생활풍속이 두 종족과 일치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북한 리지린은 제주에 선비족이나 오환족의 유물과 유적, 풍습이 남아 있지 않고, 실제로 당시 선비족이나 오환족은 요서지역 오지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해 ‘주호인=선비족.오환족설’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당시 마한이 한반도 이남에 국한됐던 게 아니라 압록강까지 이르렀으므로, ‘마한 서해의 큰 섬’은 산둥반도와 발해만 사이에 있는 묘도열도(廟島列島)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탐라국에 대한 기록은 구당서 유인궤전(劉仁軌傳)에 처음 나온다.
이에 앞서 후한서에는 ‘섭라(涉羅)’, 북사나 수서의 ‘백제전(百濟傳)’엔 ‘탐(담)모라국(耽(聃)牟羅國)’, 신당서엔 ‘담라(人+詹羅)’, 다른 국내외 사서에는 ‘탐부라(耽浮羅)’, ‘모라(毛羅)’, ‘탁라(托羅)’, ‘탁라(託羅)’, ‘둔라(屯羅)’ 등의 명칭으로 나타나 있다. 이의 뜻에 대해선 한치연의 ‘해동역사(海東歷史)’(世紀 諸小國 耽羅)에 자세히 언급돼 있다. 관련 기록은 “동국방음(東國方音)에 島를 섬(剡)이라고 하고, 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耽.涉.人+詹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했다.
또 탐라국의 교역상과 관련, 이들 문헌자료는 제주사를 정립하는 데 귀한 사료들이다. 특히 삼국지의 ‘배를 타고 중한을 왕래하며 교역을 한다’는 기록과 1928년 산지항에서 발견된 중국 한대 화폐유물(오수전.화천, 대천오십.화포), 동경 등은 중국과 한반도 내 교역을 뒷받침하는 귀한 자료이다.
중국 당회요 중 ‘탐라국’ 기록에는 7세기 탐라국의 위치와 생활풍속이 상세히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탐라는 신라의 무주(武州) 해상에 있고, 북쪽으로 백제와 5일 거리에 있는 것으로 돼 있다. 또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儒李)이고 이름은 도라(都羅)인데, 성황(城隍)은 없고 다섯 부락으로 나뉘어 있다. 그들의 집은 둥글게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다. 호구는 8000 가량 된다…문기(文記)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용삭 원년(문무왕 1년.661년) 8월 조공 사신이 (당나라에) 이르렀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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