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큰스님의 간식거리
큰스님은 언제나 똑같은 여행용 가방에 똑같은 내용물을 넣고 다니신다. 가지고 오신 가사도 늘 같다. 어떤 때는 가사를 가져오시지 않아 등인 스님의 가사를 수하시고 법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큰스님은 언제나 어디로 가고 싶으면 바로 행각을 떠나셨다.
큰스님께서는 한국 음식도 잘 드셨다. 주로 올려드렸던 공양 메뉴는 잡곡밥에 된장국과 콩단백 채식이었다. 아침 공양은 주로 죽을 올렸는데, 그냥 흰쌀로만 쓴 죽이었다. 김치는 매워서 잡수시기 좀 불편해하셨고, 과일도 많이 드시지 않고 조금씩 드셨다. 간식으로는 주로 땅콩을 좋아하셔서 신선하고 품질좋은 날 땅콩을 구하여 쪄서 드렸다. 나중에는 해인향 보살님이 큰스님께 땅콩공양을 전담하였다. 그 밖에 삶은 옥수수와 삶은 콩도 잘 드셨다.
좀 난처했던 것은 불자님들이 공양물로 올리는 홍삼절편삼을 매우 좋아하셨다는 점이다. 홍삼절편삼은 당뇨가 있는 큰스님에게는 권장할 만한 것이 못되었으나 큰스님께서는 한국의 귀한 보약으로 아셔 꼭 챙겨 드실 정도였다.
평소에 잠깐씩 편히 쉬시다가도 불자님들이 방문하여 친견을 요청하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사양하시지 않으시고 곧바로 맞이하시고 인사에 꼭 덕담을 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큰스님의 이런 소탈하신 성품은 큰스님의 참모습으로 수많은 불자님들과 격의 없이 가까이 할 수 있었고, 그것이 오히려 수행하는 불자님들에게 용기를 많이 심어주신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일 명함 뿌리며 한국의 큰스님들만 만나고 가셨다면 이렇게까지 극락 수행법인 정토선 수행법이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5> 석고 본 뜨기
한번은 서울 인사동 여래선원에서 큰스님의 얼굴을 석고붕대로 본뜨기 한일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지내는 만경사 법당의 비로자나부처님을 청동으로 조각했던 불모작가 ‘대안’거사님의 간곡한 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일 큰스님 입적하신 연후동상이나 흉상을 제작하게 될 때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예비적인 조치상황임을 스님들에게 먼저 주지시켰고 이를 큰스님께 스님들이 조심스레 말씀드려 마침내 큰스님 허락을 받고 성사되어 이를 시행한 것이다.
무려 한 시간여 동안 큰스님은 꼼짝 못하고 누워계셔야 했다. 먼저 얼굴에 콜드크림을 바르고 석고붕대를 작게 잘라 미지근한 물에 묻혀 한 장씩 얼굴에 묻혀나가는 동안 고개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부동자세로 누워 간신히 호흡만 할 수 있는 답답하고 지루하며 매우 고단한 작업인 것이다. 고령의 큰스님께서는 약간은 불안하기도 하셔서 매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특히, 외국에서 옆에 제자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잘 모르는 허우대 큰 구례나룻 작가의 투박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 다소 두렵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큰스님께서 의연히 그 작업을 끝내도록 몸을 맡기시는 수고로움을 감당하셨고, 마침내 작가가 마지막 얼굴 닦아드리며 끝났음을 말씀드리자 큰스님은 감긴 눈을 뜨시고 곁에 있는 우리를 둘러보시더니 “나 죽었다 살아났다!” 하시며 다시 벌렁 누워 죽는 표정의 익살스런 세리모니를 하셨다. 우리 모두는 모처럼 큰소리로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큰스님께서는 어색한 분위기도 웃음으로 돌릴 수 있는 유머와 위트를 지니셔서 우리는 편안하고도 즐거이 시봉에 임할 수 있었다.
<6> 치료 거절
큰스님은 당뇨증세가 매우 심했다. 큰스님의 혈당수치를 보면 기겁하게 된다. 700~800을 나타내기도 했으니 입원치료 해야 할 상황이었다. 벌써 80살을 넘기신 세수의 노구를 이끌고 그러한 건강상태로 전국을 순회하며 빡빡한 일정을 강행군으로 소화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등원 스님이 중국 인터넷에 들어가 중국말로 된 당뇨병에 대한 내용을 뽑아서 큰스님께 보여드리며 병원에 가셔야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지만 괜찮다하시며 거절하시고서 병원에 가시지 않았다.
어느 날 인사동 여래선원에 계실 때 한가한 틈을 타서 등원스님이 병원에 미리 접수해놓고 큰스님을 모시고 갔다. 물론 병원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고 구경 가시자고 해서 모시고 간 것이다. 큰스님은 평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인사동 길을 걸으시면서 산보하시는 것도 좋아하였다. 병원에 들어가 차례가 되어 진료실의 의사와 접견하고자하면 큰스님께서는 괜한 일을 한다면서 그냥 나오시곤 하셨다.
<7> 용돈 하사금 오천 원
큰스님께서는 당신께 올리는 공양금(용채)과 불사금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하셨다. 단 한 푼도 허투루 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 철저한 금전 관리에 불평을 하는 제자들도 많아 생겨나기도 했다. 심지어 공양금을 드리면 불자님들 면전에서 공양금이 얼마인지 봉투에서 금전을 꺼내서 헤아리시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큰스님께서는 늘 말씀하시는 ‘너희들은 잘 살지 않느냐?’는 식이었다.
물론 우리는 큰스님이 개인적인 탐욕심으로 인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런 거부감이 나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큰스님께서 관련된 중국의 많은 사찰에 불사를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큰스님의 금전 다루시는 모습이나 처리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불만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스님들이 큰스님께 우리에게도 좀 용돈을 주시라고 졸라보는 일이 있었다.
“관정 사부님, 한국의 이 제자에게도 용돈을 좀 나눠 주십시오.”
처음엔 미동도 않으시다가 여러 번 조르니 결국 큰스님께서 한국에서 용돈을 내려주시는 획기적인 일이 생겼다. 그런데 등인 스님께만 용돈을 하사하셨다. 그것도 달랑 천 원짜리 다섯 장! 하도 신기해서 지금도 당시 큰스님께 받은 돈을 절에 기념으로 보관하고 있다.
제자들이 보기에 통역은 평소 큰스님과 너무 허물없이 함부로 말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당시 중국에서는 스님들을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루는 통역하는 거사(이때는 홍거사였다)가 로또 번호를 알려 달라고 졸랐다. ‘도사가 그것도 모르면 무슨 도사냐?’며 조른 것이다.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마침내 번호를 가르쳐 주었고, 통역은 열심을 발하여 복권을 사왔다. 하지만 발표 전에 큰스님께서는 이번에 결과는 맞지 않는다고 미리 말씀하셨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8> 휘호가 맘에 안 들어
큰스님은 시간이 나면 제자들에게 휘호를 써 주시곤 하셨다. 그림도 잘 그리셨는데 주로 휘호를 쓰시고 부수적으로 연꽃그림을 가미하셨다. 드물게 극락세계 하품하생 연꽃 화생하는 모습의 그림도 그리신다.
어느 날 지방에서 법회마치고 인사동 여래선원에 오셨을 때 법당에 걸린 당신께서 전에 써주셨던 ‘南無阿彌陀佛’,‘願生西方蓮’ 휘호족자를 보시고, 글씨가 당신 마음에 안 드신다며 다시 써 주시겠다는 것이다. 붓과 벼루, 화선지를 준비 해드리자 큰스님께서는 정말로 정성을 드려 글씨를 다시 쓰셨다.
‘南無阿彌陀佛’
‘願生西方蓮’
願生西方蓮(서방 극락 연꽃으로 태어나길 바라나이다) 하단에는 연꽃그림도 잘 그리셨다. 큰스님께서는 대단히 흡족해 하셨다. 우리는 즉시 새로 써주신 휘호를 표구사에 맡겨 족자를 만들어 부처님 양쪽에 걸어 새로이 장엄하였다.
정토수행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밑천인 믿음 . 바람 . 염불 가운데 두 가지를 정확하게 써 주신 것이다. 처음 믿음은 바로 큰스님이 극락을 다녀오신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큰스님은 우리에게 3가지를 정확하게 짚어주신 것이다. 지금도 그때 큰스님께서 다시 써주신 큰스님 정성의 휘호를 서울 종로에 있는 아미타사 법당 부처님 양옆에 대련으로 모시고 수행지침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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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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