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을 정(淨)’
[미주 중앙일보 1-24-2017 게재]
박 재욱(나란다 불교아카데미 법사)
초막의 너와를 토닥대는 가만한
소리에 뒤척이다, 아슴푸레 다시 잠겨든 선잠을 깨운 것은 세찬 빗줄기였다.
화들짝 등짝을 곧추세운다. 놓치기
아까운 가맣던 소리가 아니던가. 깊은 밤 칠흑 속, 그만
가부좌를 틀고 만다.
좀 더 가까이 그 귀한 손님을
맞이할 요량으로 들창을 열어 제치고, 으쓱한 몸을 잡도리하는 방정을 떤 연후다.
자연한 칠흑속의 빗소리는
인위적인 어떠한 시와 음악과 풍경의 아름다움을 앞선다. 때문에 빗소리에 대한 어설픈 의미부여나 미사여구는
부질없는 짓이며 무례일터.
때로는 진양조의 결 고운
가락으로, 때로는 휘모리장단으로 몰아치는 빗소리의 무쌍한 변주를 따라,
‘날’것 그대로, ‘그냥’ 그대로 젖어든즉, 그
소리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마침내, 인간의 언어나 어떤 기호로도 형용 불가한 그 너머에서, 빗소리도
나도 사라진 선열에 잠긴다.
어쩌면, 한밤의 빗소리로 비롯된 선정삼매는 오염된 영혼의 정화를 위해, 생전에
앞당겨 펼친 한 판 씻김굿이라 해도 되겠다. 말아 쥐면 고결한 ‘맑을 정(淨)’ 한 자이다.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한다는
취지로, 매년 초에 ‘올해의 한자’를 선정해 발표해온 한국고전번역원은,
올해를 상징하는 한자로 ‘맑을 정(淨)’ 자를 선정했다.
고전번역원은 올해 ‘정(淨)’자가 선정된 것은 만연한
사회의 부정부패가 일소돼, 모든 분야가 투명하고 깨끗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앞서 불교는 내적혁명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생각과 의지의 근원인 마음의 정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창한다.
불교의 부동의 윤리로 으뜸가는
요체이며 궁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자정기의(自淨其意),
‘스스로
그 마음을 맑게 하라’는 금구가 그 의미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인간의 삶이란 업(카르마)의 지속적인 축적행위인지 모른다. 모든 ‘행위’를 업이라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윤리적 동기를 중요시하므로
‘의도된 행위’만을 업이라 규정한다.
먼저 정화의 대상은 악업이다. 악업에는 몸으로 짓는 신업과 입으로 짓는 구업, 탐. 진. 치 삼독(三毒)으로 짓는 의업(意業)이 있다. 신업과 구업은 이미 마음에 둔 의도가
밖으로 표출된 업으로 의업에 의해 지배 받는다.
따라서 마음의 정화는 삼독심의
소멸에 있으며, 그 해독제는 계. 정. 혜 삼학(三學)수행이다.
탐욕의 조절능력은 계(戒)지킴에 있다. 분노, 증오 등의 진심(瞋心)을 잠재우는 힘은 선정에 있다. 탐욕과 진심은
무명, 즉 어리석은 우치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진리(연기법. 사제)를 깨친 지혜로 제거되며, 종국엔
선.악, 유.무
등 이분법적 분별 이전인 절대평온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결국 마음의 정화는 근본번뇌인
무명에서 벗어나, 수행으로 마음의 근력을 다져 청정심을 회복함으로써 실현된다.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그 해방으로부터도 해방되어 본연의 성품인 청정심을 회복한 참사람은, ‘궁극적
이완’ 속에서 한없이 한가롭다. 그의 순정한 언행은 무애자재하며 ‘함이 없는 함’으로 결코 얼룩을 남기지
않는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물밑을 비추어도 물위엔 흔적이 없네”(야부도천 11세기 중국)
첫댓글 _()()()_
맑을 정(淨).......
처마 끝 낙수가 "벽력"으로 돌아오고 .... _()_
흐흐 그렇습니다.
깨친 옛 선사들은 새벽 닭 우는 소리에....., 돌 굴러 내리다 나무에 부딫치는 소리에 몰록
한 소식했다는데 ....벽력같은 께침을 얻었다는 선사들은 많아도 그것을 '산' 선사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