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추위가 비교적 일찍 온 듯 합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둘러싼 여러 논의와 MBC PD 수첩을 둘러싼 공방을 보면서 가슴 아픈 한 해를 보내는 듯 합니다.
보고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연말이라 다소 분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12강 수업은 강상규 선생님이 담당하셨습니다.
제 13강 수업을 맡아주실 문유미 선생님에게 급한 사정이 생겨, 김영수가 대신하도록 할 예정입니다. 문 선생님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Job Interview가 결정되어 12월 2일 출국하셨습니다.
12월 16일은 학생들의 학기말 논문발표회가 있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의 참석을 바라겠습니다.
- 장소: 정치학과 세미나실 644호
- 시간: AM 9:30 - PM 3:00
발표회가 끝난 뒤, 망년회를 겸해 금년 수업을 평가하고 내년 수업을 준비하는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금주 읽은 텍스트
1. 25장. 정용화 김현철, "개화파의 자주독립사상"
2. 27장. 김영작 윤순갑, "개화파의 근대국가 건설구상"
- 참고문헌:
1. 전복희, {사회진화론과 국가사상} 한울아카데미, 1996
2. 김영작, {한말 내셔널리즘 연구}, 청계연구소, 1989.
3. 강상규, "명성왕후와 대원군: 정치적 긴장관계의 구조와 과정",
2005년 명성왕후 재조명 학술대회 발표논문
4. 강상규, "고종의 대내외 정세인식과 대한제국 외교의 배경",
2005년 한림대학 제2차 학술심포지움 발표논문
학생들의 발표내용
【1】이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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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의 논문은 소위 민씨 세력이란 민비의 사인세력이 아니라 고종의 보좌역으로 본다. 민씨파는 외척에 국한되지 않고 국왕 보좌 소장파의 총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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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 vs. 대원군의 대립구도는 사실상 고종 vs. 대원군의 대립구도이다. 고종은 효라는 문제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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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는 "조선 개화자강정책 실패는 고종의 무능력 탓이 아니라 화이론적 명분론, 신하들의 왕권견제 전통, 대원군 세력 때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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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는 한말의 정치상황을 개화파 vs. 수구파, 지배계급 vs. 민중세력 이라는 대당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절충적 통합원리를 통해 내적 구심력을 확보하려는 국왕으로서 고종의 판단이 뒤에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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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반제국주의 사상은 1) 반폭력, 반식민주의 = 세계평화주의 2) 민족자결주의 3) 아나키즘 또는 코뮤니즘 → 현실적으로 가능한 운동은 무엇인가?
【2】김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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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이론 혹은 이데올로기의 출현이나 수용은 시대적 맥락속에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형태로 변용된다. 국가나 계급의 필요를 총족시키는 사회이론은 이데올로기적 성격까지 함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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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즘은 서구의 경우 계급 분화를 합리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것이 한말 조선에 들어오면, 부국강병의 논리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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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의 한국정치사상사 연구 방법론은 <인식-구조-과정-역사>의 차원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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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에는 두 차원이 있다. 첫 번째는 연구자의 인식문제이다. 연구자는 기존관념을 버리고 벌거벗은 자세로 연구대상 속에 들어가야 한다.(현상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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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식은 연구 대상 속의 행위자의 인식 문제이다. 이것은 행위자의 중요한 정치적 선택이나 결단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 중요 사건과 가진 인과관계를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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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는 행위자가 행동하는 배경과 같은 것이다. 유형화와 개념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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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이란 행위자들 사이의 동태적 과정이다. 이것은 구조를 넘어서며,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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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 및 구조, 과정은 역사관을 통해 통합되고 연결된다.
【3】신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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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자료를 읽으면서 그동안 한국정치사, 특히 구한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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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상실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세계사적․문명사적 전환기에 고종을 비롯한 지도층과 일반백성들의 인식과 노력을 과소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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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의 논의는 고종에 대해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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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종의 절충주의적 동도서기론이 문명대결론적 시각, 문명개화론으로의 전향 가능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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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신구절충적 입장이 외세의존적 입장을 보완하고 주체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노력이긴 하나, 이것이 근대주권국가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는지는 설명이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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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서기라는 유교문명적 인식보다는 자국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화혼양재라는 개혁방식을 표방한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에 합류한 뒤, 동아공영권 건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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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의문은 독립운동기와 대한민국 건국기에 민주공화제 정체에 대해 이견이 없었다는 점이다. 군주제에 대한 기억과 경험이 생생히 살아 있는 상황에서 대다수 국민이 군주제가 아닌 의회제에 바탕한 민주공화제 수립에 반대하지 않았다.
【4】시로자키 테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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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화파들은 독립과 자주의 개념이 일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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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은 화이질서에서 중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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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는 사대질서에서 자기 힘에 의한 자강정책을 처음부터 포기하는 체념에 기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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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村幹 교수는 이를 체념에 기초한 한국의 ‘소국주의’라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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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일본은 독립과 자주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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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막말 유신 시기에 있어서도 일본의 정치세력은 이이제이책을 택하거나 외국을 이용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정국을 조성하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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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동남아와 인도에서 서구열강이 조력을 계기로 식민지화를 추구했던 사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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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평등을 주장하고 인민주권적 정치와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근대화에 성공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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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화의 성공은 초기의 양이정책이 실패하면서 그 정책이 설득력을 잃고 결과적으로 양이정책이 포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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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우, 초기에 양이정책이 성공하면서도 오히려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
【5】이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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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의 자주독립외교론은 거의 모든 대외관계를 친구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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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이후 청의 대조선 간섭정책은 전통적 중화주의의 고수를 위한 방편으로 조선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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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는 독립의 유지를 지나치게 인민의 책임으로 돌려 외세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한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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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주도의 동양삼국 공영론에 지식인들이 빠져, 이것이 후에 대동아공영권과 연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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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작.윤순갑의 논문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1884-1890, 1899-1905년에 시대적 공백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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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논문의 오류중 하나는 조선의 왕권이 전제적이었다는 점, 내시가 왕의 전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설명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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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주동자들이 비밀결사 조직에 의한 쿠데타 계획에만 몰두할 뿐 개화파의 영향 아래 있는 각 계층의 결집에 소홀했다는 지적은 재고가 필요하다. 김은숙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갑신정변의 주도적 참여자의 2/3이는 평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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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에 따르면, 고종은 1871, 2년 무렵 중화적 세계관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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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전래된 <조선책략>에서 고종은 자신에게 필요한 정치적 언어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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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12월, 고종의 주도로 설치된 통리기무아문은 고종의 정치적 구상을 깊이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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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이런 정책은 당시 ‘공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비판에 직면했다. 의복제도 변경을 둘러싼 2개월의 논쟁은 당시 조선의 정치공간이 ‘공론의 존중’이라는 명분하에 정치적 선택의 폭이 얼마나 좁았는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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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공법>은 고종이 정치적 추진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용하였고, 그것은 <대한국국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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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는 명성왕후 민씨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는 이태진과 유사한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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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작, <<한말 내셔널리즘 연구>>는 한말 내셔널리즘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다만 좀 더 확장된 이해를 위해서는 최근의 연구업적을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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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ꡔ일본이 진실로 강하더냐: 근대의 길목에 선 조선의 선택ꡕ은 1881년 신사유람단을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일본의 서구시찰단과 비교 연구하고 있다. 신사유람단 내에는 두 개의 입장을 가진 그룹이 존재했다. 하나는 국민국가 수립론자, 다른 하나는 동도서기론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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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청의 서구시찰과 유학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첸강, 후징초 저 ꡔ유미유동ꡕ 시니북스, 2005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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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숙, ꡔ갑신정변연구ꡕ 역사문제연구소, 2005는 재판기록인 「추안금국안」과 「윤치호일기」등을 기초로 갑신정변 참여자들의 성분과 사상을 분석하고, 정령 14개조를 검토하고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갑신정변을 김옥균과 오경석, 유대치 등 중인계급의 연합에 의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것은 서구이론을 적용하기 위해 현실을 오도한 것이다.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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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 기무라의 소국주의 논의는 흥미롭다. 그러나 사대주의의 연장으로 이해될 위험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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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일본의 상상력은 풍부했으나, 오늘날은 빈곤하다. 일본이 19세기에 그랬던 것은 중화주의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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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를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시대의 조선이 너무 안일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견해는 너무 교과서적이다. 그 반대로 그 시대의 사람들도 매우 노력했는데 왜 실패했는가라는 식으로 문제의식을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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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사유람단은 일본 정부기관만 시찰한 것이 아니다. 3개월의 단기간에 놀라울 정도로 모든 것을 시찰했다. 당시 개화파의 인식 수준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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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장을 시대를 뛰어넘어 일관된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예컨대 박영효를 수미일관된 진보파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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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작의 연구는 그 시대의 연구수준을 볼 때 대단한 업적이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가 있다. 저자는 김옥균과 동일시하고 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이해가 매우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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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중세 -> 근대>의 전환기가 아니다. 오히려 두 문명이 만나서 대립 충돌하는 시대로 보아야 한다. 즉, 근대주의적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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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작의 연구는 이 시대를 너무 내셔널리즘으로만 덮어 씌우고 있다. 너무 인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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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민: 고종의 [칭제건원 -> 국가 승인]의 길은 stupid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타인, 타국의 승인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 반면 고종은 국내적으로 누가 주권의 주체인지를 모호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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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윤치호 일기>를 보면, 윤치호는 헤이그밀사 파견에 대해 고종이 독립을 길거리에서 주우려 했다고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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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 세력에 대한 논의는 1880년대와 90년대가 다르다.
다음으로 시로자키는 일본의 전쟁책임은 다 끝난 것으로 생각하며, 이 문제에 일본인들은 대체로 특별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발언하여, 뜨거운 논쟁이 이어졌다. 시로자키의 관점은 대체로
(1) 19세기말 조선의 식민지화와 중국의 곤경은 대체로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
(2)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법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는 것이다.
밤 9시에 수업이 끝난 뒤 강상규 선생님, 대학원 학생들과 즐거운 음주회가 있었습니다.
12월 8일
김영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