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군데 가만히 있기 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기질이다. 어렸을 때 하도 집에 붙어 있지 않고(사실은 붙어 있을 곳도 없었지만) 밖으로 돌아 다닌다고 함경도 출신인 서모가 “갓나 새끼, 발에 발동기를 달았니?”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일행과 함께 가거나 큰 돈 들이지 않고 가까운 곳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살면서 한 번도 돈을 들여 멀리 관광을 가본 일이 없다. 미국에 열 번을 갔어도 역시 한 번도 관광을 목적으로 움직여 본 적도 없다. 갈 때마다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거니와 나는 자연 보다는 인간에 치중하는 성격이어서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만나고 싶으면 힘들여 찾아가는 시간과 돈을 아깝지 않지만 가까이 있는 자연도 돈 들여 찾아가지는 못하는 구제불능의 인간지향적인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큰 맘 먹고 뉴질랜드를 단순 관광 목적으로 가기로 했다. 사실은 그것도 크라이스트 처치에 있는 동창생 부부의 왜 좀 안 오느냐는 성화에 못 이겨서 마지못해 내린 유전자적 원칙을 깨는 중대한 역사적인 결단이다.
반면에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한 곳에서 나고 자라고 죽는 사람도 있다. 나처럼
싸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한 곳에 붙박이로 사는 사람이 경험하는 세계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어서 행동 반경이 넓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세계가 넓은 것도 아니고 심심산골에 틀어 박혀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세계관이 반드시 좁으라는 법도 없다. 왜냐하면 세계란 어떤 사람에게는 우주전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겨우 자기가 오감으로 경험하는 세계에 국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크게 나누어 형이상학적인 세계와 형이하학적 세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형이상학은 끊임없이 사유함으로만 전개되는 세계이어서 형이하학처럼 검증할 수 없지만 인간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고 반드시 지녀야만 하는 세계이다.
그 사람의 세계가 얼마나 넓으냐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뿐만 아니라 얼마나 형이상학적으로 부지런히 사고를 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나와바리는 넓을수록 좋다. 형이하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지상에서 영원으로. 그러나 잘못해서 한 가지 교리나 논리체계에 빠지게 되면 넓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좁은 세계관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종교의 근본주의에 빠지는 경우라고 하겠다. 이번 심야의 봉은사 방문객처럼.
그들은 남의 나와바리에 은밀하게 침범해 자신의 나와버리를 선포해 버리려다가 사단이 난 것이다.
정치에서는 나와바리가 겹칠 수도 있고 혼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정치는 선거라는 순간에 나와바리를 어떻게 확장하느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게임이다. 어떻든 이번에 나의 나와바리를 뉴질랜드 남 섬까지 확장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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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관광 목적으로만 가시는 게 아니네요. 친구분들이 계시니까.
사모님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