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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자료 4.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 발견학습의 논리. (pp. 429-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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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 발견학습의 논리
Ⅰ. 서론
‘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관하여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하는 동안에, 메논은 그 당시 소피스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궤변 한 가지를 지적하고, 그것에 대하여 소크라테스의 의견을 묻는다. [각주 1: Menon, 80d.] 그 궤변의 요지는 ‘무슨 지식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알든가 모르든가 둘 중의 하나다. 2) 아는 사람에게는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3) 모르는 사람은 무엇을 배워야 할지 모르며, 설사 배운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배워야 할 바로 그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
(莊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위의 궤변과 관련하여 이 글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를 암시하고 있다. ‘세상에서 道를 귀히 여기는 것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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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말에 지나지 않고 말은 그것이 귀히 여기는 바가 있다. 말이 귀히 여기는 것은 뜻이요, 뜻은 그 따르는 바가 있다.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서 전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말을 귀히 여기고 글을 전한다. 사람들이 비록 말을 귀히 여기지만 내가 보기에 오히려 말은 귀히 여길 것이 못된다. 말을 귀히 여기는 것은 곧 그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 셈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보아서 보이는 것은 形과 色이요, 들어서 들리는 것은 名과 聲이다. 슬프다. 사람들은 形과 色과 名과 聲으로 저 참된 道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形과 色과 名과 聲으로는 저 道를 알 수가 없다. 곧 知者는 不言이요 言者는 不知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각주 2: 莊子 天道篇: 世之所貴道者 書也 書不過語 語有貴也 語之所貴者 意也 意有所隨 意之所隨者 不可以言傳也 而世因貴言傳書 世雖貴之哉 猶不足貴也 爲其貴非其貴也 故視而可見者 形與色也 聽而可聞者 名與聲也 悲夫 世人以形色名聲 爲足以得彼之情 夫形色名聲 果不足得彼之情 則知者不言 言者不知 而世豈識之哉.]
분명히 위의 궤변에 나타난 내용은 ‘사실’과는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을 두고 말하자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사실’로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궤변은, 우리가 보통 ‘궤변’이라는 말로 이해하듯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명백한 넌센스인가? 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 ‘사실상’ 가능하다면,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도대체 제기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적어도 소크라테스가 이 궤변을 취급한 방식을 보면, 우리는 위의 질문에 대하여 부정적인 대답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는 그 궤변을 아주 정중하게 취급하여 메논의 노예소년을 상대로 지식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적’인 증거를 보이고, 그 사실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를 열심히 설명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소크라테스는 그 궤변을 ‘사실’에 관한 것으로 취급하였고 그 궤변에 대하여 ‘논리적’인 해명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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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해명은 ‘영혼불멸’에 관한 그의 신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영혼은 죽지 않고 늘 새로운 육체를 빌어 거듭 태어난다. 이와 같이 새로운 육체를 빌어 태어나는 영혼은 그 전에 여러 차례 삶을 살았던 영혼이며, 따라서 그것은 이른바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의 삶에서 얻은 지식들을 잠재적인 상태로 가지고 태어난다. 소크라테스가 사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본 ‘의견’(doxa)은 그 원천이 바로 이와 같이 영혼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상태의 지식에 있다. 의견은 ‘지식’(noesis)과는 달리, 그릇될 수가 있으며 가변적이고 또 불안정하다. (소크라테스가 본 대로, 그릇된 의견의 전형적인 보기는 사람들이 사실상 모르고 있으면서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경향이다. 소크라테스의 평생은 그 그릇된 의견을 바로 잡아 주는 데에 바쳐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 지식을 가르친다는 것은, 우리가 보통 ‘가르친다’고 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학습자가 모르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의견’을 보다 항구적이고 안정된 ‘지식’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전형적으로 그 과정은 ‘논박’(elenchos)의 형태를 취한다. [각주 3: Richard Robinson, ‘Elenchus’, G. Vlastos(ed.), The Philosophy of Socrates. (New York: Anchor Books, 1971), pp.78-93.] 즉, 학습자로 하여금 먼저 어떤 문제에 관하여 그 자신의 입장을 말하도록 한다. 그 다음에, 그 첫째 입장에 관하여 일련의 체계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학습자 자신의 첫째 입장과는 모순되는 둘째 입장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학습자로 하여금 첫째 입장과 둘째 입장이 모순된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스스로 첫째 입장을 수정 또는 폐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방법은 학습자의 마음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지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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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산파가 아기를 받아내듯이 받아낸다는 뜻에서, 소크라테스 자신의 비유에 따라 ‘산파술’(maieutike) [각주 4: Theaitetos, 150b-d.] 이라고도 불린다.
이상이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는 궤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해명의 대체적인 요지이다. 아마 소크라테스는 그의 해명을 통하여 소피스트들의 궤변이 그릇되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해명은 과연 그 궤변을 부정하기에 충분한가? 다시 말하면, 지식 전수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소크라테스의 해명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소피스트들의 궤변과 소크라테스의 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첫째로, 대화편 『메논』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바와 같이, 소피스트들의 궤변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의 추구를 게을리하거나 일치감치 포기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는 데 비하여,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추구가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고 생각하면, 소크라테스의 해명은 그 궤변을 부정하는 데에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 만약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해명을 그 ‘내용’에 강조를 두고 받아들이면 과연 소크라테스의 해명이 그 궤변을 부정하였는가 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노예 소년에게 기하학의 문제를 가르치면서 자신은 노예 소년이 모르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메논에게 확인시켰다는 점,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말한 학습이라는 것은 학습자가 이미 (잠재적인 상태로) 알고 있는 것을 ‘회상’해내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점 등을 중요시한다면, 소크라테스의 해명은 소피스트의 궤변을 부정한다기보다는 그것의 논리적 타당성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해명을 통하여 한 일은 다만, 한편으로 그 궤변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타당성과 또 한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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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지식을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적 현상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하기 위하여 소크라테스는 ‘가르친다’든가 ‘학습한다’는 말의 의미를 보통의 의미와는 다르게 규정하였고, 여기에는 또한 영혼불멸에 관한 그의 신념이 근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식을 가르치는 것에 관한 소피스트의 궤변과 그것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해명 사이에 논리상 공통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오늘날 교육이론의 한 부분으로 매우 중요시되고 있는 ‘발견학습’ [각주 5: 관점에 따라서는 ‘발견학습’과 ‘탐구학습’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특별히 구별할 이유가 없다.] 에 관하여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문제를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보다는 이 질문의 의미를 몇 가지 측면에서 약간 자세하게 규정하고자 한다. 먼저, 발견학습의 일반적 의미에 비추어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제시하고, 그 질문이 몇몇 분석가들에 의하여 어떤 각도로 취급되었는가를 고찰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식의 구조와 그것에 포함된 사고과정 또는 지식 획득 과정과 관련하여 그 질문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를 고찰하겠다.
Ⅱ. ‘발견학습’의 잠정적 정의
일반적으로 말하여, ‘발견학습’이라는 것은 학생들에게 몇 가지 ‘관련된 사실’을 제시해 주고 그 사실들로부터 그것에 함의된 ‘원리’를 학생들 자신이 ‘발견’해내도록 하는 교수방법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대체로 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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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학습에게 학생들에게 제시되는 사실은 그것이 어떤 원리를 함의하는가가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미리 그 원리와 관련된 것들로 구성된다.
위와 같은 일반적 규정에서 우리는 발견학습과 관련되는 두 가지 종류의 ‘교육내용’을 분간해 낼 수 있다. 그것은 ‘사실’과 ‘원리’이다. [각주 6: 교육내용으로서의 ‘사실’과 ‘원리’에 관해서는 이홍우, 『지식의 구조와 교과』(서울: 교육과학사, 1979), 제8장 참조.] 이 두 가지는 발견학습에서 전혀 다른 성격 또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선 ‘사실’은 학생들에게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가르쳐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은 ‘발견’이라는 용어와 조금도 어긋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견’의 조건으로서 필요불가결하다. (브루너는 ‘『교육의 과정』의 재음미’에서 ‘어떤 사람들은 발견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심지어 성좌의 이름까지 발견해 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확대해석’은 그릇된 해석이다.) [각주 7: 이홍우(역), 『브루너 교육의 과정』(서울: 배영사, 1973), p.211.] 이와는 달리, ‘원리’는 발견학습에서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된다. 원리의 경우에 ‘가르쳐 준다’는 말은 ‘발견’이라는 용어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만약 교사가 원리를 가르쳐 준다면, 그 원리는 이미 학생이 발견한 원리가 아닌 것이다. 사실의 경우와는 달리 원리는 학생들이 스스로 발견하여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발견학습에서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교육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발견학습에서, ‘사실’은 교사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임에 비하여 ‘원리’는 학생들 자신이 발견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교육내용으로서 사실과 원리를 보다 명확하게 구분하는 한 가지 방법을 얻게 된다. 즉 ‘사실’이라는 것은 본질상 학습자의 ‘바깥’에 있는 것임에 비하여, ‘원리’는 학습자의 ‘안쪽’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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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 경우와는 달리, 원리는 학습자 자신의 관점, 안목, 또는 사고방식을 나타낸다는 것을 뜻한다. 1919년에 삼일운동이 일어났다든가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삼일운동의 역사적 의의라든가 물의 비등에 관한 과학적 법칙은 ‘원리’이다. [각주 8: 이 글의 주장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이라는 것은 위의 ‘사실’과 ‘원리’중에서 어느 것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둘다 ‘지식’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연구과제가 될 만큼 복잡한 문제이지만,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즉, 사실과 원리를 구분할 때, 지식은 원리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반드시 원리에 비추어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보기에 이 견해를 적용하면, 1919년에 삼일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지식’이라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오직 그것이 삼일운동의 역사적 의의라는 ‘원리’(역사학적 안목)와 관련하여 취급될 경우에 한해서이다.] 이러한 원리는, 사실과는 달리, 그 사실을 보는 방법(관점, 안목)을 의미하며, 학생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볼 수 없는 한, 학생들은 원리를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육내용으로서의 사실과 원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차이는 반드시 그것을 가르치는 방법의 차이와 직결되어 있다. 우리는 ‘사실을 가르친다’든가 ‘원리를 가르친다’고 하는 식으로 사실과 원리의 경우에 다같이 ‘가르친다’는 말을 쓰지만, 이 두 경우에 가르친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활동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사실의 경우에 가르친다는 말은 학생이 모르는 것을 ‘알려준다’는 뜻인 데 비하여, 원리의 경우에 가르친다는 말은 학생 자신의 눈으로 ‘보도록 한다’는 뜻이다.
발견학습의 정의에 관한 이상의 예비적 고찰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질문,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의미를 다소간 명백하게 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질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사실’의 경우에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러줌으로써 가르칠 수가 있다. 그러나 ‘원리’의 경우에는 교사가 어떻게 학생으로 하여금 학생 자신의 눈으로 보도록 할 수가 있는가? 더구나 발견학습의 의미상, 교사는 원리를 일러 주어서는 안 되며, 만약 일러 준다면 그것은 학생이 발견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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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또 그와 동시에 그것은 학생 자신의 ‘보는 방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과연 학생으로 하여금 교사가 일러주지 않은 방법으로 보도록 할 수가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앞의 일반적 규정에서 발견학습은 학생들에게 몇 가지 관련된 사실을 제시해주고 그 사실로부터 그것에 함의된 원리를 학생들 자신이 발견해 내도록 하는 교수방법을 가리킨다고 하는 식으로, ‘관련된 사실’이라는 말을 썼거니와 여기서 ‘관련된’이라는 말은 한편으로 ‘사실’과 또 한편으로 그 사실에 함의되어 있는(또는 그 사실에서 ‘도출’되는) ‘원리’와의 관련(함의관계)을 가리킨다.> 이 점에 비추어서 위의 질문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학생들은 사실과 원리와의 ‘함의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더욱 구체적으로는, 학생들은 자신에게 제시되는 사실이 ‘관련된 사실’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또는 그 사실들이 무슨 원리에 관련된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식으로 진술될 수 있을 것이다.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위와 같이, ‘과연 학생으로 하여금 교사가 가르쳐 주지 않은 방법으로 보도록 할 수 있는가’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이 질문은 바로 이 글의 첫 부분에서 말한 소피스트의 궤변과 소크라테스의 해명에 의하여 충분히 예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방식으로 진술해 놓고 보면, 그 질문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해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교사가 가르쳐 주지 않은 원리를 학생이 배울 수 있는가, 또는 학생이 그 원리에 입각하여 자기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무슨 해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실상 학생들이 그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이 질문에 대해서는 ‘사람이란 원래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라는 것밖에 다른 대답이 없을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원리의 학습(즉, ‘관련된 사실’로부터 원리를 이끌어 내는 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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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한 한, 인간은 모종의 신비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이나 ‘회상’과 같은 용어는 바로 그러한 신비스러운 능력에 대한 공공연한 인정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할지 모른다.
Ⅲ. 몇 가지 철학적 분석
피터즈가 편집한 『교육의 개념』이라는 책 [각주 9: R. S. Peters(ed.), The Concept of Education.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67).] 에 수록된 논문 중에서 적어도 세 편은 다소간 직접적으로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다. 물론 이 세 편의 글에는 이하에서 논의되는 것 이외의 중요한 주장들이 제시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직접 관련되는 범위 내에서 그 세 편의 논문을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오우크쇼트의 글,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 [각주 10: Michael Oakeshott, ‘Learning and Teaching’, R. S. Peters(ed.), op. cit., pp.156-176. 이하 괄호 안의 숫자는 피터즈 책의 페이지를 가리킨다.] 을 보면, 오우크쇼트는 교육을 ‘미성년자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입문시키는 일’로 규정하고, 그 문화유산의 내용을 크게 ‘정보’(information)와 ‘판단’(judgment)의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하의 설명에서 밝혀질 바와 같이, 오우크쇼트가 말한 정보와 판단은 앞에서 말한 사실과 원리에 각각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오우크쇼트의 구분에서 하나는 ‘명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동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보라는 것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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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지적 활동의 가시적 결과’(p.164)를 뜻하며, 이것은 바깥으로 명백히 드러내어 말할 수도 있고, 또 항목으로 나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판단은 정보와 동등한 범주의 교육내용이 아니다. 판단은 항목으로 제시될 수도 없고 또 외우거나 잊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우크쇼트는 자신이 그 전에 다른 글 [각주 11: M. Oakeshott, Rationalism in Politics. (London: Methuen, 1962), p.308.] 에서 사용한 ‘문헌’(literature)과 ‘언어’(language)의 구별에 비추어서, 판단은 언어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p.174). 판단이라는 것은 예컨대 ‘자세하게 명문화하여 제시할 수 없는 과학탐구의 방법’과 같은 것이며, ‘명문화된 과학적 지식의 내용’(문헌)은 이 과학탐구 방법과의 관련을 떠나서는 하등 의미가 없다(p.168). 그러나 정보와 판단은 동일한 방법으로 전달될 수 없다. 사실상 오우크쇼트에 의하면, 그 두 가지는 교육내용의 구분이라기보다는 전달방법의 구분이라고 보아야 한다(p.170). 그리하여 ‘가르치는 일’(teaching)은 정보의 전달과 판단의 전수라는 이중의 활동을 가리키며, [각주 12: Oakeshott는 정보의 전달은 instructing이라고 부르고 판단의 전수를 imparting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 말로는 전자를 ‘직접전달’, 그리고 후자를 ‘간접전달’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배우는 일’(learning)은 정보의 획득과 판단의 습득이라는 이중의 활동을 가리킨다.
판단은 정보와 동등한 범주의 교육내용이 아니요, 두 가지는 전달되는 내용의 구분이라기보다는 전달방법의 구분인 만큼, 판단을 가르치는 일은 몇 개의 새로운 정보를 추가시켜 주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판단을 가르치는 일은 물리나 역사가 아닌, 또는 물리나 역사와는 별개인 제 3의 ‘교과’를 가르치는 일이 될 수 없다. 만약 판단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보의 전달과 별개의 일을 통하여 가르쳐져서는 안 되며, 바로 그 일과 관련하여, 또는 그 일을 통하여 가르쳐져야 한다. 이제 이 사태를 교사와 학생의 입장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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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에서 보면 어떠한가?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판단을 배우는 것은 여러 가지 정보를 배우는 것 이외에 또 한 가지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여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여러 가지 정보를 배운 ‘부산물’로서 판단을 배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교사의 입장에서는 사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판단을 가르치려고 할 때 교사는 정보를 가르치는 일 이외에 모종의 다른 일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만약 다른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떤 일인가가 문제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우크쇼트는 ‘만약 판단이라는 것이 가르쳐질 수 있다면, 그것은 정보를 “직접전달”(instruction)하는 과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달”(imparting)된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p.174)고 말하고 있다. 뒤이어 오우크쇼트는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은 결국 ‘간접전달’되는 판단이 어떤 것인가를 보아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구태여 말한다면 ‘판단’은 ‘교사의 시범’에 의하여 가르쳐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교사의 시범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 오우크쇼트에 의하면, 그 시범은 예컨대 정보를 전달하는 양태, 어조, 제스처 등을 가리킨다 ― 이 교사의 시범이라는 것도 결국은 정보를 ‘직접전달’하는 활동의 한 부분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우크쇼트의 분석에서도 교사가 판단을 ‘직접전달’하기 위하여, 정보를 ‘직접전달’하는 것 이외에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또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라일의 ‘교수와 훈련’ [각주 13: Gilbert Ryle, ‘Teaching and Training’, R. S. Peters(ed.), The Concept of Education, pp.105-119.] 에서는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다음과 같은 각도로 취급되어 있다. 즉, 교육사태에서 교사는 자신이 직접 가르쳐 준 것 이외에 학생이 혼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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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주고자 한다. 그러나 학생은 교사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을 어떻게 혼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또는 교사는 학생들이 자신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을 하도록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교육에 관한 한 가지 근본적인 패러독스를 내포하고 있다. 즉, 만약 교사가 학생들에게 수학에 관한 가르쳐 준다면, 그것은 학생이 혼자서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학생 자신의 생각이라면, 그것은 교사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학생들이 배우지 않은 일을 하도록 가르치는 일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데에 있다.
표면상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라일의 질문은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우리의 질문과 매우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우리의 질문은 발견학습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눈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보도록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이 질문과 관련지어 보면, 라일의 질문은 교사에게서 직접 배우지 않은 ‘원리’를 학생들이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는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라일의 대답은 『마음의 개념』 [각주 14: Gilbert Ryle, The Concept of Mind. (London: Hutchinson, 1949), Chap.2 Knowing How and Knowing That.] 에서의 그의 주장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이 책에서 라일은 ‘아는 것’을 주로 이론적 명제(knowing that)에 국한시키거나 그것에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는 종래의 경향을 비판하고, ‘아는 것’은 주로 실제적 방법(knowing how)과 관련하여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아는 것’은 아는 내용 ― 그것이 명제건 방법이건 간에 ― 을 취급하는 방법, 또는 그것을 ‘아는 일’을 할 때 그 일을 하는 모양에 의하여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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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하게, ‘교수와 훈련’에서 라일은 교육의 무게중심을 종래와 같이 이론적 명제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teaching that, learning that)에서 실제적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teaching to, learning to)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가르치는 일을 할 때 교사는 학생들에게 명제를 가르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능력이나 기술을 가르치려고 해야 한다. (라일의 글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라일은 이러한 능력이나 기술을 가르친다는 뜻에서의 ‘교수’를 ‘훈련’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라일의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 그의 질문, 즉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배우지 않은 일을 하도록 가르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어떻게 대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짐작하기 별로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그러한 능력이나 기술을 배울 때 학생들은 ‘일반적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라일에 의하면 이러이러한 일을 할 줄 알도록 가르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p.114). 방법을 배우는 것과 그 방법을 새로운 사태에 적용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며, 따라서 비록 학생이 교사에게서 방법을 배웠다 하더라도 그 방법을 새로운 사태에 적용하는 것은 교사에게서 배우지 않고 학생이 혼자서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라일이 처음에 지적한 패러독스 ― 학생은 교사에게서 배우지 않은 일을 한다는 패러독스 ― 는 ‘방법’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해소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라일이 말한 ‘방법’을 가르치는 방법은 무엇인가? 라일이 말한 바와 같이, 이러이러한 일을 할 줄 알도록 가르치는 것은 곧 ‘방법’을 가르치는 것인 만큼,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곧 그 일을 실지로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p.116). 이러한 라일의 견해는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상당히 유력한 후보가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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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대답치고는 너무나 쉬운 대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라일의 견해에 비추어 우리의 질문에 대답한다면,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원리를 실행하도록, 다시 말하면 그 원리를 써서 현상을 보는 일을 실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가 발견학습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곧 그 일을 실행하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며, 우리가 원래 대답하고자 한 질문은,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그 일을 실행하도록 할 수 있는가, 만약 할 수 있다면 교사는 어떻게 그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라일의 견해에 의하면 학생들은 바로 우리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실행함으로써만 그것을 배우게 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이 경우에 가르친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되돌아간다.
마지막으로 디어든의 ‘교수와 발견학습’ [각주 15: R. F. Dearden, ‘Instruction and Leaning by Discovery’, R. S. Peters(ed.), The Concept of Education, pp.135-155.] 은 발견학습에서 ‘가르친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다. 디어든은 ‘직접전달’(instruction)과 ‘발견학습’(learning by discovery)의 두 가지가 교사의 가르침(teaching)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기준에 비추어 대비된다는 식의 상식적인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즉, 직접전달은, 물론, 교사가 교육내용을 학생들에게 직접 일러 주는 것이며, 이것은 교육내용을 맹목적으로 암기하도록 하는 데는 바람직할지 모르나, 판단이라든가 적용을 가르치는 데는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직접전달이 가르치는 일의 유일한 형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직접전달이 가르치는 일의 유일한 형태라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발견학습이라는 것이 마치 교사의 교육적인 노력이 거의 전적으로 배제된 학생들 자신의 ‘놀이’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디어든에 의하면, 발견학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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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뜻으로 해석할 때 그것은 지식을 가르치는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디어든은 발견학습에 관한 견해로서 두 가지 그릇된 것을 비판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디어든이 보기에 그릇된 두 가지 견해는 그가 이름붙인대로 ‘유치원교육 모형’(preschool model)과 ‘추상이론’(abstractionism)이다. 유치원교육 모형에서는 아동들에게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동 자신으로 하여금 사물을 관찰하고 조작하고 탐색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추상이론에 의하면, 학생들은 개별적인 사물에서 일반적인 속성 또는 원리를 추상해 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디어든이 보기에, 이 두 가지 견해는 본질상 동일한 관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즉, 학생들이 개별적인 사물이나 현상을 경험함으로써 거기서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해 낼 수 있으려면 학생들에게 이미 일반적인 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학생들은 개별적인 사물에서 일반적인 원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에 의하여 비로소 개별적인 사물들을 공통된 것으로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사용한 표현을 써서 말하면, 학생들이 ‘관련된 사실’에서 원리를 발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실들을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원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디어든의 관점은 지식의 획득과정에 관심을 가지는 분석철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점이다. (앞에서 말한 소피스트의 궤변 중에서 ‘모르는 사람은 무엇을 배워야 할지 모르며, 설사 배운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배워야 할 바로 그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부분과의 관련을 생각해 보라.)
디어든은 자신이 지지하는 발견학습의 관점을 ‘문제해결 모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관점에 의하면, 교사는 단순히 자료를 제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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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 이상으로, 학생들이 발견해야 할 내용에 관하여 질문을 하고 힌트를 주고 할 일을 시사하는 등, ‘언어를 미묘하게 구사하여 경험을 안내하는’(p.151) 일을 한다. 결국, 디어든에 의하면 순전히 문자 그대로의 ‘발견’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여기에는 교사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이 교사의 개입은 직접전달과 동일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상으로 ‘원리의 발견’에 관한 세 분석가의 견해를 고찰해 보았거니와, 이 세 사람의 견해는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 공통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원리는 가르칠 수 있다는 것과 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교사는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반대편에서 말하면, 순전한 발견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교사의 할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세 사람의 견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대체적으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오우크쇼트의 경우에 그것은 교사가 ‘판단’의 사용을 시범하는 것이요, 라일의 경우에 그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원리를 적용하는 일을 실행하도록 하는 것이요, 디어든의 경우에 그것은 질문을 하고 힌트를 주고 하는 것과 같은 ‘언어의 미묘한 구사’에 의하여 학생들의 발견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교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또는 다른 말로, 학생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도록 하기 위하여 교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충분히 분명해졌다고 볼 수 있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분명하지 않는 한,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게 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혹시, 근래 교육방법의 원리로서 발견학습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이 문제에 관하여 모종의 중요한 실마리가 잡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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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지식의 구조와 발견학습
우선, 브루너가 『교육의 과정』에서 그 책의 내용이 나타내고 있는 한 가지 핵심적 확신이라고 말한 ‘물리학을 공부하는 국민학교 3학년 학생은 물리학자와 동일한 일을 한다’ [각주 16: J. S. Bruner, The Process of Education, 이홍우(역), 『브루너 교육의 과정』(서울: 배영사, 1973), p.68.] 는 말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여기서 3학년 학생과 물리학자가 하는 ‘동일한 일’, 또는 그들이 공부하는 ‘동일한 내용’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지식의 구조’일 것이다. 앞에 인용된 말은 『교육의 과정』에 제시된 ‘대담한 가설’, 즉 ‘어떤 교사든지 그 교과의 성격에 충실한 형태로 어떤 발달단계에 있는 어떤 아동에게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말에서 ‘교과’라는 것 ― 발달단계 여하를 막론하고 가르쳐야 할 내용 ― 도 마찬가지로 ‘지식의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다. 『교육의 적합성』 [각주 17: J. S. Bruner, The Relevance of Education.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1972), p.109.] 에서 브루너는 ‘지식의 구조’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지식의 구조를 가르치는 것은 예컨대 물리학을 토픽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어째서 3학년 학생과 물리학자가 동일한 일을 하여야 하는가, 어째서 발달단계 여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교과를 가르쳐야 하는가,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째서 물리학을 토픽으로 가르쳐서는 안 되고 사고방식으로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데에 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브루너가 시사하는 대답은 이 글의 앞 부분에서 우리가 말한 ‘사실’과 ‘원리’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즉, 교육내용으로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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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픽은 학습자의 바깥에 있는 것임에 비하여 사고방식은 학습자의 안쪽에 있는 것, 학습자 자신의 것이라는 점이다. [각주 18: J. S. Bruner, The Relevance of Education.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1972), p.113.] 물리학을 토픽으로 가르쳐서는 안 되는 이유는 명백하게, 그렇게 가르치면 그 물리학은 학생의 능력이 아닌 상태로, 다시 말하면 물리학적인 현상을 보는 학생의 안목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학을 가르치는 원래의 의도에 어긋난다.
우리가 발견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교육방법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런 상태로 물리학을 배우도록 할 것이 아니라 물리학이 학생 자신의 ‘보는 눈’이 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대두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리학이 학생 자신의 안목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쓰든지간에 학생 자신이 스스로 물리 현상을 보도록, 다시 말하면 학생이 스스로 원리를 ‘발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앞 부분에서 말한 바에 비추어 보면, 이것이 ‘원리를 가르친다’는 말의 의미이다.) 여기에 비하면, 물리학의 원리를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쳐 주면, 그것은 토픽으로서 학생의 바깥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이 때까지 다루어 온 문제 ― 발견학습의 패러독스라고 부를 수 있는 문제 ― 는 바로 이것과 관계가 있다. 즉, 교사가 원리를 가르쳐주면 그것은 학생의 것이 아니며, 학생의 것이 되려고 하면 교사가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원리가 학생의 것이 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 일은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우리가 다루어 온 문제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로서, 유치원 아이들에게 분업이라는 사회학적 개념(또는 원리)을 가르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브루너는 ‘어떤 교과든지 그 교과의 성격에 충실한 형태로 어떤 발달단계에 있는 어떤 아동에게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 경우에 교사의 의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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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아이들로 하여금 분업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파악되는 사회현상을 그 개념으로 파악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여러분, 분업이라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운운하는 것은 곧 분업을 토픽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적어도 유치원 아이들이 분업에 관련되는 현상을 보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신 교사는 예컨대 집안 식구들이 대청소를 하는 경우에 어떻게 하는가를 말할 수(또는, 아이들에게 말해 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분업에 ‘관련된 사실’을 일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 사실들을 분업이라는 개념(또는 원리)으로 파악하도록, 또는 분업이라는 눈으로 보도록 하기 위하여 교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교사는 그 이상으로, 예컨대 ‘이것을 사회학자들은 분업이라고 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러나 대청소의 현상을 분업이라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이들에게 ‘이것을 사회학자들은 분업이라고 한다’는 식의 말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만약 이 말이 유치원 아이들에게 소용이 없다면, 이 말이 소용이 있는 것은 어느 시기부터인가?
발견학습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원리를 일러 주는 것이 금지사항으로 취급되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하면 학생들은 그 원리를 토픽(학습자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학습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데에 있다. 사실상, 유치원 아이들에게 ‘이것을 분업이라고 한다’는 식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사태를 보도록 하는 데에는 특별히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어려운 용어(토픽)들을 가르쳐 주고, 학생이 거기서 모종의 중요한 내용을 학습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모든 교육수준에 걸쳐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지식의 구조라든가 발견학습은 이것이 오류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오류는 바로 어려운 용어를 가르치려고 하고 그 용어가 가지고 있는 기능, 또는 그 용어의 이면에 들어 있는 안목이나 사고방식을 가르치지 않는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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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오류를 시정하는 방법은 학생들에게 용어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 용어에 담겨 있는 사고방식 또는 사물을 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에 있다. 이 일을 하는 데에는 교사에게 특별한 능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발견학습’이 교육의 원리로서 가지고 있는 의의로서 이따금, 그것은 적어도 교사에게 맹목적인 수업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앞의 분업을 가르치는 유치원 수업에서 예시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학생들에게 토픽으로서의 용어를 가르치지 않고 그 용어에 들어있는 사고방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학생들로 하여금 그 용어에 내재해 있는 안목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보도록 하기 위하여, ‘관련된 사실’을 제시하는 것 이외에 교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그 ‘관련된 사실’을 보는 능력(즉, 개념 또는 원리)이 있다는 것을 미리 가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능력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말한 ‘영혼의 잠재적 지식’과도 흡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마지막으로 심리학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취급되는지 고찰해 보겠다.
Ⅴ. 발견의 심리학
브레트의 『심리학사』에서 우리는 초기 희랍의 어떤 사람(Alcmaion)이 시각에 관하여 한 가지 재미있는 설명을 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각주 19: Brett’s History of Psychology, edited and abridged by R. S. Peters. (MIT Press, 1962), p.53.] 이 사람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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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각은 ‘반사’(reflection)와 ‘조명’(radiation)이라는 이중의 과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먼저 ‘반사’에 의하여 사물의 영상이 눈에 있는 ‘물’에 비친다. 그 다음에 ‘조명’이라는 것은 눈동자에 있는 ‘불’의 광선이 그 그림자를 비추는 과정이다. 이 설명이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시각에 관한 설명, 즉 물체에서 나오는 빛이 시신경을 자극하여 물체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식의 설명과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그 희랍 사람의 설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시각이라는 것에는 오히려 우리 눈동자에서 나오는 불빛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는 데에 있다.
이 설명을 비유로 삼아, 우리는 ‘알게 되는 과정’의 두 방향을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는 것’과 ‘보는 것’에는 명백한 병렬관계가 있다.) 하나는 앞의 ‘반사’에 해당하는 방향으로서 ‘아는 내용’이 우리의 눈이나 마음에 ‘비치는 과정’이요, 또 하나는 ‘조명’의 방향, 즉 우리의 눈이나 마음이 그 ‘아는 내용’을 ‘비추는 과정’이다. 물론, 이 두 방향의 구분은 이론상의 구분이며, 그 희랍 사람의 시각에 관한 설명에서와 같이, 학습에 관한 어떠한 이론도 이 두 방향 중의 어느 한 가지를 완전히 도외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중의 어느 것을 주된 요인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학습이론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종래의 학습이론에서는 ‘학습내용에서 학습자’, 그리고 ‘학습자에서 학습내용’이라는 두 방향 중에서 어느 쪽을 강조해 왔는가? 대체로 말하여, 종래의 학습이론에서는 학습내용이 학습자의 마음에 비치는 과정을 더 강조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우리가 시각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견해와 일치한다. 우리는 물체에서 나온 빛이 시신경에 와 닿을 때 시각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운다든가 가르친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1차적으로 학습내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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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가 받아들이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가 보통 가르치는 일을 학습자로 하여금 ‘보도록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주로 학습자에게 ‘일러주는 일’로 생각하는 것은 이 점에서 오히려 당연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피아제가 지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 ‘동화’(assimilation)와 ‘조절’(accommodation)의 두 개념은 학습의 과정에 포함된 두 방향으로서의 ‘비추는 과정’과 ‘비치는 과정’에 각각 비유될 수 있다. [각주 20: J. Piaget, The Psychology of Intelligence.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50), pp.7ff.] 결국, 피아제의 설명은 희랍 사람의 시각에 관한 설명을 지적 현상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아제의 설명에서는 그 두 가지 과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피아제의 설명에 관하여, ‘동화’와 ‘조절’ 중의 어느 쪽이 더 강조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별로 의미가 없는 질문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피아제가 지적 과정에 관한 설명에서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라 대상에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을 강조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신구조’(schema)에 의하여, 또 그 정신구조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는 부분에 한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면, 피아제는 학습의 두 과정 중에서 분명히 학습자가 학습내용을 ‘비추는 과정’을 더 중요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피아제의 설명에 의하면 학습자로 하여금 학습내용을 비출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그 학습자가 가지고 있는 정신구조이며, 이 정신구조는 그 당시까지 학습자가 거쳐온 동화와 조절의 복합적 과정의 결과이다.
이 피아제의 설명을 교육사태, 또는 보다 구체적으로 발견학습 사태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의 주된 관심이 교육에 있지 않은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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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제 자신이 이 문제에 관하여 직접 발언하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짐작하건대 피아제가 말하는 정신구조 ― 학생들이 사태를 보는 데에 필요한 안목 ― 는 보통의 수업사태에서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보통의 수업사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피아제의 이론을 교육의 사태에 적용하면서, 브루너가 ‘지식의 구조’를 가르치는 방법으로서 세 가지 ‘표현방식’(models of representation)을 말한 것은 충분히 납득될 수 있다. [각주 21: J. S. Bruner, Toward a Theory of Instruc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66), pp.44ff.] 브루너에 의하면, 그 세 가지 표현방식은 각각의 발달단계에 따라 동일한 정신구조(또는 원리)를 활용하는 상이한 방식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작동적, 영상적, 상징적 표현에 의하여 이해할 때, 학생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내용을 동일한 정신구조에 의하여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피아제의 설명과 브루너의 견해를 관련지어 보면, 예컨대 자기자신의 몸을 움직여서, 또는 도형이나 모형으로 어떤 내용을 배울 때, 학생들은 이미 그 내용을 파악하는 원리를 마음 속에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학생들이 동작이나 영상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원리가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피아제에 의하면, 그 마음 속에 있는 원리는 그 당시까지 학생들이 경험한 ‘동화’와 ‘조절’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피아제와 브루너의 견해에 비추어 보면, 발견학습에서 학생들이 원리를 발견해야 할 때 우리는 학생들이 이미 그 발견해야 할 원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가정은 학습에서 학습자가 학습내용을 ‘비추는 과정’을 강조하는 한,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가정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피아제와 브루너의 이론에서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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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질문은 새로운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습사태에서 이미 학습자의 마음 속에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영혼의 무한한 환생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 즉 동화와 조절의 경험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결국, 피아제와 브루너의 견해에서 끌어낸 심리학적 설명에서는 ‘영혼의 환생’이라는 신비가 학습자의 ‘과거의 경험’으로 대치된다. 그러나 약간만 관점을 달리하여, 만약 우리가 ‘과학’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과거의 경험’이라는 것이 과연 ‘영혼의 환생’을 둘러싼 신비를 완전히 벗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상의 고찰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원리는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은 없다. 아마 교육의 실제 사태에서는, 오우크쇼트나 디어든이 말한 바와 같이, 교사가 원리의 사용을 시범해 보이거나 ‘미묘한 언어의 구사’에 의하여 학생들 스스로가 원리를 보도록(또는 ‘원리를 써서’ 보도록) 이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원리의 발견’이 이론상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자세하게 해명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생기겠지만, 아마 그보다는 교육에 신비스러운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신비를 신비로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 더 온당한 처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