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성자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지극히 거룩한 천주의 모친으로서
교회의 특별한 예식으로 공경 받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리아는 초세기부터 '천주의 모친'이란 칭호로 공경 받아왔으며
신자들은 온갖 위험과 아쉬움 중에 그의 보호 밑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한다.
루가 1 장 48 절에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음이로다' 하신 마리아의 예언대로
에페소 공의회 이후 신자들의 마리아 공경은
존경과 사랑과 기도와 모방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다.
교리 안에서 시대와 장소의 조건이나 신자들의 기질과 품성에 따라
교회가 인준한 성모 신심의 여러 형태는 성모가 공경을 받으심으로써
성자가 옳게 이해되시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며 성자의 계명이 준수되도록 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 백성의 표상으로, 하느님의 신부로 선택된 애초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던 유일한 인간이다.
여러 날에 성모공경 축일을 지내고 있으며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을 재현해 놓은 성모상도 많다.
# 1월1일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ad Epictetum, 5-9: PG 26, 1058. 1062-1066)
말씀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사도의 말에 의하면 "말씀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시고자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하고"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셔야 했습니다.
마리아가 존재하게 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께서는 우리를 위해 바치신 당신의 육신을 마리아에게서 취하셨습니다.
성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말할 때 "마리아는 그를 포대기로 쌌다."고 하고
또 그를 젖 먹인 젖가슴은 복되다고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온 그 순간부터 희생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전할 때
그것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외부로부터 마리아 안으로 주입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천사는 마리아에게 단순히 "당신 안에서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육신은 정말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천사는 "당신에게서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말씀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이 우리 인성을 취하시어
그것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 인성을 완전히 흡수하여
우리를 당신 신성으로 옷입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하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의 단순한 가현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참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전인적인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구원은 절대로 허구가 아니고 육신만의 구원도 아닙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 즉 육신과 영혼의 구원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말씀대로 마리아에게서 탄생한 분은 참인간이셨고,
주님의 육신은 참 육신이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이었으므로 참 육신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 자매이십니다.
그분과 우리 모두 다 아담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는 요한의 말은 이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받은 자가 되셨다."라는
바울로의 말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 육신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통교와 결합을 통하여 큰 보화를 받았습니다.
즉 멸하고야 말 것은 불사 불멸의 것이 되었고 육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되었으며
땅에서 지음 받은 것은 천국 문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자께서 마리아로부터 육신을 취하신 후에도 삼위 일체는 항상 삼위 일체이십니다.
그 안에 어떠한 첨가나 감소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삼위 일체는 항상 완전하십니다.
삼위 안에 한 분 하느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말씀이신 성자의 아버지이신 한 분 하느님을 전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차부제이던 그는 사막에서부터
움브리아의 총독또르과 뚜스 앞으로 끌려왔다.
총독은 첫심문에서 곤보으로 마구 때렸고, 두번째에는 고문대에 올려 놓았는데,
그는 높은 곳에 매달린 채로 "주예수여, 찬미받으소서!"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3일 후, 2명의 군인이 와서 그를 지하감방에 가두었다.
그가 희생을 바치라는 신산 앞에 침을 뱉자, 군인이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마뇨 St.Maguns ? 순교자
♤그레고리오 나지안제노(맏이) St.Gregory Nazianzen the Elder 374년 주교,증거자
그레고리오 GREGORY 374년 축일: 01-01 주교 나지안젠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맏이), 주교(374년 순교)
카파도치아의 나지안젠 출신인 그는 아내인 논나의 권유로
크리스챤이 될 때까지 그 지방의 고관으로 있었다.
이들 부부는 3자녀를 두었는데, 그레고리오 나지안젠, 체사리오 그리고 고리고니아이다.
그레고리오 맏이는 328년경에 나지안젠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한동안 이단에 빠졌다가,
361년경에 아들의 영향으로 정통교회로 되돌아 왔다.
그는 거의 45년 동안이나 주교직을 수행하였다.
동방 교회의 은수자인 알마치오는
투기장에서 검객들의 시합을 중단시키려고 하다가 로마에서 돌로 맞아 죽었다.
테오도레에 의하면, 그의 죽음이 호노리우스 황제로 하여금
검객들의 시합을 중지시키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텔레마코로도 알려져 있다.
★에우젠도 eugendus 510년경 축일: 01-01 원장 콘다트
에우젠도 혹은 오이엔도(eugendus or oyend)
성 로마노와 성 루피치노가 서거한 뒤, 이 두 분이 세운 콘다트 수도원은
일곱 살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에우젠도가 원장인 미나우시오를 도와서 지도하고 있었다.
에우젠도의 생활은 다른 수도자들의 입에서도 너무 엄격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분노하는 행동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무던히 애썼다.
그러므로 그의 성격은 항상 온화하였지만, 결코 웃는 법이 없었다.
또한 그는 희랍어와 라틴어 및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그는 실로 학문의 대가였다.
그가 콘다트의 원장으로 재직할 때, 불타버린 이 수도원을 돌로 재건하였고,
또 성 베드로, 바오로 및 안드레아에게 봉헌된 성당도 재건하였다.
그의 기도는 거의 하루종일 계속되었고, 그의 불타는 열성은 임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61세가 되어 운명하니,
콘다트 대수도원은 이 성인의 이름을 따서 쌩-오이엥이라 부르게 되었다.
♤바실리오(엑스) St.Basil of Aix 521년 주교,증거자
♤풀렌시오(러스페) St.Fulgentius of Ruspe 533년 주교,증거자
성 풀젠시오 Fulgentius 01.01 주교,증거자 러스페 533년
♤유스띠노(키에띠) St.Justin of Chieti 540년경 증거자
성 유스티노 Justinus 01.01 증거자 키에티 540년경
♤판체아 St.Fanchea 585년경 동정
♤펠릭스(부르쥬) St.Felix of Bourges 580년경 주교
펠릭스 Felix 580년경 축일: 01-01 주교 부르쥬스
파리의 성 제르마노가 그의 주교직을 승인하고 축성한 인물이므로
이 성인의 존재는 확실하나,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다.
그는 파리 회의에 참석하였고(573년),
베난시우스 포르뚜나뚜스가 그에게 헌시를 바친 것이 기록상으로 남아 있다.
그의 무덤은 데 까스뜨로의 성 아우스트레지실로 성당에 있다.
성녀 에우프로시나는 부자이던 파프누씨우스란 사람의 딸이었다.
부친은 오랜동안 자식이 없다가 얻은 딸이므로 그녀를 일찌기 결혼시키기 위하여
어느 부자집 아들과 미리 약혼을 해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봉헌생활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항상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하며 생활하였다.
한번은 그녀의 부친이 출타했을 때,
그녀가 태어나도록 늘 기도를 해왔던 어느 늙은 수도자가 찾아와서 그녀에게 수도복을 입혔다.
그러나 그 부친의 불같은 성화를 이길 수 없다는 판단아래 그녀는 남장을 하고,
남자 수도복을 입고는, 그의 부친이 자주 찾아가는 수도원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스마라그두스라 불리웠으며,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는 그 시대에 상당히 유명해졌다.
그녀의 부친도 딸에게서 영적 지도를 자주 받았으나,
스마라그두스 수사가 자기 딸인 줄은 몰랐다고 한다.
이윽고 그녀가 운명할 즈음에 부친에게 자기의 신원을 밝혔다.
이에 감동한 그녀의 부친은 곧 수도자가 되어,
딸이 살던 수도원 방에서 10년을 살다가 하느님 품에 안겼다.
♤클라로 St.Clarus 660년경 원장,베네딕또회
그의 젊은 시절에 얻은 클라로라는 이름은 "빛남, 광명"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그의 인간적인 지식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놀라운 지식 때문에 얻었다고 한다.
그는 도피네의 비엔나에 있는 성 마르첼로 수도원의 원장으로 훌륭한 덕을 닦았다.
그는, 비엔나 대주교인 카데올두스에 의하면, 성 페레올 수도원의 수도자로 출발하여,
성 블란디나 수도우너의 영적 지도자로 지내면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여러 부인들을 수도생활로 인도하였다.
클라로의 공경은 1903년에 공인되었다.
#클라로라는 이름은 '빛남, 광명'이라는 뜻으로
그의 인간적인 지식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놀라운 지식을 얻었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도원장으로 훌륭한 덕을 닦은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많은 부인들을 수도생활도 인도하였다.
★베드로 peter 837 축일: 01-01 원장 아트로아
소아시아의 에페소 출신인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도자가 되어
성 바오로라는 수도자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분이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7년 후에 그는 사제로 서품받고,
스승과 함께 예루살렘을 순례하려다가 올림푸스산으로 갔는데,
스승은 이곳에서 성 자카리아 수도원을 세웠다.
805년에 스승이 운명하자, 베드로가 그를 승계하여 원장이 되었으나
10년 동안 수도원 문을 닫아야만 하였으니,
레오 황제의 성상파괴 박해가 재개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현상금이 붙었기에 에페소와 크레타 등지로 숨어 지내다가,
헬레스폰트 교외 칼로나로스에 정착하였다.
그는 마술을 하며 또 악마를 이용한다는 루머에 시달렸으나,
성 테오도레 스투디떼스가 거짓임을 판명해 주었다.
이때부터 그는 다시 아트로아로 돌아가서 성 자카리아 수도원을 재건하였으나,
또다시 박해가 치열하므로 성 뽀르피리 수도원으로 은신하던 중,
재차 원래의 자기 은둔소로 돌아가서 운명하였다.
♤윌리암(디죵) St.William of Dijon 1031년 원장,베네딕또회
성 베니뇨의 윌리아이라고도 부르는 성 윌리암은 볼피아노의 백작 로베르또의 아들이다.
그는 노체라와 가까운 오르타 호수에 있는 산 쥬글리오섬의 가족성에서 태어났고,
17세 때에 로카디오의 베네딕또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987년에는 끌뤼니에서 성 마욜로를 만났다.
그는 론 지방의 성 세르닌 수도원을 재정비하였으며,
990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 디죵의 성 베니뇨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이 수도원을 학문과 영성운동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으며,
부르군디, 로렌느, 노르망디 그리고 북이탈리아 40개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다.
♤오딜로(클뤼니) St.Odilo of Cluny 1049년 원장,베네딕또회
끌뤼니의 수도자인 그는 994년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원래부터 매우 엄격한 규율을 자발적으로 잘 지켜 왔는데,
1006년에 기근이 들자 성당의 주요 재물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 구제사업에 사용할 정도로 실천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재임기간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회원 수효가 급격히 불어나서,
다른 곳의 수도원들은 이곳에서 배출되는 수도자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할 정도였다.
특히 그의 뛰어난 업적은 소위 "하느님의 휴전"이라 불리는
전면 휴전 제도가 프랑스에 도입되게 하였고,
또 성당에 피신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체포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든 장본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또한 강생과 성모 신심이 뛰어났으며,
죽은 교우들을 모두 기억하는 "위령의 날"을 제정하였다.
★지디슬라바 Zdislava 1252년 축일: 01-01 3회원 보헤미아
보헤미아의 리토메리스 출신인 이 성녀는 불과 일곱 살의 나이로
인근의 숲속으로 들어가서 기도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가족들의 손에 이끌리어 돌아오곤 하였으나, 그녀의 고집은 대단해던 모양이다.
이때문에 부모는 일찌기 그녀를 어느 귀족과 결혼시켰고,
따라서 그녀는 네 자녀를 두었으나, 남편은 어린 아내를 항상 잔인하게 다루었다.
그녀는 항상 남편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또 가난한 사람들의 대모로서 자선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타타르족이 침입하여 그들의 머무는 가벨성을 함락시킨 즈음,
남편이 어느 걸인을 침대에 재운 적이 있는데,
이 걸인이 곧 그리스도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이에 크게 감명받은 남편은 그길로 아내를 도미니칸 3회원이 되게 하였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고, 매일같이 성체를 모셨다.
그녀는 도미니칸의 초대 3회원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우골리노 Hugolino 1260년 축일: 01-01 수도자 괄도
그는 성 아우구스띠노 은수자회에 들어갔다는 기록 외에는 별로 알려진게 없다.
그는 짧은 수도생활을 통하여 성덕의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요셉 똠마시 joseph tommasi 1713년 축일: 01-01 추기경 바티칸
시실리아의 알리카타 태생인 그의 부친은 팔레르모의 공작이었고,
람페두사의 왕자 칭호를 가진 분이었다.
요셉의 네 누이들은 부친이 팔마에 세운 베네딕또 수녀원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소년 요셉은 이미 훌륭한 희랍어 학자였다.
또한 교회 음악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기에,
테아틴회 총장은 그의 재능을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
수도생활에 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때 마침, 그의 어머니가 3회원이 되었고, 그의 부친도 비슷한 결정을 함에 따라,
그의 앞길에는 장애물이 걷혔다.
그는 1664년에 팔레르모에서 테아틴회의 수련자로 출발하여 서원한 뒤,
메시나로 가서 희랍어를 공부하고,
그 다음에 로마로 가서 페라라와 모데나 대학을 다녔고,
1673년에는 나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거의 기도와 학문연구에 바친 은수자의 생활이었다.
그는 희랍철학, 성서 그리고 특히 성무일과를 연구하였다.
그의 재능이 너무나 뛰어났기에,
히브리어 교사이던 랍비 모세 다 케이브가 유대교에서 개종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첫 저술은 성 아우구스띠노의 "거울"이며,
1680년에는 고대의 전례를 서술한 "꼬디체스 사크라멘또룸"이 나왔고,
그의 "시편"은 쥬세뻬 까로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1697년,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에게 순종하는 뜻으로 바티칸으로 들어갔고,
1704년에는 바티칸의 신학자로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단순한 생활을 했고, 동료들과 함께 성가를 불렀다.
음식도 늘 초라하였다.
또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에 푹빠진 사람이었다.
미사를 드리는 그를 보고 그에게 특은이 내렸음을 누구나 인정하였고,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는데, 공교롭게도 교황 글레멘스가 12월에 중병에 들자,
그는 "교황은 회복되고 내가 곧 죽을 것"이라 하였다.
그는 1713년 1월 1일에 선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