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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포시인 작품리뷰
국가와 민족, 그 경계와 틈새의 시선
<중국 조선족 시인 특집>에 부쳐
하상일(문학평론가, 동의대 교수)
1. 국가와 민족 그리고 조선족의 현실
해외 한민족문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져 가고 있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 안에서 일국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문학 논의는 이제 편협한 논리가 되기 쉽다. 적어도 우리의 경우 식민지 현실을 넘어 해방과 분단으로 이어진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중국, 일본과의 관계 안에서 동아시아적 시각을 넓혀감으로써 문학사의 대상과 범주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최근 김석범, 김시종을 중심으로 재일조선인문학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반면 재외 한인 문학 연구에 있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던 조선족 문학의 경우는 근래 들어 오히려 관심 밖으로 내몰려 버린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과 중국의 국가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치경제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또한 제로코로나 정책의 강력한 시행으로 장기간 국가 봉쇄를 했던 중국의 사회적 상황으로 사실상 민간 교류가 차단되어 버린 데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민족문학의 범주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중국 조선족 문단의 규모는 다른 해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분을 차지한다. 연변 작가협회에 등록된 작가만 해도 300명이 넘고, 북경, 심양, 하얼빈 등 여러 지역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시, 소설, 수필, 평론, 아동문학 등 전 분야에 걸쳐 위원회가 있어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그동안 출간한 문예지만 하더라도 『연변문학』,『송화강』,『도라지』,『장백산』 등 다양한 매체가 있고, 연변대학을 중심으로 문학 연구의 다양한 성과를 축적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인, 소설가들도 꾸준히 배출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내에서 독자적인 문단을 형성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또한 연변문학상, 김학철문학상, 포석조명희문학상 등의 문학상 제정, 연변 지용제와 같은 문학 축전 등을 개최함으로써, 중국 조선족 문학의 저변 확대와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는 점에서 해외 한민족문학의 모범 사례로 평가할 만하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족문학은 식민지 시기 만주로 이주한 조선 문인들의 문학 활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소위 재만문학(在滿文學)으로 불리는 안수길, 박영준, 김조규 등의 문학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선족 문학의 실질적인 첫 출발은 해방 이후에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만주에 남아 문학 활동을 이어갔던 김창걸, 리욱 등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 정부 수립 이후에는 조선족의 중국화라는 국가적 방침에 따라 중국 내 소수민족 문학으로서의 성격과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족 문학의 기본적 방향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에 놓인 이중성을 본질적 세계관으로 삼아 양자를 통일성 있게 실천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즉 중국 국민이라는 자의식과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의 긴장을 일관되게 유지해온 것이 바로 조선족 문학이었다.
이러한 조선족 문학의 성격은 문화대혁명을 거쳐 개혁개방 시대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적 격변에 따라 상당히 많은 부침을 겪었다. 최근 들어 급격한 인구 감소와 농촌 사회의 붕괴, 조선족 교육의 위기 등에 따른 세대 간의 차이가 깊어지면서 조선족 사회의 변화는 더욱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특히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과 한국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북한 지향의 교육, 사회주의 문화 정책에 익숙했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남한 사회의 매스미디어와 문화콘텐츠에 더욱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조선족 사회를 변화를 주도하면서 그 격차는 더욱 커졌다. 조선족 문학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국가와 민족의 경계에서 중국인이면서 한민족인 조선족의 주체적 전통성을 확립하는 것은 민족적 당위일 뿐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하고 새로운 세대와의 교감의 영역을 넓혀가기 위해서는 국가 이데올로기와 민족 정체성에 중심을 둔 획일적인 창작 방식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족 문학은 자본주의 도시 문명에 대한 동경과 비판이라는 양가적 긴장 속에서, 민족적 집단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정서와 욕망을 투사하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실현이라는 창작방법론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 조선족 문학의 역사적 상황과는 다르게 이번 <조선족시인특집>에 수록된 시와 시인의 면면에서는 민족적 정체성의 실현이라는 조선족 문학의 근본정신과 방향이 아직도 일정 부분 유효성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결과는 작품을 발표한 시인들 대부분이 1980~90년대에 주로 활동한 사실상 조선족 시문학의 원로들이어서, 몇몇 시인을 제외하고는 조선족 시문학의 변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와는 일정하게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정은 재일조선인문학은 물론이거니와 재외 한인 문학 대부분이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로, 젊은 세대를 통한 문학사의 연속성의 확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해외 한민족문학의 역사적 단절을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민족적 정체성에 기반한 새로운 세대의 문학적 지향이 점점 옅어져 가는 현실에서, 조선족 문학의 역사적 계승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정책과 의지만으로 계속해서 추구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장담하기 어렵다. 이번 특집에서도 조선족 시문학의 변화를 통한 새로운 질서 구축이라는 과제가 일정 부분 중요한 시적 주제로 부각 되고 있지만,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중 과제를 내면화한 그동안의 조선족 시문학의 방향과 크게 다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만 국가와 민족의 경계에서 그것을 넘어서려는 틈새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점은 분명해서, 조선족 시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일정 부분 미리 읽어낼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2. 차별과 분단의 경계를 넘어서
중국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독립성을 인정받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선족 인구 비율이 30%이다. 현재 이 기준을 간신히 유지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는 조선족의 현실은 그 자체로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자본의 이동에 따른 도시로의 이주는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이고, 한국으로의 이주자가 자치주에 거주하는 인구를 넘어섰다는 통계가 있듯이 조선족의 현실은 급격한 해체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자치주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한국 사회로 편입되어 버린 현재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조선족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제도적인 차원은 물론 문화적인 차원에서도 공감과 연대의 영역을 확대하는 적극적인 상호 소통의 장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조선족에 대한 대체적인 인식은,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에 바탕을 둔 동질적 연대 의식보다는 반쪽 중국인이라는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부정적인 측면을 더욱 노골화하고 있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조선족 시문학에서도 한국과의 만남은 상당히 중요한 제재와 주제로 부각하고 있지만, 대부분 한국 사회에서의 부정적인 경험과 민족적 정체성의 상실과 단절, 소외 등 어두운 측면을 초점화하고 있어 ‘민족’, ‘공동체’ 등의 말이 공허하게 들릴 따름이다.
민들레홀씨마냥 바다를 날아 넘어 너는/ 꽛꽛한 서울 시멘트 바닥에 내려앉았구나/ 외래종은 근본 아니고/ 꽃에서 풍기는 미소한 향기마저 같은 종이건만/ 대접받지 못하는 꽃이라서/ 나비도 꿀벌도 외면하는 걸까// 아무리 모지름 써도/ 작은 화분통에 기생하며/ 긴 뿌리 내리지 못하는 가냘픈 야생화/ 그래도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으면서/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누나/ 차별과 소외가 무엇인지 알아채기 전
「야생화 – 서울에 사는 내 손자」전문
조선족 사회를 떠나 서울에서 사는 손자를 걱정하는 화자의 마음이 애틋한 정서로 다가오는 시이다. “꽛꽛한 서울 시멘트 바닥”, “대접받지 못하는 꽃”이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데서 알 수 있듯이, “외래종”이 아닌 “같은 종”이지만 “작은 화분통에 기생하며” 사는 “야생화”를 한국 사회의 온전한 일원이 되지 못하는 조선족의 현실에 빗대어 형상화했다.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에 기대어 “민들레홀씨마냥 바다를 날아” 왔지만, 한국에서의 현실은 어느 한 곳에 “긴 뿌리 내리지 못하는 가냘픈” 삶의 연속일 따름이다. “나비도 꿀벌도 외면하는” 꽃의 모습은 자연 안에서조차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는 소외된 생명의 형상에 불과하다. 그 속에서 상처와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을 손자에게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으면서” 지내라고 말하는 화자의 마음속에는 원망도 울분도 안타까움도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한 감정 속에서도 화자는 손자 세대가 앞으로의 인생에서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믿음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확고하다. 어쩌면 국가와 민족이라는 두 가지 지향 모두 한낱 추상적 관념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국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어서 “차별과 소외가 무엇인지 알아채”지 않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핏줄의 믿음은 하늘의 섭리”(김성우,「신천옹」)라는 생각만큼은 끝끝내 저버리고 싶지 않기에, 같은 민족으로부터 가장 뼈아픈 상처를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곡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구나의 할매 이야기가/ 여기 서탑 거리에 전해지기까지의/ 필연의, 그 시간들”(김창영,「현풍 할매곰탕집에서 – 서탑 150」)처럼, 한민족으로서의 오랜 역사적 동질감으로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시간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진전을 위해서는 “아버지 주름 속의 소 한 마리/ 무거운 걸음 멈추지 않”(강매화,「아버지」)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왔듯이, 서울에서 사는 손자와 같은 새로운 세대들도 서로를 향한 왜곡과 편견의 시선을 넘어 민족 정체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연대 속에서 “얼마든지 창공을 날아오를 수 있”는 “자유의 상징”인 “한 마리의 새”(강효삼,「자유」)처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를 소망한다.
이처럼 차별과 소외를 넘어서려는 조선족 시문학의 방향성은 분단 극복과 통일 지향이라는 재외 한인 문학의 보편적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두만강을 건너 온/ 뻐꾸기 한 마리”와 같이 “어느 나라 국적인가 찾아보지만/ 신분증 같은 거 없네”(전병철, 「낮 꿈」)에서처럼, 북한과의 접경지대를 살아가는 동포로서 남과 북 그리고 조선족을 아우르는 한민족 공동체의 실현은 가장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상현달도 달이요/ 하현달도 달이요// 그런데 말이외다/ 상현달을 하현달이라고 하면 당신은 믿겠소?/ 하현달을 상현달이라고 하면 당신은 믿겠소?// 보름달이 웃겠소// 상현달이면 어떻고/ 하현달이면 어떻소/ 달은 달일 뿐이오// 우리는 오천 년을 함께 살다가/ 칠십 년을 헤어져 살았소// 상현이요, 하현이요/ 아웅다웅들 좀 하지 마소/ 함께 둥그러져 보름달이 됩시다// 저 하늘 둥근 보름달처럼!
리춘렬, 「보름달」전문
“상현달”과 “하현달”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서로가 자신의 모습만을 진짜라고 우기는 태도는 “보름달이 웃”을 정도로 별 의미 없는 논쟁이다. “달은 달일 뿐”, 그래서 서로를 바라보는 동질적 인식이 중요한 것이지 “상현달이면 어떻고/ 하현달이면 어떻소”에서처럼 굳이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가 없다. “아웅다웅”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갈등과 대립은 “오천 년을 함께 살다가/ 칠십 년을 헤어져 살았”던 역사적 아픔조차 외면하고 있어서 생산적인 미래를 열어가는 데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 하늘 둥근 보름달처럼” “함께 둥그러져” 살아가면 그만인 것을, 달의 모양이 다름을 두고 달의 존재 자체를 서로 부정하는 억지가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조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분단 조국의 현실에 대한 우회적 비판은 재외 한인 문학의 공통된 주제인 통일의 상상력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재일조선인 김시종 시인이 ‘외발’의 상상력으로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표현했듯이, “낮이면 강 건너 두고 온/ 고향 산천 드러누워/ 맨발 바람 형님 불러오고/ 밤이면 초생달 찰랑 빠져/ 오라비 찾는 누이 눈썹으로 흔들거리”(전병칠, 「행상소리 – 연변민속박물관 백년 바가지에 부쳐」)는 식민과 분단의 역사를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온 조선족의 역사 역시 재일조선인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결국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위치에서부터 진정한 화합과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넘어서는 틈새의 사유를 시적 전략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조선족 시문학에서 유독 ‘새’의 상징성이 두드러진 이유도 바로 이러한 시적 전략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별과 만남, 자유와 그리움이라는 근원적 정서를 바탕으로 남과 북, 중국과 한국을 이어주는 객관적 상관물로 ‘새’의 상징성을 특별히 부각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올가을은 왼통 어수선한 소식뿐”인 쓸쓸한 조선족의 현실이지만, “저녁나절 이맘때면/ 새들도 어김없이 찾아들”어 “창문을 편지처럼 두드리며/ 한 잎 두 잎/ 없는 소식 전하”(김성우, 「둥지」)는 따뜻한 마음에라도 기대고 싶은 것이다.
3. 틈새의 사유와 변화에 대한 성찰
최근 조선족 시문학은 관념화되고 도식화된 이데올로기의 문제보다는 생활 현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사랑이나 꿈을 제재로 삼은 추상적 관념의 세계를 담은 이른바 ‘몽롱시(朦朧詩, ‘난해시’)’로의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가족의 세계 안에서 이별과 그리움의 정서를 특정한 매개물을 통해 내면화하거나 은유와 상징의 기법을 통해 화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 주제 의식을 노출하지 않고, 새, 꽃, 나무, 강, 호수 등과 같은 자연물에 기대어 미학적 현대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이데올로기의 경계 안에서 국가와 민족의 요구에 따른 천편일률적인 사상과 주제를 강조했던 그동안의 문학적 방향에 대한 내적 성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개혁개방의 시대, 정보와 지식의 세계화라는 변화된 시대정신을 담아내기 위해서, 또한 조선족의 역사적 정체성의 강조가 미래 세대를 향한 암묵적 구속이 되지 않기 위해서, 조선족 시문학의 방향도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꽃이나 과일, 돌 등과 같은 정물의 이미지에 대한 정교한 탐색은 조선족 시문학에서 전혀 새로운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힘입어 사회주의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제약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면서부터, 개성적이고 참신한 사물에 대한 정교한 관찰과 입체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모더니즘적 시 의식이 이미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과의 문화적 교류에 따른 직접적인 영향으로 국가 주도의 획일적인 창작 방법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과 언어의 기교를 탐구하는 미학적 자율성을 시 창작의 주요 원리로 삼기도 했다. 자본과 도시 문명의 폐해인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을 풍자적으로 형상화하거나, 세속적인 사랑의 감정을 매개로 한 통속적인 정서를 전면화한 서정시의 양상도 조선족 시문학의 변화를 보여주는 새로운 징후였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은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농촌 사회를 배경으로 한 민중적 서정성을 오랜 전통으로 이어왔던 조선족 시단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성의 확대와 참신한 이미지의 차용 그리고 상징과 은유의 미학적 구조를 전면화한 변화된 시의 흐름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두만강 수석밭에/ 푸른 봄비 걸어오고 있다/ 나는 홀로 자갈밭에 앉는다/ 멀리로는 녹색의 일광산(日光山)이 보이고/ 가까이로는 날따라 여위어가는/ 두만강이 흐른다 …// 내가 수석이 된 지도 이젠 여러 해가 흘렀지만/ 나는 시종 말한다 나의 수마(水磨)는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돌은 고향의 돌, 나는 고향의 이끼/ 그래서 돌도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지고 있고/ 지금 내 주위에 둘러앉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저 창창히 높은 고공(高空)을 꿈꾼다// 하늘이 저렇게 그냥 푸르른 건/ 돌과 나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이/ 항상 저 하늘로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림금산,「수석」전문
“두만강 수석밭”의 “돌”은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돌”의 형상이 화자의 모습을 반영하는 객관적 상관물의 기능을 하고 있다. 화자는 “아직도 진행형”인 “수마”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자연의 순리와 섭리에 기대어 대상과의 완전한 합일을 꿈꾸는, “돌은 고향의 돌, 나는 고향의 이끼”에서처럼 “고향”으로 묶이는 돌과 나의 공동체성을 통해 대상과 주체의 경계와 구분을 없애는 민족적 일체감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족 시에서 자아 성찰의 매개물은 자연과의 대화 안에서 구체화되는 정물이나 풍경일 경우가 많다. “발가우리하게/ 잘 익은 사과를 텁석/ 한입 베어먹고”는 모습을 보고서는 “나도 맘대로 베어먹지 못한 내 삶을/ 누군가 저렇게 텁석텁석 먹어버렸다니”(리홍규, 「누군가 텁석」)라고 하거나, “내 가슴에 닿지 못하는/ 그런 꽃은 숨결이 아니고/ 내 속사정을 외면한/ 그런 나무는 그냥 나무일 뿐이다”(최화길, 「아침은 내게로 와서 다시 아침이다」)라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하고 있다. 무거운 이념이나 현실의 상처를 굳이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활 한 가운데에서 마주하는 평범한 사물이나 자연의 내부를 깊이 응시함으로써, 조선족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에 대한 냉정한 혹은 따뜻한 자기성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변화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구속을 벗어나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틈새의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 의식을 담아내는 가장 유효한 시적 전략이 되기에도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조선족 시문학에서 서정서사시, 장편서사시로 명명되는 장시(長詩) 창작이 활성화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하는데, 대체로 민족 정체성을 상징화한 신화나 토템, 민속에 기대어 한민족의 원형성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형상화되었다. 즉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사회주의적 현실을 고무하는 선동성에 입각한 서사시의 구현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을 대변하는 원형에 대한 탐색을 통해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아내는 데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서사시의 주제를 구현하는 방식에서 역사의 현재화라는 반영론적 리얼리즘의 세계보다는 시적 대상의 상징성과 이미지의 정교함으로 구조화된 모더니즘적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이번 특집에서 유일한 장시인 「馬蟻일기 – 어떤 바람의 터널에서」를 통해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데, 마치 곰 토템의 동굴의 상상력으로부터 체득한 민족의 원형적 동질성을 현재적으로 재현한 듯한 유사한 이미지를 경험하게 한다.
1/ 다행이다. 천지를 요동치는 굉음소리가 서서히 사라졌다. 실오라기같은 빛가닥이 어귀에서 망설이다 드디어 칠륵같은 동혈(洞穴)을 더듬으며 기어들려고 시도를 한다. 엇갈린 갱도속엔 짙은 어둠과 굳어버린 밤들이 중첩되어 우리는 시커멓게 찌들은 토템을 껴안고 한 가닥 또 한 가닥의 빛줄기가 반복적으로 끼어들다 죽어가는 따분함에 지쳐 잠이 들었다 또 깨어나곤 한다. (중략)
3/ 그 빛은 끊임없이 알른거린다. 알 수 없는 새들의 지저귐까지 들린다. 밖은 무척 청명한 날씨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깊은 동굴의 시궁창을 벗어나 가물거리는 그 광원의 따뜻함을 맞아 더 넓은 광야로 향해 올라 나설 때가 아닐까 싶다. 전도양양한 앞길은 결코 평탄하지는 않을 거다. 티끌을 제외하고 미소한 모래알마저 우리로서는 늘 힘겹게 지고 넘어야 할 육중한 거암(巨巖)들이라 생각한다. (중략)
6/ 인간에 비해 우리는 턱없이 미약하고 보잘것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람들 속에 자비로운 자가 이 땅에 강림하여 “개미의 시각”으로 천지만물을 가늠할 것이며 그들이 함부로 흘린 한 방울의 눈물마저도 개미 한쌍의 사랑을 흩뜨릴 수 있다, 라는 사실을 차차 깨달을 것이다.
박만해, 「馬蟻일기 – 어떤 바람의 터널에서」
“칠흑 같은 동혈”의 어둠으로부터 “또 한 가닥의 빛줄기”를 찾아 깨어나는 순간은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예고하는 듯하다. “새들의 지저귐까지 들리”고 “밖은 무척 청명한 날씨”이기도 해서, “깊은 동굴의 시궁창을 벗어나 가물거리는 그 광원의 따뜻함을 맞아 더 넓은 광야로 향해 올라 나설 때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빛과 빛 사이에 가려져 있는 어둠의 무게”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지만, 그리고 “모든 빛줄기 속에 또 하나의 어둠의 터널이 숨겨져 공생,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민들레홀씨들이 휙- 휙- 소리를 내며 황막한 벌판을 쓸고 지나”가는 자연의 질서 자체를 거역할 수는 없다. “자연은 황폐화”되었고 인간 세상은 “동족상잔으로 저들만의 제권(帝闕)을 구축”하여 여전히 혼란의 연속이지만, “개미의 시각으로 천지만물을 가늠할” 줄 아는 세상의 변화 앞에서 그 어떤 권력도 허망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화자는 “내 발밑에 당당하게 피어 있는 오색찬란한 꽃들”과 “나의 손톱보다 천만 배나 더 작고 정교한 생명체들이 보”이는 세상, 그래서 “깊은 땅속의 모든 뿌리와 씨앗의 대화소리도 들”리는 생명의 경이로움에 “귀의(歸依)”하는 근원적 생명 의식을 견지하고자 한다. 생명의 본질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들의 존재가 어디에서 다시 시작될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가 전하는 궁극적인 주제이다.
이처럼 이 시는 다양한 이미지의 변주와 사물 간의 소통을 매개로 아주 본질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생명 의식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생태시가 지향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인간의 근원에 대한 탐문과 자연의 질서에 대한 통찰을 통해 새로운 기원을 희구한다는 점에서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세계의 알레고리를 보여주는 듯도 하다. 다양한 이미지의 세계가 때로는 조화를 이루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직조해내는 시의 구조는 형식적으로든 주제적으로든 모더니즘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이러한 시적 전략이 지금 조선족 시문학의 본령에서 조금은 벗어난 예외적 작품일지도 모르겠지만, 해방 전후 오장환의 시가 보여주었던 사물과 대상의 공간화를 통해 병든 세계의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담아냈던 장시의 모더니즘적 전통을 다시 발견한 듯도 해서 특별히 주목된다. 서사시의 현재화라는 창작 방식 역시 조선족의 현실이 암묵적으로 강요해온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넘어서는 틈새의 시선이라고 본다면, 시대의 변화에 대한 성찰과 민족적 원형에 대한 탐구라는 조금은 다른 시적 지향에서 조선족 시문학의 양가적 긴장의 세계를 발견할 수도 있어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4. 근원에 대한 탐색과 서정시의 본질
서정시의 본질이 근원에 대한 탐색에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으려는 조선족 시문학의 변화에 대한 성찰은 상당히 본질주의적이다. 대상과의 관계 안에서 주체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자기 성찰적 태도를 통해 조선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려는 시적 의지를 내면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조선족 사회의 모습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두 개의 가면을 갖고 살아가면서 필요에 따라 하나를 선택해 자신을 표면화하는 이중적 태도를 드러낸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이중성은 조선족의 삶과 역사를 지탱하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쉽게 떨쳐내기 어려운 가장 기본적인 조건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족의 가면은 “구겨진 주름 사이로/ 너덜너덜해진 얼굴”을 애써 가려주는 것일 뿐, “화사한 웃음 뒤/ 얼룩진 세월”의 상처와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장한 척 뚝심으로/ 버티던/ 자존심”을 버리는, 즉 오랜 세월 조선족의 정체성이라고 내세운 가면으로서의 “탈”을 벗어던져야만 비로소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본질적인 자아를 만날 수 있다. “벗고 보니/ 나는 없고/ 나는 있다”(강매화, 「탈」)라는 역설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의 정서를 담아낸 뒤를 돌아보는 상상력은, 가면 뒤에서 숨어 살았던 본질적 자아와 정직하게 마주하기 위한 근원에 대한 탐색으로 읽힌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이제는 고향 땅을 떠나 이별한 대상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그래서 마치 “낡은 시계는 시간을 풀고/ 나는 기억을 풀”(리춘렬, 「낡은 도서관」)듯이 조선족이 걸어온 신산한 삶의 길과 운명을 되짚는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는 역사적 현재로서의 서정시의 시간 의식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흙 속에서 나왔기에/ 흙냄새가 나서 좋다 그보다/ 죽은 사람과 살다가 나와서/ 반가운 풀이다/ 아버지 명복하고 계시겠지// 봄이면 아버지의 심부름 오는 풀/ 가을이면 나의 심부름 가는 풀/ 지금 이 시각도/ 아버지와 아들 번갈아 보고 있으리// 내가 잡고/ 사바세계를 건너가는 푸른 끈이/ 이승 저승 윤회하며/ 폭풍에도 끊어지지 않는 푸른 끈이/ 푸른 핏줄로 뻗어 들어와서/ 땅 기운이 도는 온몸을/ 살이 돋는 땅에 엎드려 등으로 본다/ 겨울을 지나며 허기져 목이 긴 새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는 하늘의 눈빛!// 슬픔을 유산으로 남기시고/ 세상을 감아버린 아버지에게/ 전해다오 풀에 얼굴 대고 속삭인다// 있음이고 없음이며 또한/ 그것을 넘어서 있는 아버지의 죽음은 비싸다/ 목구멍을 울리며 우는 비둘기/ 내 안에 날아 들어와 앉아있다
박장길, 「풀」전문
들판에 흐드러지게 자란 “풀”을 “흙 속에서” “죽은 사람과 살다가” 나온 존재로 인식하는 데서 화자의 근원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풀”의 상상력으로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진 가족의 역사 나아가 조선족의 역사적 전승을 상징적으로 표상한 것이다. 여기에서 “풀”은 조선족의 삶을 대변하는 여러 가지 표상 가운데 하나일 뿐, “기다려도 피지 않는 국화꽃”(윤청남, 「산딸기」)의 형상이어도 다를 바 없다. “사바세계를 건너가는 푸른 끈이/ 이승 저승 윤회하며/ 폭풍에도 끊어지지 않는 푸른 끈이/ 푸른 핏줄로 뻗”은 “풀”의 상징은, “슬픔을 유산으로 남기시고/ 세상을 감아버린 아버지”와 아들을 이어주는 소통의 매개이다.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남은 “아들”의 몫이지만, “목구멍을 울리며 우는 비둘기”처럼 “ 내 안에 날아 들어와 앉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조선족의 역사는 세대를 넘어 면면히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땅 기운이 도는 온몸을/ 살이 돋는 땅에 엎드려 등으로 본” “풀”은, “겨울을 지나며 허기져 목이 긴 새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는 하늘의 눈빛!”으로 표상된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이 결국 아들의 시대를 살아가는 길임을 생명의 근원을 표상하는 “풀”의 형상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족 시문학은 자연에 기대어 그것과의 조화를 꿈꾸는 생명 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족의 역사적 현실과 민족적 정체성을 상징화하는 서정적 지향을 드러낸다. 다만 이러한 상징성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의 차용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아서, 사상성의 결여에서 비롯된 표피적 인식을 넘어서지 못한 한계도 뚜렷하다. 반대의 경우로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 적정한 거리 조정의 실패가 정서의 과잉으로 흐른 경우도 더러 보인다. 격정의 세월을 뒤돌아보는 시선에서 감정을 절제하고 대상과 거리를 객관화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란 감정의 과잉이 아닌 도피라는 점에서, 일상적 현실로서의 조선족의 현재와 이상적 현실로서의 조선족의 미래 사이의 모순과 괴리를 탐색하는 회한의 정서는 시적 긴장을 벗어나면 절망적 탄식이 될 수밖에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시를 두고 조선족이라는 미리 전제된 범주 안에서만 해석하려는 관점 자체가 잘못된 비평적 시각일지도 모르겠다. “8월의 호숫가를 거닐면/ 한 마리 금빛 잉어가 되고 싶어요”(김영춘, 「8월의 호숫가를 거닐면」)라는 소망을, 자연에 대한 사랑과 동경이라는 그 자체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조선족 시문학의 변화를 선입견 없이 이해하는 태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90년대 이후부터 조선족 시문학은 국가 주도의 획일적인 주제 의식이나 창작 방식에서 벗어나 시 자체의 미학적 자율성과 모더니티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역사주의적 근거 안에서만 조선족 시문학을 바라보는 것은 자칫 ‘의도의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따라서 조선족 사회의 변화와 조선족 시문학의 변화를 무조건 동일선상에 놓고 이해하는 접근 방식도 이제는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특집에서 세대의 차이에 따라 각각의 시의 편차가 상당히 크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 조선족 시문학은 “낙타의 방울소리/ 천고의 사막을 울”려 “마침내/ 한 알의 모래”(봉창욱, 「한 알의 모래」)가 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색을 하고 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tension)이 시의 운명이라고 한다면, 지금 조선족 시문학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길목에서 새로운 지도를 찾고 있다. 여전히 “종속된 자유”(강효삼, 「자유」) 안에 머무르는 한계는 분명 있지만, “눈에 익숙지 않은 새로운 질서”(최화길, 「아침은 내게로 와서 다시 아침이다」)를 기대하는 변화의 바람도 의외로 거세다. 다만 이러한 변화를 선도해야 할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가 조선족 시문학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에서, 경계를 넘어서는 틈새의 시선과 변화에 대한 성찰이 아직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새로운 시의 출현은 당위적 선언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은 당연하다. 세대 간의 대화적 소통 안에서 생성되는 시적 긴장이 다양한 양상으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결국 공허한 울림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조선족 시문학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시급한 문제는 조선족으로서 세대적 연속성을 확보하는 서정시의 운명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데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조선족 문학만의 과제라기보다는 재외 한인 문학 전체가 당면한 공통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의 존재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될 것인가”(박만해, 「馬蟻일기 – 어떤 바람의 터널에서」)라는 근본적 질문은, 한국문학이 함께 답을 찾아야 할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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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일
문학평론가, 동의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오늘의문예비평》편집인 및 편집주간, 《신생》편집위원. 저서 『1960년대 현실주의 문학비평과 매체의 비평전략』, 『한국문학과 역사의 그늘』, 『재일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역사적 이해』, 『한국 근대문학과 동아시아적 시각』외. 평론집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 『서정의 미래와 비평의 윤리』, 『뒤를 돌아보는 시선』외. 고석규비평문학상, 심훈학술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