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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관 시인
한국 한비문학 작가협회 상임이사
숭실대 명예교수
월터 휘트먼의 "폭풍 그 당당한 음악"
-들려오는 소리들과 음악과 시-
1. 작가 소개
예일대학 해롤드 브룸 교수는 미국의 5대 시인으로 월터 휘트먼, 에밀리 디킨슨, 월러스 스티븐스, 하트 크래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꼽는다. 휘트먼(Walter Whitman, 1819-1892)은 뉴욕 근처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나 뉴욕시 공립학교에 다녔다. 학교 교육은 6년뿐, 집안일을 도우면서 독학을 하여 대성했으니 대단한 일이다. 부친은 목수였고 자유주의적 지적 성향이 강한 퀘이커 신도였다. 휘트먼은 소년시절에 호머, 단테, 섹스피어를 읽고 성서를 통독했으며, 당시 진보적 사회주의자인 프란시스 라이트, 로버트 오웬, 자유주의 퀘이커파 엘리아스 힉스, 자연 신교 신봉자 카운트 볼니 등의 저술을 열심히 읽었는데 부친이 월터에게 이런 글을 읽으라고 권했다고 한다.
당시 뉴욕에는 잭슨 대통령, 라파에트 등 많은 애국지사와 혁명가들이 거쳐 갔다. 이들을 멀리서 만나본 어린 휘트먼은 그 생생한 감동을 깊이 간직했으며 자기도 자유민주주의 옹호자가 되었고 애국심이 넘치는 시들을 썼다. 11세에 법률사무소 사동으로 취업했고 12세부터 인쇄소에서 신문제작 일을 배웠는데 어느 듯 편집장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19세에 주간지 롱아일랜더를 인수했고 20세에 롱아일랜드 데모크랫 편집장, 23세에 뉴욕오로라 편집장, 27세에 브루클린 데일리이글 편집장으로 활략했다. 학교 교사로 5년간 봉직한 경력도 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등 진보적 성향이 강했으므로 신문사 측과 의견이 맞지 않아 직장을 사퇴한 적도 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전선의 병사 위문, 부상자 치료, 동생들을 돌보는 일 등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고생을 많이 했고 정부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휘트먼은 <풀잎 Leaves of Grass>이란 동일한 제목의 시집을 일곱 번이나 개정하여 출판했다. 매우 희귀한 일이다. 1855년 초판(95쪽), 1856년 2판, 1860년 3판(456쪽), 1867년 4판, 1872년 5판, 1882년 6판(총 293편), 1891년 7판, 그리고 다음해인 1892년에 별세했다. 개정판을 만들 때마다 시 제목을 새로 붙이거나 새로운 시를 추가하는 등 완전한 하나의 시집을 만들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현재 미국회도서관은 이를 희귀본으로 특별 관리하고 있다. <풀잎> 초판은 자비로 출판했고 별로 팔리지 않았으나 그 초판의 현재 가격은 권당 대략 1천만 원이다.
그의 시는 마치 인체의 각 부분을 그래프로 보여주듯 체계적이어서 빅토리아풍에 익숙했던 미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으나 프랑스에서 먼저 돌풍이 불었다. 그의 강렬한 휴머니즘은 프랑스의 자연주의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휘트먼은 왕성한 창작활동을 재개하였다. 1865년에는 전쟁 시들을 모아 시집 <드럼 탭스 Drum-Taps>를 출간했다. 휘트먼이 세계적 명사가 되자 미국의 출판사가 뒤늦게 <풀잎>을 출판하겠다고 나섰다. 미국인들은 그의 시뿐만 아니라 턱수염까지 좋아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신비적 존재로 추앙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1871년 뉴욕산업박람회 기념시집 <박람회 노래>를 출간하고 주최 측의 특별초청을 받았으며, 이어서 수에즈 운하, 대륙철도, 대서양 전화선의 개통을 축하하는 시집 <인도로 가는 길>을 출간했다. 그밖에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 <11월의 나뭇가지 November Boughs>, <폭풍 그 당당한 음악 Proud Music of the Storm> 등 많은 시집과 장시 長詩가 있으나 대부분 시집 <풀잎>에 포함되어 있다.
2. 작품 번역 소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시, <폭풍 그 당당한 음악> 1편만 소개한다. 이 시는 시집 <풀잎 Leaves of Grass>에 실려 있는 연작시로 1번부터 6번까지 번호가 붙여져 있다. 총 26연 163행의 장시에 속한다. 그 중 3번부터 6번까지 총 102행을 대상으로 하되 중간의 40행은 제외하고 62행만 여기서 번역 소개한다. 생략한 40행은 각종 '소리'들을 열거한 것이므로 생략하고 읽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폭풍 그 당당한 음악
아기 때부터 난 배워 알았지 소리가 어떻게 음악이 될 수 있는지
어머니의 자장가와 찬송 소리 (기억 속의 부드러운 사랑스런 음성,
계속되는 큰 기적, 오, 나의 어머니와 누이의 음성)
비 오는 소리,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 긴 잎 사이로 스치는 미풍
해변을 때리는 파도 소리, 새들의 지저귐과 날카로운 매의 소리,
남북으로 낮게 나르는 밤새들의 부산한 소리,
시골 교회와 숲 속의 찬송가, 캠프장 노래, 선술집 깽깽이와 합창,
늘어진 뱃사람들의 노래, 부스럭거리는 가축들, 새벽 암탉 소리.
세상의 모든 노래들이 나를 싸고 맴돈다.
우정과 술과 사랑의 독일 민요, 아일랜드 발라드 흥겨운 지그 춤,
잉글랜드의 새소리 내는 음악, 프랑스 샹송, 스코틀랜드의 멜로디,
이탈리아의 뛰어난 작품들:
노마는1) 창백한 얼굴 이글거리는 정열로 비수를 휘두르며 무대를
가로질러 다가간다. 불쌍하게도 미쳐버린 루치아의 번쩍이는 눈빛
산발한 머리카락이 등 뒤로 출렁인다.
에너니는2) 환한 신부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 정원을 거닐고 있다
밤 장미의 향기가 넘친다 지옥의 부름 진혼곡을 울리는 호른 소리
교차 칼 속으로 흰머리 날리며 다가가니 전자 베이스와 바리톤
낭랑한 소리, 트롬본 이중주가 들린다. 자유여 영원하여라!
스페니쉬 밤나무 짙은 그늘로부터 옛 언약의 무거운 성벽을 타고
통곡의 노래, 잃어버린 사랑의 노래가 들려온다.
절망으로 사그라지는 젊음과 삶의 횃불, 죽어가는 백조의 노래,
페르난도의 가슴은 찢어진다. 이윽고 불행을 박차며 재기한
아미나가 노래한다. 분출하는 환희는 하늘의 별처럼 풍성하고
아침 햇살 경쾌하다. 온갖 송시 頌詩, 심포니, 오페라가 들린다.
윌리엄 텔의 분기한 군중들의 합창, 마이어베르의
위그노, 예언자, 로버트,3) 구노의 파우스트, 모차르트의 돈 환
온갖 나라들의 댄스 뮤직이 들려온다.
(이하 본문 40행 중략)
모든 소리를 붙잡게 해다오 난 미친 듯 울부짖는다.
우주의 모든 소리들로 나를 채워라
그들의 치렁치렁한 겉옷을 내게도 허락하소서.
자연 또한 폭풍우든 물소리든 바람소리든
오페라든 찬송가든 행진곡이든 무도곡이든
내뿜어라 퍼부어라 다 들으리라
부스스 잠에서 깨리라 잠시 머뭇거리고
꿈속의 음악을 생각하고 모든 추억들을 떠올리고
분노의 질풍, 소프라노와 테너,
종교적 열정에 불타는 동양의 춤들
간드러진 소리를 내는 악기들, 오르간의 선율
사랑과 비통함과 죽음의 꾸밈없는 탄식소리
조용하고 묘한 내 영혼이여 선잠 자는 침대 밖으로 나오라
오라, 내가 그리도 오래 찾았던 실마리를 발견했노라
힘차게 나아가자 우리의 나날들을 즐겁게 세면서
세계를 걸으며 천국의 꿈처럼 진정 풍성하게 달려나가자.
오, 영혼 당신이 우연히 들은 소리들은
바람의 소리도 격노한 폭풍의 꿈도 아니고
바다 매의 날갯짓이나 거친 절규도 아니고
이태리 민요도 독일의 오르간 명곡도,
성악 모음집도 부부합창단의 스트로피도
병사들의 행진 소리, 플루트, 하프, 나팔소리도 아니고
그것은 당신에게 꼭 맞는 새 리듬의 시 詩,
생명에서 죽음까지 가는 길을 잇는 다리,
아련히 밤 공기에 떠다녀
쉽사리 잡을 수도 쓸 수도 없지만
과감히 뛰어나가자 우리 한번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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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91년 판, <Leaves of Grass>에 실린 "Proud Music of The Storm" 중의 #3~#6.
Ah from a little child,/Thou knowest soul how to me all sounds became music,/My mother's voice in lullaby or hymn,/(The voice, O tender voices, memory's loving voices, Last miracle of all, O dearest mother's, sister's, voices;)/The rain, the growing corn, the breeze among the long-leav'd corn,/The measur'd sea-surf beating on the sand,/The twittering bird, the hawk's sharp scream,/The wild-fowl's notes at night as flying low migrating north or south,/The psalm in the country church or mid the clustering trees, the open air camp-meeting,/The fiddler in the tavern, the glee, the long-strung sailor-song,/The lowing cattle, bleating sheep, the crowing cock at dawn.
All songs of current lands come sounding round me,/The German airs of friendship, wine and love,/Irish ballads, merry jigs and dances, English warbles,/Chansons of France, Scotch tunes, and o'er the rest,/Italia's peerless compositions.
Across the stage with pallor on her face, yet lurid passion,/Stalks Norma brandishing the dagger in her hand./I see poor crazed Lucia's eyes' unnatural gleam,/Her hair down her back falls loose and dishevel'd./I see where Ernani walking the bridal garden,/Amid the scent of night-roses, radiant, holding his bride by the hand,/Hears the infernal call, the death-pledge of the horn./To crossing swords and gray hairs bared to heaven,/The clear electric base and baritone of the world,/The trombone duo, Libertad forever!
From Spanish chestnut trees' dense shade,/By old and heavy convent walls a wailing song,/Song of lost love, the torch of youth and life quench'd in despair,/Song of the dying swan, Fernando's heart is breaking./Awaking from her woes at last retriev'd Amina sings,/Copious as stars and glad as morning light the torrents of her joy.
I hear those odes, symphonies, operas,/I hear in the William Tell the music of an arous’d and angry people,/I hear Meyerbeer’s Huguenots, the Prophet, or Robert,/Gounod’s Faust, or Mozart’s Don Juan./I hear the dance-music of all nations, (이하 40행 중략)
Give me to hold all sounds(I madly struggling cry,)/Fill me with all the voices of the universe,/Endow me with their thobbings, Nature’s also,/The tempests, waters, winds, operas and chants, marches and dances,/Utter, pour in, for I would take them all!
Then I woke softly,/And pausing, questioning awhile the music of my dream,/And questioning all those reminiscences, the tempest in its fury,/And all the songs of sopranos and tenors,/And those rapt oriental dances of religious fervor,/And the sweet varied instruments, and the diapason of organs,/And all the artless plaints of love and grief and death,/I said to my silent curious soul out of the bed of the slumber-chamber,/Come, for I have found the clew I sought so long,/Let us go forth refresh’d amid the day,/Cheerfully tallying life, walking the world, the real,/Nourish’d henceforth by our celestial dream.
And I said, moreover,/Haply what thou hast heard O soul was not the sound of winds,/Nor dream of raging storm, nor sea-hawk’s flapping wings nor harsh scream,/Nor vocalism of sun-bright Italy,/Nor German organ majestic, nor vast concourse of voices, nor layers of harmonies,/Nor strophes of husbands and wives, nor sound of marching soldiers,/Nor flutes, nor harps, nor the bugle-calls of camps,/But to a new rhythmus fitted for thee,/Poems bridging the way from Life to Death, vaguely wafted in night air, uncaught, unwritten,/Which let us go forth in the bold day and write.
3. 작품 감상
영문 62행을 번역하여 국문 55행으로 조정했다. 제목의 '폭풍 storm'은 말 그대로 자연의 폭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리들의 폭풍을 뜻한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온갖 소리들을 시인은 체계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소리의 종류를 이렇게 박식하게 많이 열거한 시인은 아마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가까운 곳의 친숙한 소리부터 점차로 멀리 드물게 들리는 소리까지, 중간 곳곳에 상상의 소리들을 삽입하면서 열거한다. 어머니의 음성, 옥수수 밭, 가축들, 교회, 숲, 선술집, 해변, 새 소리, 그 다음은 독일,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이태리, 각국의 대표적인 소리들, 그리고 오페라의 장면까지 둘러본 다음 동양과 아랍권으로 향한다. 소리들은 많지만 폭풍처럼 그냥 때리고 지나간다. 시인은 소리가 너무 적거나 많아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제대로 붙잡을 수 없어서 안타까워한다.
소리를 붙잡고 싶다는 절규가 이 시의 첫 번째 포인트다. 돕(thob)을 입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돕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전통의상인데 소매가 길고 품이 풍성한 겉옷을 말한다. 그런 옷을 입으면 소리를 붙잡기 좋고 하늘과 통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시의 두 번째 포인트는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문법으로 보면 잠에서 깨는 것은 1인칭 '나',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아니다. 마지막 연에 '영혼'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소리를 붙잡은 영혼이 잠에서 부스스 깨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영혼과는 다르다.
휘트먼은 이를 다른 말로, "모든 음악은, 당신이 인스트루먼트(instrument, 도구)를 통해 어떤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당신으로 인하여 잠에서 깨어난다."고 말한다. 잠깨는 것은 음악 자체 또는 악상 樂想이라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명언이다.
악기, 바람, 파도, 그런 것들은 뭔가를 생각나게 하는 인스트루먼트(도구) 역할만 한다. 그런 도구들 때문에 내 속에서 잠자던 영혼(또는 음악가의 경우는 악상, 시인의 경우는 시상)이 잠을 깬다. 어린 시절부터 들려온 소리들, 내면에 잠자고 있던 소리들,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때 참다운 음악이 된다. 그럴 때 그냥 따라가면 훌륭한 음악 감상이 될 수 있다. 그럴 때 그냥 받아 적으면 훌륭한 작곡을 할 수 있다.4)
시도 그렇다. 시인이 잠을 깨어 의식적으로 억지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보름달이든 낙엽이든, 등대, 새, 꽃, 무엇이든 폭풍처럼 우선 시인의 곁을 지나가야 한다. 시인은 소매가 긴 풍성한 돕을 걸치고 있다가 그 중 하나를 붙잡는다. 안에서 잠자고 있던 시상 詩想이 잠을 깬다. 시상이 부스스 눈을 부비며 시인에게 말을 걸어주면 시인은 받아 적는다. 그렇게 쓴 시는 시인 각자에게 꼭 맞는 아주 참신한 시가 될 것이다.
<폭풍 그 당당한 음악>이란 시를 통해 휘트먼의 시 세계를 추적하다 보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시는 생산성 문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노력이 부족해서 좋은 시를 많이 쓰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시상이여 잠 좀 그만 자라, 나 혼자 그동안 너무 잠이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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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노마는 베르디 오페라의 주인공, 소프라노
2) 에너니는 베르디 오페라의 주인공, 테너
3) 위그노, 예언자, 로버트는 마이어베르가 작곡한 오페라들
4) 국내에서 상영 중인 영화 <어거스트 러쉬 August Rush, 2007>의 주인공 소년 어거스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각종 '소리'들을 듣는다. 소리를 옮기면 천재적인 연주가 되고 작곡이 된다. 소년은 잃어버린 부모가 자기 연주를
듣는다고 믿는다. 이 영화 작품의 모티브는 휘트먼의 <폭풍 그 당당한 음악>의 시제를 많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