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인 노예의 역사, 재즈 출현의 역사적 배경 ▒▒▒
어떤 이는 20세기 미국 문화가 세계에 공헌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재즈
음악 하나일 것이라고 공언한다.아마도 이때의 미국 문화란 온전하게 미국적인
토양의 것이란 뜻에서 하는 말일 게다.
미국에 흑인노예가 최초로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개조(開祖)인 [필그림
파더스]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출발할 무렵(1619년), 사우스 버지니아
에 흑인노예를 수입하면서부터였다.
[필그림 파더스]가 실제 플리머스에 도착한 것은 1620년의 일이었으니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미국의 주류를 이루게될 앵글로 색슨보다 흑인 노예가 먼저
도착한 셈이다. 누가 먼저 도착했든 한쪽은 이후 신대륙의 주인으로 다른
한쪽은 그들을 위한 노예로 규정되어 있었다.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이 어떤 노래와 음악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자료
는 거의 없다.다만 흑인들의 미국 이주 역사 반세기가 흐른 뒤인 1676년 버지
니아의 흑인노예들이 드럼을 치면서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는 찬송가를 불렀다
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기독교화된 흑인 노예들이 아프리카의 비트를 담아 드럼(드럼은 아프리카의
종교 제례에서 중요한 악기이다)을 치며 그들의 애환을 달랬으리란 추측은
가능하다.
이때 흑인들은 대개 노예노동에 종사하면서 서로에게 안부를 묻거나 고통을
잊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초기의 흑인 음악은 몇 가지 점에서 아프리카적인 음악의 특성을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샤우트(shout)와 할러(holler)였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외치
다][절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흑인 노예들의 이런 음악 형식들은 블루스
와 재즈, 소울등 여러 흑인 음악의 창법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근대 이후
만들어진 아메리카 대륙의 전통 음악 대부분이 그러하듯 미국의 흑인 음악
또한 이렇듯 노동요(work song)로 출발했다.
흑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남북전쟁(1861년)과 노예해방선언(1865년)이 있기
전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남북전쟁의 종료 이후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은
법적으로는 자유인의 신분을 얻었다. 해방된 흑인들에게 있어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활이 되었다.
노예는 비록 배불리 먹지는 못할지라도 생계 자체는 노예주가 책임지는 형
태였으나 이제 각자 먹을 것을 찾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나서야만 했다.
남부에만 400만의 흑인 노예들이 있었는데, 과거의 노예주들은 이제 다른
형태로 흑인들을 고용해야만 했다.
남북전쟁의 결과로 확산된 북부의 자본주의는 흑인노예들을 [전일제 노예]
에서 [파트타임 노예]로 전환시켰다. 이때 미국남부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
리언스에서는 프랑스나 스페인 백인과 흑인의 혼혈로 출생한 흑인 혼혈을
크레올(Creole)이라 불렀는데,이들은 18세기 중엽부터 백인과 거의 동등한
신분을 얻고 있었다.
당시 크레올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과 생활을 누리는 특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노예해방은 이들에게도 다른 순수(?) 흑인들과 법적으로
똑같은 지위와 처우를 강제하게 된다. 크리올들 입장에서는 노예해방이
도리어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뉴올리언스에는 두 개의 흑인 집단이 서로 경쟁하며 새로운 음악적 도전을
유발시켰다. 하나는 프랑스와 스페인 혼혈인 크레올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메리칸 니그로라 불리는 노예 출신의 흑인들이었다.
크레올은 세련되고 교양 있는 편이었으며 악보를 읽을 줄 알았고,아메리칸
니그로들은 악보를 읽을 줄은 몰랐지만 구전으로 전해지는 자생적 음악은
활기를 띄고 있었다. 크레올들은 뉴올리언스의 사회적 빈곤층을 이루고
있는 아메리칸 니그로들을 내심 경멸하기도 했다.
▒ 재즈의 탄생과 뉴올리언스 ▒
재즈의 탄생과 뉴올리언스의 역사는 따로 떼어놓고 상상할 수 없다.그렇다
고 해서 재즈가 전적으로 뉴올리언스만의것은 아니었다.뉴올리언스 스타일
이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래그타임(Ragtime)이 있었고, 래그타임의 중심지
는 뉴올리언스가 아니라 미주리주의 세달리아였다.
래그타임은 대개 작곡된 곡이며 피아노 음악이었기 때문에 재즈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임프로비제이션(improvisation, 즉흥연주)은 빠져
있었지만 스윙(swing)은 한다는 점에서 재즈의 일부로 간주된다. 래그타임
은‘흑인풍으로 연주되는 백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뉴올리언스
가 재즈의 발상지는 아닐지라도 뉴올리언스는 재즈의가장 중요한 측면들이
결정된 곳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처음 뉴올리언스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스페인인들이었으나 17세기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다시 18세기인 1764년엔 스페인령이 되었다.
그 후 1795년 스페인은 미국에 뉴올리언스 항구를 개방했고, 1803년 공식
적으로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렇기에 뉴올리언스에는 현재까지도 스페인과 프랑스의 문화적 흔적들이
뒤섞여 있다. 당시 뉴올리언스에는 래그 타임, 유럽의 각종 댄스 음악,
프랑스 민요, 아일랜드 민요 등 많은 나라의 문화와 음악이 혼재되어
있었다.
뉴올리언스는 미국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프랑스와 스페인의 문화가 혼재
되어 서로 교류했다. 거리에는 특히 브라스 밴드가 유행하여 행사가 있을
때마다 브라스 밴드가 시가를 행진했다. 흑인들 역시 브라스 밴드를 대단
히 좋아하여, 백인의 연주를 듣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브라스 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1900년대 뉴올리언스의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했지만 당시에 이미 30여개
에 달하는 오케스트라가 존재했다.
뉴올리언스에서는 지금도 장례식에 소규모밴드가 슬프고 장중한 템포의
흑인영가를 연주하며 공동묘지까지 행진하는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장례식
을 마치는 순간 밴드의 북소리는 지금까지의 느리고 슬픈 분위기와 작별하
고 신나는 연주를 시작한다.
그때 울려 퍼지는 곡이 바로 [성자의 행진(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이다 죽은 자를 묻은 뒤 산 자들은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발을 맞추며
춤을 춘다.
1900년 7월 4일(루이 암스트롱 자신이 주장한 자신의 출생일이지만, 후에
발견된 출생 신고서에는 1901년 8월 4일생으로 기록). 미국의 독립기념일
인 이날,뉴올리언스의 제임스 옆 골목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공장 노동자였
던 아버지와 하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훗날 사치모(Satchmo)라는 별명으
로도 불리게 될 흑인 아기가 태어났다. 그는 훗날 재즈와 트럼펫의 제왕이
될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재즈는 뉴올리언스의 흑인 브라스 밴드에서 탄생했지만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뉴올리언스 서남쪽 미시시피 강에 인접한 캐널 스트리트, 일명
[스토리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이곳은 훗날 존 바에즈와 애니멀스가 노래했던 [해뜨는 집(The House of
the Rising Sun)]의 실제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토리빌은 뉴올리언스의 공인된 창녀촌이었다. 대신 이곳에서는 편견과
계급의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뉴올리언스의 모든 요소들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스토리빌에서는 크레올 출신
피아니스트 제리 롤 모튼이나 클라렌스 윌리엄스 같은 이들이 피아노를
연주했고,스토리빌 주변에는 수많은 카바레와 배럴하우스홍키통크(선술집)
들이 즐비했다.
거리의 브라스밴드 연주자들은 이곳에서 생계를 구했고, 점차 재즈의 기본
악기 편성 - 코넷, 클라리넷, 트롬본, 기타, 베이스, 드럼 등으로 구성된-
이 갖춰져 갔다. 스토리빌에는 킹 올리버, 시드니 베셰, 벤 존슨 등이
활약했다.
▲ 1919년 루이 암스트롱이 활동하던 밴드의 모습이다.
(우측에서 세 번째가 암스트롱의 모습)
▒ 소년원 밴드에서 출발한 제왕 ▒
루이 암스트롱은 젊은 시절을 미시시피 강의 큰 항구 도시인 뉴올리언스의
옛 크레올 지역에서 보냈다. 그의 부모는 루이가 아직 어렸을 때 헤어졌고,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긴 가난하기 그지없는 흑인 소년
에게 누가 관심을 가져주었겠는가.
어린 루이는 당시 미국 남부의 불우한 환경의 흑인 소년들 대개가 그러하듯
몇 차례인가 소년원에 들어갈 뻔했다.최소한 그가 어느 해인가의 신년 전야
에 거리에서 허공에대고 실탄이 들어있는 권총을 발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결국 루이는 이 사건으로 소년원에 들어가게 된다. 루이에게 소년원은 인생
의 전기를 맞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우연히 소년원 밴드 리더의 눈에
들게 된 루이는 단원으로 뽑히게 되었지만, 그는 악기를 전혀 다룰 줄 몰랐
기 때문에 처음엔 탬버린을 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탬버린에서 드럼으로 옮겨갔고, 다시 코넷(cornet : 트럼펫
과 비슷한 악기로 흡사한 음색을 지니고 있으나 부드럽다. 트럼펫이 좀 더
힘 있고, 다양한 연주 형태를 구사할 수 있다.) 연주자가 되었다.이후 루이
에게 음악은 마치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 에세이』에서 루이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루이가 매일 아침 나팔을 불면서부터 모두들 즐거운 기분으로 눈을 뜨고,
또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째서일까? 그
까닭은 루이가 부는 나팔소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매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일화 -스탯 터클이 『자이언츠 오브 재즈(Giants of Jazz)』란 책
속에서 소개한 - 를 아주 좋아한다. 왜냐하면 이 에피소드 하나가 루이 암
스트롱의 음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이 우리에게 한없는 평안과 기쁨을 주는 이유는 그
자신이 정말 마음속으로부터 기뻐서 하는 연주가 전염성 때문이 아닐까.
훗날 마일즈 데이비스는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을 존경하지만 그가 백인
청중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음악인이 아닌 마치 광대처럼 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루이 암스트롱은 그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음악을
했고, 그 대상이 백인이든 흑인이든,피부색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1970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을 맞이해 제작된 TV 프로그램에서 루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나와 내 음악을 사랑하고, 아시다시피, 나도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어요.내가 무대에 서는 순간 그들은 시시한
게 아닌 좋은 것을 듣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이 거기에 온 목적과 이유는
자명한 것이지요...나 자신이 청중입니다.내가 광대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광대, 그거 대단한 겁니다.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는 건 행복이지요. 그런
비평가들 대다수가 음도 구별 못합니다. …연주할 때면, 나는 행복했던 시
절만 생각합니다. … 그리고 음악은 저절로 나옵니다. 연주할 수 있다는
걸 사랑해야 합니다.]
<요아힘 E. 베렌트 지음, 한종현 옮김, 재즈북, 이룸(2004),106쪽 중에서>
출감 후 루이는 18세 무렵에 뉴올리언스에서 직업 음악인으로 새출발한다.
어느 날 그는 키드 오리(Kid Ory) 밴드가 거리 공연을 하고있는 것을 코넷
을 들고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 그의 손에 들린 코넷을 보고 누구의 악기를 대신 들고 가느
냐고 물었다. 루이는 자기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았다.
대신에 루이는 코넷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그의 말을 믿었다.루이는
키드 오리 밴드에서 코넷 연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뉴올리언스의
음악인들은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스
토리빌의 홍등가가 해군 장관의 명령으로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재즈 뮤지션들 입장에선 직장 폐쇄와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뉴올리언스를 떠났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은 1922년 당대
최고의 트럼페터였던 킹 올리버(King Oliver)가 시카고로 불러들일 때까지
뉴올리언스에 남았다.
많은 이들이 킹 올리버가 루이를 고용한 것은 떠오르는 스타를 자기 밑에
복속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은 훗날
그때 올리버가 자신을 거두어준 것이라고 말하며 도리어 그에 대한 감사함
을 드러냈다.
실제로 루이는 킹 올리버를 만나면서 연주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꿨고, 놀라운 실력을 보였다. 당시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실력을 나타
내는 여러 일화들이 있는데 대개의 내용은 루이 암스트롱의 천재적인 트럼
펫 실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루이가 처음 킹 올리버 밴드에서 일할 때 그는 차석 트럼펫 주자였다.
루이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올리버도 인정하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는 그에게솔로 연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조니 던이 클럽에 들렀다.
그는 무대에 있던 루이에게 [어이, 꼬마야! 그 나팔을 줘봐 넌 아직 제대
로 다룰 줄도 모르는구나.]라며 그를 무시했다. 평소 루이의 실력을 알고
있던 올리버가 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내버려.] 그러자 루이 암스트
롱은 미친 듯이 트럼펫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 뒤로 조니 던은 루이가
일하는 클럽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같은 트럼펫 주자로 실력을 인정받던 독 치트햄은 루이의 연주를 여러 차례
들었고그의 연주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루이를 대신해서 몇번인가
대신 연주를 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한다.
[조명 아래서 루이가 <불행한 소녀>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하도
환호성을 질러대는 통에 그가 뭘 연주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
였습니다. 그러다 조명이 이쪽으로 오면 내가 벌떡 일어나서 힘껏 연주를
했지요. 하지만 환호성은 금방 가라앉고 클럽 전체가 조용해졌습니다. 난
마치 바보처럼 혼자 우두커니 서서 나팔을 불어야 했지요. 몇 년 동안이나
그런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물론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난 루이 암스
트롱이 아니었던 거죠.]
<빌 크로 지음, 윤태희 옮김, 재즈 우화, 열림원(2001). - 241쪽 중에서>
▲ 1922년 시카고, 킹 올리버 밴드(King Oliver)에서의 루이 암스트롱
(좌측에서 4번째)
루이는 1924년 시카고를 떠나 뉴욕의 플레처 헨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에 합류한다. 플레처 핸더슨 밴드는 당시 뉴욕 최고의 재즈 오케스트라
였지만 스윙이나 즉흥곡, 블루스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루이는 이 밴드에서
최고의 연주 실력을 발휘해 베시 스미스(Bessie Smith), 마 레이니(Ma Rain
ey)를 비롯한 여러 블루스 가수들의 세션을 맡으며 레코딩 작업에 참여했다.
▒ 시카고에 도착한 재즈, 다시 뉴욕으로 간 루이 암스트롱 ▒
시카고에 도착한 루이는 올리버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 자신의 밴드 핫파이
브(Hot Five)와 핫 세븐(Hot Seven)을 결성한다. 이들의 음악은 빅스 바이더
벡(Bix Veiderbecke)과 함께 루이 암스트롱을 재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
리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1920년 미국에서는 수정 헌법 제18조와 제19조가 발효되었다. 이 법이 바로
악명 높은 금주법이었다.1933년 금주법이 폐지될 때까지 미국에서 술의 양조
와 판매, 음주 일체는 금지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1921년부터 30년까
지 일명‘롤링 트웬티스(Rolling Twenties)'라 부르는 호경기가 지속되었고,
경기호황에 힘입은 사회적 활력은 재즈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호황의 그늘에 가리어진 금주법 시행 10년 동안 400명의 갱이 길바닥에
서 살해되었다. 루이에게 1926년과 27년은 자신의 음악적 입지를 굳힐 수 있
는 해였다. 루이는 이 때 뛰어난 피아니스트 얼 하인즈(Earl Hines)를 만났
고, 이후 수년간 함께 활동하며 훌륭한 음악적 동반자로 활동했다.
▲ 루이 암스트롱과 그의 밴드 핫 파이브(Hot Five). 좌측부터 Johnny St.
Cyr, Kid Ory, Louis Armstrong, Johnny Dodds, and Lil Hardin-Armstrong
루이 암스트롱은 시카고 시절, 재즈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즉흥 연주를 재즈의 가장 고차원적인 요소로 자리 잡도록 했다. 루이 암스트
롱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재즈 연주에 있어 즉흥 연주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것은 루이보다 앞섰던 킹 올리버나 스스로 재즈를 발명했다고 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던 젤리 롤 모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루이는 스윙의 리듬적 속
성을 재즈에 꼭 필요한 요소로 만들었다.
초기 뉴올리언스 재즈는 여전히 행진곡풍의 음악과 래그타임의 전통 속에서
리듬적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시카고 재즈는 뉴올리언스 재즈와 달리 곡을
주도하는 리드 악기가 자신의 솔로 부분을 연주하는 것 외에도 연주가 끊어
지는 것을 막고 곡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제시된 주제부의 간략한
소절 등을 중간 중간에 짧게 반복해주어 곡의 흐름을 훨씬 더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듣기 편한 재즈가 탄생한 것이다.이런 변화는
루이 암스트롱 이전의 스윙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었으나 루이
이후엔 누구도 스윙이 없는 재즈는 생각할 수 없었다.
혁명이란 말을 좋아하는 젊은이중 다수가 루이 암스트롱이 가장 위대한 재즈
혁명가라는 것을 망각했다. 음악혁명을 논할 때 그들은 찰리 파커나 세실
테일러,존 콜트레인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암스트롱 이전의 음악과 그가 만들어낸 음악의 차이는 파커나 테일러,
콜트레인 이전의 음악과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 그
래서 암스트롱에 의한 재즈 혁명이 분명히 더 위대한 것이다. <요아힘 E. 베
렌트 지음,한종현 옮김, 재즈북, 이룸(2004), 102쪽 중에서>
1929년 뉴욕으로 건너간 루이 암스트롱은 점점 더 상업적인,다른 말로하자면
대중적인 음악을 연주하였고,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골수 재즈 팬들은 종종 루이 암스트롱이 “Hello Dolly"로 히트 차트를 석권
한 것을 비판하거나 탐탁치 않게 여긴다. 루이의 음악성엔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들은 루이 암스트롱이 음악을 하는 이유, [청중들을 즐겁게 하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다른 어떤 뮤지션보다 많이
팝뮤직을 재즈로 바꾸어 놓았다. 그 덕분에 20세기의 미국 대중음악 전체가
블루스와 재즈로 발원하는 하나의 강줄기가 되었다.
▲ 1932년 무렵의 루이 암스트롱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연주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종종 그가 고음역을
쉽게 연주할 수 있는 특수한 장치를 사용한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그래서
공연장에서 다른 트럼페터가 그의 트럼펫을 직접 연주해 보겠다고나서 시험
해보기도 했지만 트럼펫은 전혀 다른 소리를 들려줄 뿐이었다. 문제는 트럼
펫이 아니라 사람이 달랐던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신기에 가까운 트럼펫 연주 때문에 그 진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일설에는 그가 소년원에 있던 시절, 스스로 입을 조금 찢었다는 이
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마치 루이 암스트롱이 갑자기 하늘
에서 뚝 떨어진 천재적재능의 소유자인양 보이게 만든다.
그의 재능이 천부적이었던 것일지는 몰라도 루이 암스트롱은 그에 못지않은
노력가이기도 했다.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올스타스 밴드에서 활동했던 바니
비가드는 루이가 단 하루도 연습을 거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회상한다.
그는 음악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루이 암스트롱이 팝 음악의 가창법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현준은 『김현준의 재즈 파일』에서 “빌리 홀리데이에게 무대 뒤에서 보
컬을 전수하고 지도한 것도 다른 아닌 암스트롱”이었다고 전한다. 실제 루
이 암스트롱에게 노래는 트럼펫 연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고, 그 자신은
연주자로서가 아니라 가수로서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쥐어짜낸 듯한 거친 음색의 허스키한 노래는 오직
그만이할 수 있는 특유의 보컬이었다.아직까지 고운 미성이 무대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에 그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했고,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오늘날엔 그렇게 노래 부르는 이들이 많이 있지만 당시엔 오직 루이
암스트롱 한 사람이었다
우린 1963년 12월, 공연을 떠나기 직전 뉴욕에서 “Hello Dolly”를 취입했
습니다. 원전 악보에 빌리 카일이 백그라운드를 편곡해 넣고 그걸로 녹음을
했죠. 그리곤 까먹고 있었어요. 다시 연주할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3주쯤 후에 우리가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 공연을 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 [Hello Dolly]가 뜨기 시작한 거예요. 사무실에서 앞으로 공연마다
그걸 연주하라고 연락을 했더군요. 하지만 아무도 편곡을 기억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원전 악보까지 잃어버린 상태였죠. 루이가 “야, 누구 이 곡 기억하는
놈 없어?”라고 물었죠. 하지만 곡을 손봤던 빌리 카일조차도 일부만 기억할
뿐이었죠. 할 수 없이 우린 레코드를 사기로 했어요.
그런데 산 후안에는 아무리 뒤져도 그게 없더군요. 결국 사무실에서 보내준
레코드를 듣고 연습을 했어요. 산후안 호텔에서 첫 연주를 했을 때, 루이는
여덟 차례나 박수를 받았죠. 그때서야 이건 정말 대박이구나, 하고 실감을
했지요. <빌 크로 지음, 윤태희 옮김, 재즈 우화, 열림원(2001). - 241쪽
중에서>
루이 암스트롱은 또 스캣의 원조로도 유명하다. 스캣은 대개 특별한 뜻이
없는 음절의 나열로 이루어지는데,일설에는 그가 노래하다가 중간에 가사를
잊어먹어서 대신에 스캣으로 채워 넣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스캣은 멜로디
와 리듬으로 곡의 뼈대를 유지해주며 독립적인 멜로디로 기능한다.
마치 각각의 연주자들이 행하는 솔로 연주와 마찬가지로 솔로 연주로서의
의미가 있다는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스캣 연주는 엘라 피츠제랄드에게
계승되었고,오늘날에 와서는스캣맨 존과 같이 스캣만으로 노래하는 가수도
생겨났다.
▲ 1946년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한 루이 암스트롱
▒ 암스트롱에게 트럼펫을 주세요, 천사 가브리엘이여..! ▒
[Hello Dolly, Mack the knife, What a wonderful world]로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재즈 아티스트였던 루이 암스트롱은 1971년 7월 6일 잠든채 세상
을 떠난다 그의 장례식은 그가 살던 집근처 작은 교회에서 간소하게 치러졌고
동료 가수 페기 리(Peggy Lee)의 주기도문과 함께 추도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음악적 반려자였던진 암스트롱(루실) 역시 같은해 심장
마비로 사망한다. 루이 암스트롱이 살았던 시대는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격동기였다.
1903년 라이트 형제는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했고, 1917년엔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1920년에야 미국의 여성들은 선거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29년
엔 뉴욕 월가의 주식 시장이 대폭락하면서 대공황이 시작되었고,10년 뒤인 19
39년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혹자는 루이 암스트롱이 지나치게 상업적 활동에 치중한 나머지 재즈의 본령을
잃어버렸고, 백인 관객들을 위한 [엉클 톰] 역할을 수행했을 따름이라고 비판
하기도 한다. 분명 어떤 의미에서 그는 백인들을 위한 어릿광대 구실을 했을지
도 모르겠다.
루이는 자신이 어린시절 동네 건달로부터 주변에 “이건 내 검둥이야.” 라고
말해줄 수 있는 백인을 만들어 두라는 충고를 받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미국
대법원에서 공립학교에 있어 흑백 분리교육이 불법 판결을 받은 것은 1954년의
일이었지만, 미국 사회에서 흑백 분리 정책은 오랫동안 철폐되지 못했고, 최근
뉴올리언스를 휩쓴 허리케인 사태 이후 미국 정부의 대처 방식에서도 알 수
있듯 흑백 차별은 더욱 교묘해졌다.
1960년대 그의 후배 흑인 뮤지션들은 그를 “엉클 톰”이라고 부르며 무시하곤
했지만, 1957년 루이 암스트롱은 미국 국무부가 기획한 소련공연을 취소시키며
모 신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남부에서 우리 흑인들에게 해대는
것처럼, 연방 정부는 지옥에나 가라!]그런 뒤에 그는 그 정도밖에 안되는 대통
령이 이끄는 정부를 위해서는 외국에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음악 속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왔으나,
다른 검둥이(Negro)들과 똑같이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습니다.]고 외쳤다.
1965년 스칸디나비아 연주 여행 때 TV를 통해 앨라배마 주 셀마의 흑인 시위대
행렬을 보며 그는 [피부가 검고 시위대 속에 있으면 그들은 예수라도 두둘겨
팰 겁니다.]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 무렵 록뮤지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역시 기자에게 현재의 사태에
대한 견해를 물었음에도 별다른 언급을 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해본다면 루이
암스트롱의 발언이 얼마나 단호했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평소
암스트롱을 백인들의 광대라고 비판했던 마일즈 데이비스 조차 그의 70회
생일을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겠는가.
또 어떤 이는 그가 지나치게 상업적인 취향의 음악을 했다고 비판하기도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주만으로 부자가 된 거의 최초의 흑인이었다. 수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가혹한 연예 비즈니스 산업에 적응하지 못해 희생당하거나
재즈 음악의 토대가 지역적인 변모를 거듭하면서 도태되었다. 혹은 새로운
기술, 예를 들어 레코딩 산업의 등장이나 마이크의 등장(1925년) 등에 적응
하지 못해 몰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루이 암스트롱 역시 흥행 비즈니스 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해야
했고, 그 와중에 부인 릴리안과 이혼하는 아픔도 경험해야 했다.평생 동안
정규 교육이라곤 받아본적도 없었던 그는 종종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해야
했다.
그러나 루이는 뛰어난 인격의 소유자였고, 동료 뮤지션들에게도 인심 좋은
친구였다. 그의 공연대기실에는 늘 배고픈 가난뱅이 연주자들로 버글거렸는
데, 루이는 매니저 조 글레이저(Joe Glaser)에게 시켜 이들에게 용돈을 나눠
주도록 했다. 루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가난한 이웃을 위해 많은 선행을
했다.
1935년 루이 암스트롱은 전직 나이트 클럽 주인이었던 조 글레이저를 매니저
로 고용하면서 안정을 찾아간다.암스트롱은 아내 루실과 그를 전적으로 신임
하여 모든 일을 맡겼다.
매니저와 스타 사이에 이익 배분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이전 구는 우리
연예 비즈니스계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암스트롱과 글레이저의 관계
는 루이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글레이저가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거의 관심이없었
다는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아내 루실은 남편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루이가 마흔 살 무렵의 크리스마스에 그녀는 남편과 함께 떠난 순회공연
숙소였던 호텔방에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만했다.
새벽 세시쯤 지친 몸으로 돌아온 루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계속해서 트리만 바라보았다.
루실이 트리의 불을 끄려 하자, 그는 [아니, 끄지 말아요. 저 불빛들을 좀더
보고 싶구려. 저건 내 평생 처음 가져보는 크리스마스 트리라오.]라고말했다
는 것이다.루이는 순회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계속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지고
옮겨 다녀서 결국 새해가 될 때까지 가지고 다녀야 했다. 루이는 나이 40이
되어서야 그만의 트리를 가질 수 있었다.
어떤 이는 그를 백인들의 “어릿광대 엉클 톰”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재즈
의 성자]라고 부른다. 그를 어떻게 부르던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사람으로 기억되어야만 한다.
비록 그는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인간에 대한 연대감과 연민을 품고 있
었고 음악의 즐거움을 피부색, 인종, 체제와 상관없이 만인이 누려야 할 즐거
움이라 믿었다. 만약 루이 암스트롱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재즈는 없었을 것이
고, 재즈가 없었다면 현대의 팝 음악은 분명 오늘날과는 많이 다른 모양을 했
을 것이다.
재즈는 그저 뉴올리언스 지방의 포크 음악에 머물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루이 암스트롱이 세상을 떠나자 소련 유명한 시인 예프게니 예프투셴코
(Yevgeny Yevtushenko)는..
[지난날에 하셨던 것처럼 하세요
그리고 연주하세요
천사들에게 힘을 주세요
그러면 지옥에 있는 죄인들도
그리 불행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들의 생활에 좀 더 희망을 주세요
암스트롱에게 트럼펫을 주세요.]
[천사 가브리엘이여]란 詩를 발표하였다.
끝으로 DJ 이종환은 [팝송은 죽었다]라는 글에서
1962년 한국을 다녀간 루이 암스트롱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전쟁의 마무리로 어수선한 사회에서 수많은 미군 병사들은 외출이나 휴가를
받아도 우리나라에서는 달러를 쓰며 즐길 게 없다보니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
아로 몰려갔지요.
혁명정부가 낸 기발한 아이디어는 카지노를 포함하는 대형 호텔을 짓자,
그래서 밖으로 새나가는 미군 병사들의 달러를 벌어들이자는 것이었습니다.
1962년 서울 광나루에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의 워커힐 호텔이 세워집니다.
한국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워커장군의 이름을 딴 호텔이었습니다. 5.16직후
단돈 1달러가 아쉽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하고는 전혀 무관한
호화판 호텔 개관 기념행사는 주한 미군병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연예인을
미국에서 초대하는 것으로 신문 한 구석에 났을 뿐입니다.
시골이나 도회지나 집집마다 자동차가 한 대씩인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는 구차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고작 3만 1천4백대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4,5월이면 보릿고개가 행사처럼 우리를 괴롭히던 시절,
음악다방이나 영화에서만 보고 들었던 루이 암스트롱을 직접 만나볼 수는
없었지만 먼발치에서나마 그 시커먼 사람을 볼 수 있을까. 당시의 팝송 마니
아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서성일 뿐이었지요.] 큼큼~
☞ Louis Armstrong / La Vie En Rose(장미빛 인생)
☞ Louis Armstrong / Hello Dolly
☞ Louis Armstrong /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첫댓글 루이암스트롱~ 굵은 음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