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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상과 표현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원
[단편소설]
남자가 웃는다
이 영
어디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조카에게 듣기는 했어도 차마 믿기지 않는지 위 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젓는다. 다나는 말없이 진심을 담은 눈으로 남자를 건너다본다. 다나의 진지한 표정이 더는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인지 남자가 목소리에 걱정을 담아 물어온다.
“무서울 틴디? 그려도 갠찮컸는감유?”
다나가 싱긋 미소를 띠며 대답한다.
“괜찮아요! 설령 무서울 일이 있어도 며칠은 나올 방법이 없으니 별 수 있겠어요? 일주일 후 약속한 날에 데리러 와주시기만 하세요.”
“그러지라! 그럼 준비 됐응께 타시지라. 빠진 것 없는지 확인 또 확인하시고…….”
무인도행은 다나의 후배인 K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K의 먼 친척뻘 되는 남자의 배를 이용하기로 하고 온 것이다. 남자는 K가 말한 대로 순박한 성품인 듯했다. 그리고 친절했다. 사투리가 섞인 느릿한 말투는 그대로 선량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풍겼다.
다나는 차 트렁크에서 배낭과 텐트를 꺼내며, 텐트를 여러 겹 덮을 수 있는 비닐까지 꼼꼼히 챙겨 배로 오른다. 이미 며칠 전부터 준비해온 물건들이었다.
*
섬은 멀지 않았다. 남자의 고기잡이배로 삼십분 남짓 걸리는 무인도였다. 섬은 크지도 않고 지형도 완만해보였다. 완도에서 바라볼 때는 큰 해일이 일거나 하면 그냥 파도에 묻힐 것 같은 섬이었는데, 당도해 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듬직한 바위와 나무들이 어우러진 숲이 있고 모래사장도 있는 곳이었다. 언덕배기엔 습지식물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군락지도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풀과 나무들은 제멋대로 엉켜져 원초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뱀이 나올 것 같아 조금 무서운 생각은 들었으나 섬에는 뱀이 살지 않는다는 정보가 금세 떠올랐다. 안심은 되었지만 약간의 긴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정도의 자극에 물러날 다나는 아니었다.
숲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은 나무들이 몇 그루 서있는 모래사장 위쪽으로 자리를 잡아 텐트를 쳤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나무를 중심으로 묶고 준비해온 그물망을 텐트 주변에 둘러쳤다. 이는 짐승이나 뱀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방어벽인 셈 이었다. 짐승이 없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어쩔 수 없는 경계심은 풀지 못한 채였다.
텐트 위로 두 겹의 비닐까지 쳐놓고 나자 배를 몰고 온 남자는 이제 가려는 몸짓으로 걱정스런 눈길을 준다.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여기쯤에다 불을 피울게요.”
남자는 여전히 미덥지 않은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다나는 휴대폰을 남자에게 건네준다. 섬은 통화권 이탈지역이라 통화가 되지 않으니 당연히 필요 없는 물건이고, 문명을 누릴 꿈은 꾸지 않기 위한 다짐 같은 것이기도 했다.
“선생님, 이거 가지고 가셨다가 중대한 일 생겼다는 소식 아니면 적당히 받아넘겨 주세요. 그리고 일주일 후에 데리러 와주세요.”
“그러지라! 우쨌든 이곳은 큰 짐승은 없지만 그려도 여자 혼자 지내기는 좀 무리지라. 무슨 일 있으면 불 피는 거 잊지 마시요잉? 내 일주일 내내 이곳을 유심히 지켜볼 텡께.”
남자가 푸석푸석한 건초 밟는 소리를 내며 물가에 세워둔 배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
*
남자를 보내고 다나는 텐트 안에 돗자리를 펴고 그 위에 침낭을 포개어 깔아놓았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 작은 돗자리를 텐트 앞에다가 또 깔아놓고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웬만한 원룸 정도는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져온 맥주 캔을 하나 비웠다. 벌써 오는 사이에 맥주는 냉기가 없어졌다. 모래구덩이를 파고 나머지 맥주 캔들을 묻었다. 앞으로 일주일간은 문명을 모두 버리리라 생각한다. 먹다 만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쪼르륵 거리며 넘어가는 미지근한 맥주는 그녀의 생각 속에 싱싱한 살과 영혼을 만들고 있었다.
뇌리를 점령하고 있던 지친 감정들이 앞을 다투어 몸 밖으로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무절제와 비굴함으로 끝없이 깨어지고 끝없이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그녀를 지배했던 도시적 사고, 의식의 밑바닥에 굳어있던 타성의 자국을 하나씩 지운다. 극단적인 현실도피 속에서 찾아내는 쾌감이 더없이 자유롭고 아늑하게 다나의 몸을 나른할 만큼 리드미컬하게 해준다. 섬 생활의 첫 날, 낯선 시간의 조각들이 빠르게 다나의 혼란과 갈등 속으로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
말이 없다. 무엇 때문인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그는 다나의 전화를 무시하고 있었다. 안달이 나다시피 한 다나는 몇 번의 시도를 더 해보았지만 끝내 감감하다.
-그럴 수도 있겠지.
몇 번 반복해 생각을 가라앉혀보았지만 도무지 그의 변화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다나는 그를 오선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를 연주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대상이 되기엔 너무도 깜깜하다. 세상 밖에서의 그는 터무니없다. 안쓰럽다는 표현만으로는 그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죽음 같은 시를 쓰고 주검 같은 그림을 그린다. 일이 없는 날은 두 평 남짓 되는 사무실에서 시체처럼 엎드려 있다가 오후 두 시나 되어서야 나와서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식당으로 들어가 밥을 먹는다. 대체 그가 무엇을 목표로 살며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를 지배하는 사상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잠자코 지켜보면 무언가에 깊이 집착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무엇을 찾을까! 가슴속에 응고된 회한의 화살을 아무런 목적도 대상도 없이 풀고 있는 것일까.-
하루 종일 그가 내뱉는 말들에는 씨가 없다. 푸르뎅뎅한 눈빛을 하고 다니며 씨 없는 말을 내뱉는다.
다나는 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상실한 채로……. 경쾌한 왈츠 음이 울렸다가 끊기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하는 녹음멘트가 나오고 나서야 전화를 포기한다.
다나는 J의 시선에서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다. 그의 석연찮은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찾을 수 없었는데, 넘겨짚고 어떤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또, 무조건 그를 이해한다는 것 역시 함께 함정으로 빠지는 과정일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의 소통은 그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크기를 재는 일이다. 다 이해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는 일은 아니다. 소통이란 완전한 이해로 가려는 길에 놓인 한 통로를 통과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몸에 가시를 키운다. 가시의 보호 속에서 자신을 키우고 때론 그 가시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기도 한다. 다나는 골방에 가두어 두었던 자신의 영혼을 꺼내놓고 투명한 이해를 구하고 있는 중이다.
다나는 J의 무심으로 인해 그가 더욱 절실해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절실한 만큼 거리는 멀어져 가고 그것을 실감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를 처음 남자로 대했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다가와 다나를 괴롭혔다.
엄밀히 따지면 다나는 그날, J를 남자로 받아들였던 게 아니라 단지, 그에 대한 연민으로 몸서리를 친 날이었다. 다나는 지인의 팸플릿을 몇 부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전화를 했었다. 전화를 받던 J는 다짜고짜 어디냐고 물었다. 다나는 자신이 있는 지인의 별장 위치를 대강 알려줬었다. 그는 두 시간 정도의 거리를 곧장 달려왔다. 둘이서 취기가 오를 정도의 술을 마셨다. 그의 눈빛은 젖어 있었고 지워지지 않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몸서리를 치며 자신을 고문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그의 유년 시절과 결혼, 그리고 현재까지에 이르는 긴 시간을 함께 오르내렸다.
그가 직면하고 있는 실제의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인 것은 알 길이 없었다. 아픔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고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도 몰랐다. 그와는 다소의 교제만 있었을 뿐 특별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만남은 특별한 관계가 성립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어떤 것도 의도된 것은 없었다. 그저 다나 앞에 고독한 한 사내가 있었을 뿐이었다. 모든 일은 다나 앞에 무너지고 있던 그에게 반사적으로 일어난 다나의 행위로 시작되었다.
다나는 그가 앉아 있는 의자를 돌아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당겨 머리를 감싸 안았다. 오래도록 그렇게 J에게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
-나의 이 끓는 심장소리가 J 당신의 유년 시절을 덜 시리게 해 줄 거야. 당신의 이혼시절과 당신의 여자들에게서 공허했던 시간을 채워줄 거야. 당신의 이 각박한 현실의 시간이 조금은 따뜻해질 거야.-
다나는 J의 머리카락을 하나씩 세듯이 쓸어내렸다. J는 다나의 가슴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얼마쯤일까 다나는 앞가슴이 축축 해지는 것을 느끼고 그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그의 눈은 오랜 시간의 방황 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소 중인 철새 한 마리가 무리에서 낙오되어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온 모양새였다. 다나는 낯설고 음습한 그를 깨웠다. 그녀 자신의 어떤 것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스산하지 않은 고요 속에 내려놓고 싶었다. 아픔이 소나기처럼 퍼붓는 시간을 빠져나가 그를 해체하고, 허용한 범위내의 진실로 그를 되찾아주고 싶었다. 밤은 길지 않았다.
*
며칠 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시를 쓰며 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는 다나의 친구 P와 함께였다. 식당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난 후 우리는 커피숍으로 갔다.
“삼류가 삼류를 만들기 위해 뼈저리고 있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커피 잔을 내려놓으면서 J가 P에게 처음으로 말을 했다. 밥을 먹는 도중에는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다나 혼자서 얘기를 몇 마디 했을 뿐, 내내 입을 꾹 닫고 있던 J였다. P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술계에도 맬서스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것 아닐까요?”
J가 약간은 긴장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식량은 산수급수로 증가하는 반면,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한다는 이론 그거 말인가요?”
“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세상이지요.”
두 사람의 대화가 자못 진지해지고 있었다. 다나는 J와 P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림 잡지를 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J가 P에게 위축 된 자신을 피력하고 있었다. P의 말은 예술인들도 어차피 고급만 가지고는 살 길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삼류인생들하고도 타협하며 공생해야 하는 현실을 의식한 말이었다.
다나는 P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주눅이 든 듯한 모습을 보이는 J가 안쓰럽기만 했다. 다나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심사로 제안을 했다.
“아하, 우리 여기서 무거운 얘기 하지 말고 커피 다 마셨으니 노래방 가서 기분전환이나 하자구!”
P가 맞장구를 쳤다.
“그럴까? J씨, 그렇게 해요!”
그녀는 다나와 J의 기분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힘들어 하는 J로 인해 다나가 버거워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녀였다. 다나는 J와 만난 과정을 처음부터 P에게 터놓고 말해왔다. 하물며 주고받았던 메일 내용까지 모두 공개했던 것이다.
노래방에서는 셋이서 무아지경으로 즐겼다. 원래 다나와 P는 자유분방했으므로 어디서든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 노래방에 들어가자 뜻밖으로 J는 잘 어울렸다. 바지 한쪽을 말아 올리고 청소용 빗자루로 기타연주 모션을 하면서 노는 J는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다나는 오래간만에 지친 심신을 맑은 물로 씻어내는 느낌이었다.
J는 돌아갔다. 가기 전에 P에게 그가 만드는 책과 자신의 시화집을 선물로 주었다. 다나는 친구를 데려다 주기 위해 P의 집으로 향했다. 자동차 안에서 P가 말했다.
“다나야. J에 대한 너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눈에 보이더라. 그는 자존심을 팔아 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그런 일들이 한 순간도 그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네가 느껴야 하는 아픔과 무력감, 그게 너에게서 보였어. 너만이 가지고 있는 착함이야.”
“그런 거니?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게 문제야. 목표가 없는 삶과 뭐가 달라? 쓸데없이 마음을 쓴다는 게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 늘 그렇게 허우적거리니 아이러니지.”
“어쨌거나 그 사람 귀엽다 얘. 그림 잘 그리고, 시도 잘 쓰고, 노는 모습까지 귀여워! 매력 있던데? 다나 네게는 과분하더라.”
다나는 P의 말을 들으면서 불쾌해지는 것을 억누른다. 자신도 특별한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였지만 P를 통해서 들으니 묘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곧 진실하고 곧은 P의 성격을 알기에 이해하기로 했다. 다나 역시 자신 밖으로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을 종종 발견하면서 스스로 책망도 하지만 언제나 똑같이 반복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P의 단정을 인정하기로 하고 절제하고 있었다. 어차피 필요 이상의 해결불가 부분에 대해서 인정하면 빨리 포기해야 한다.
*
다음날 P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다나야! 어제 참 좋았어. 착한 사람들의 푸근했던 자리 ♥ 덕분에 무사출근 했어. 착한 사람들과 착한 시간을 보내서인지 피곤하지도 않네. 네 남자이긴 해도 나도 끌린다. 이런 감정의 경험도 오랜만이어서 기분이 좋다.-
다나도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너의 좋은 감정을 위해서 박수를 보낸다. 나는 잠시 아주 조금만 침잠하기로 한다.-
그 이후 다나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외롭고 슬프니까 시를 쓴다는 그녀, 서로 등대가 되자던 그녀, P에게 이어왔던 줄을 잠시만 끊고 싶어진다. 그동안 그녀와 함께 애틋하게 지켜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날아간 듯싶었다. 다나는 생각했다.
-자신에게 과분한 상대를 그녀 자신은 가능하다고 믿는 건 뭐야? 그동안 자신과의 유대는 베푸는 자의 관대함이었어?
대놓고 우월감을 과시하는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줘야 좋을지 답을 찾기 힘들었다. 며칠간은 그냥 있기로 했다. 그리고 잊기로 한다. 그리고 가슴에 맡기기로 했다.
*
깨닫다
눈이 시리다
네 앞에 서면 초라해져
헐거워질 대로 헐거워져
가고 오는 마음을
잡아 맬 수가 없다
갈증의 터널
굴욕의 터널
통로는 길고 멀기만 하다
사랑할수록 미움이 커지나보다
도로 폭 감소 표지판 사이로
낡고 구겨진 자존이 지나간다
긴 방황의 시간을 통과하고
스스로에게
그렇고 그런 순간이 더 많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으로 보는 상처를 마음으로 보듯이
마음에 난 상처를 눈으로 보듯이
그리 다짐한 후엔
하늘이 푸른빛인 걸 안다
저만치
도로 폭 넓어짐 표지판이 서 있다
한 시간 여유를 두고 꺼짐 예약을 해두었던 TV도 꺼지고, 틈틈이 다듬어오던 시를 꺼내어 찬찬히 읽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막 잠이 들었는데 익숙한 전화벨이 울려서 반사적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J였다. 화르륵 잠이 달아났다.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불을 켜고 시계를 봤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어쩐 일이예요? 이 늦은 시간에?”
“니, 지금부터 한 시간쯤 뒤에 Y시 버스 터미널로 와라. 거기서 보자.”
J는 다른 말은 한 마디도 없이 불쑥 한 시간 뒤에 보자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술에 취한 목소리였다. Y시는 다나의 집에서 승용차로 삼십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일어나 준비를 하고 가면 약속 시간과 맞출 수 있는 시간이었다.
부리나케 일어나서 엷은 화장을 하고 나서면서 다시 확인을 하기 위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딘데 어떻게 이 시간에 온다는 거예요? 술이 잔뜩 취했던데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대구서 아까 출발했다. 대리운전 하는 중이니 걱정마라. 한 시간 후에 도착예정이니 그리 알고 나와라.”
-맙소사 대구가 어디라고 거기서 여기까지 대리운전을 해? 그 비용이 얼만데…….
대구에서 Y시까지는 세 시간 이상 달려와야 하는 곳이다. 그 장거리를 이 늦은 시간에 그것도 취중인 사람이 올 때는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마음속에 일었다.
Y시 터미널 앞에 차를 세우고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를 한 병 샀다. 십분 쯤 기다렸을까? 휴대폰 시계를 반복해서 확인하면서 기다리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와 있어요. 어디예요?”
“도착은 했는데 손님이 잠이 들었네요! 터미널 바로 앞이에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J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다나는 차에서 내려 J의 차를 찾았다. 바로 다나의 차 뒤쪽에 다른 차 한 대를 사이에 두고 J의 차가 보였다. 뒷문 쪽에서 대리기사가 축 늘어진 J를 부축하여 내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계산은 되었나요?”
“네, 계산하셨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저는 가보겠습니다.”
대리 기사가 간 다음 다나가 남자의 팔을 끼고 모텔을 찾고 있는데 J가 잠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어디 가서 술을 한 잔 더 마시자.”
다나는 여전히 비틀거리는 J를 부축했다.
“모텔에 들어가서 마셔요.”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보였다. 맥주 몇 병과 안주거리를 사가지고 모텔로 들어갔다.
먼저 욕실에 들어가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입으려는 다나를 J가 말렸다.
“벗은 채로 그냥 마시자. 너와 나 사이 거추장스러운 것이 있으면 불편하다.”
“그럼 타월만 두르고 있을게 이건 괜찮겠지?”
“이 쪽으로 앉아. 거기 불편하니까 이리 와서 벽에 기대고 침대위로 다리 올려.”
“당신은 옷도 안 벗고 씻지도 않고…그건 뭔데?”
J는 들어올 때 모습 그대로였다. 재킷만 벗어놓고 다나에겐 편한 자세를 하도록 해 놓고서 자신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둘은 벌써 맥주를 몇 병 비웠다. 술이 취해 들어온 사람치고는 J의 자세는 꼿꼿했다.
맥주가 어느 정도 비워지자 다나는 맥주 배설에 바빴다.
“당신은 화장실 안 가? 그 배는 엄청나게 용량이 큰가 보네! 안 일어서는 것이…….”
“나도 가고 싶어 그런데 나는 안 갈 거야. 나, 쉬 시켜줘!”
“그럼 여기다?”
“응.”
다나는 J의 바지를 내리고, 말없이 빈 맥주병을 배설구에 갖다 댔다.
보통사람이라면 성기능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을 텐데, J는 성 불능 자였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가 고백해왔던 터였고 다나는 그 일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었다. 애초부터 그가 남자로서 매력이 느껴졌던 것이 아니었고 깊은 연민에서 시작된 관계였으므로 가능했다.
오랜 시간동안 어머니로부터, 여자로부터 외면당하며 살아왔던 일이 그에게 정신적 장애로 나타난 것일까? 그는 그렇게 성불구자로 살며 나이를 먹고 있었다. 다나는 쉬를 시켜달라는 이유를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묵묵히 그가 하자는 대로 그의 배설물을 병에다 받아 뚜껑을 닫아놓고 앉았다.
“나, 너한테 할 얘기가 있다.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얘기 해봐”
“나, P를 내 옆에 두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니?”
“그건 당신 뜻대로 해. 당신 마음이 그러고 싶다면 그러는 거지, 나한테 허락은 왜 받으려고 해? 언젠가 말했잖아, 당신한테 여자가 생기면 언제든지 나는 떠나겠다고…….”
“그게 아니고…….”
“가책 느낄 필요 없어. 당신 감정은 당신의 자유고 또 그 대상이 P라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괜찮아. 진심이야.”
“아니, 나는 너도 못 보내. 그냥 내 곁에 있어. 그래서 네 허락이 필요 했어. 우리 모두 함께 있고 싶어”
*
파도 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바람도 잠자고 하늘은 맑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의 빛은 검푸르다.
세상의 소리들이 모두 모여 다나의 가슴으로 들어온 듯싶었다. 허무가 탄력 받은 도르래처럼 다나의 몸으로 감겨든다. 달빛을 마시고 파도를 삼키고 그의 눈빛을 가시처럼 삼키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반백년 후에 다시 뒤적거려볼 수 있을까? 공존의 시간을 함께 쓰기 위한 것일까? 혼돈이 거듭된다.
인기척이 났다. 모래와 마른풀이 섞여서 밟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린다. 누워있던 몸을 발딱 일으켜 세우자 다가오던 물체와 눈이 맞았다. 물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내 경계를 푸는 눈치다. 체중이 삼 킬로그램쯤이나 될까? 비쩍 마른 작은 강아지다.
녀석도 이미 모든 걸 포기해버린 것일까. 망연하게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긴 시간을 배고픔, 외로움과 싸워온 고통이 녀석의 몸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다나의 찌개 냄새를 찾아 온 게 분명했다.
그물망 너머의 녀석은 이쪽 침입자를 탐색중이다. 다나는 녀석을 불러들일까말까 고민을 거듭했다. 이 무인도에서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므로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만,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았다. 강아지는 이 섬에 들어온 지가 오래되었는지 행색이 말이 아니다. 그러니 불쑥 그물망을 열어줄 수가 없다. 녀석의 털은 양털처럼 뭉글뭉글 덩어리로 매달려 있었다. 녀석을 목욕시킬 물이 없다. 물은 다나가 마실 물 뿐이다. 결국 육지로 나갈 때까지는 그냥 거리를 두고 지내기로 마음먹는다. 녀석의 눈빛이 처연하기 이를 데 없다. 플라스틱 용기를 꺼내 물을 담아서 그물망 밖으로 내어주었다.
“네 이름을 모르니 지금부터 네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게. 섬에서 만난 동무니까 섬동이라고 부르자, 응? ……섬동아! 낯설어 하지 마. 이제부터 너와 난 친구야! 며칠만 기다려. 육지로 갈 때까지는 이렇게 지내자. 이리 와서 물도 마시고 밥도 먹어봐.”
다나는 찌개 국물을 떠서 밥을 말아 그물망 밖으로 내주었다. 녀석은 슬슬 눈치를 보며 다가와 밥그릇에 입을 들이밀더니, 말 그대로 게 눈 감추듯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운다. 밥을 다 먹고 입맛을 다시더니, 물그릇으로 옮겨 물까지 다 먹고 나서야 다나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몸과 머리와 가슴으로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한 시도 떼어놓지 않는 사랑의 방식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치존중을 위해서 우호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 관계를 유지해가면서 다음 단계로 보호의 틀을 짠다. 그 후엔 자기충족을 위한 저마다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섬동이도 그런 피조물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섬동이의 삶과 J의 삶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존재에 대한 확인은 무의미하지만 다나에겐 처연한 독백을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들과 거리를 떼어두기만 한다면 생판 모르는 무심한 일상처럼 흘러갈 일이다. 그럼에도 다나는 이들에 대한 상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섬동이는 먹을 것을 다 먹고 난 후엔 그물망에서 조금 떨어져 엎드려서 다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다. 한때 애완견이었다가, 보호 장치라곤 하나도 없는 이 무인도에 버려진 섬동이가 겪었을 공포감이 J와 흡사하다고 느껴졌다. 부모가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바람기와 어머니의 가출을 가슴으로 용인하지 못한 대가를 혼자서 혹독하게 치르며 성장했던 그가 겪었을 상실감도 많이 비슷하리라.
원양어선을 타면서 학비를 벌었던 그였다.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들고 책을 만들기 위해, 예술인이고 싶어 하는 싸구려 작가들과 타협하는 자신의 싸움이 그를 외롭게 하고 술을 마시게 한다. 오래전 자신에게서 떠나갔던 여자들을 그리워해본 적이 없다고 하던 그의 말을 다나는 가슴 시린 역설로 들었었다. 그런 그가 여자를 둘씩이나 곁에 두려고 한다.
이른 봄 순하게 잎들이 피어난 명자나무엔 가시가 있다. 꽃잎은 붉고 가슴 뜨거운 사람들에게 첫 열정을 알린다. 하지만 그 가지엔 가시가 있다. 공존하는 생의 이중적 구도다.
*
“이야, 좋네.”
돌아보는 다나 앞에 두 남자가 서 있다.
“선상님 내려놓고 집에 돌아간 담날에 이 냥반 헌티서 전화가 왔지라. 자초지종 야기를 하며 사정을 혀서 다 말했지라. 그렸더니 어저께 밤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왔지라.”
남자가 약속을 못 지킨 것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다.
“괜찮아요! 잘 하셨어요.”
“지는 그럼 오늘은 혼자 돌아갔다가 이틀 뒤에 데리러 올 텡게 그리 아시지라.”
남자는 다시 이틀 뒤에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혼자서 배를 몰고 돌아갔다.
*
“너의 부재가 사람 환장하게 만든다. 너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너를 지울 수가 없어. 니 없으면 나 쉬 누가 뉘켜 주노? 우리 술이나 먹자. 너하고 이틀 동안 마실 술은 잔뜩 가지고 왔으니……. 술국은 저기 바다 가서 고기 잡아다 끓여먹고……. 내가 고기 잡을 준비도 해왔지. 자, 나가자.”
어이없게도 그가 고기 잡겠다고 가져온 도구는 족대다. 족대를 들고 다나의 손을 이끈다.
J에게 손을 붙잡힌 채 수심이 낮은 곳을 찾아 나섰다. 족대를 들고 바닷물을 훑다가 눈먼 고기 한 마리 잡아왔다. J가 손질을 마무리하고 다나는 육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기야! 나, 쉬이”
J가 다나에게 다가와 응석을 부리듯 말했다. 다나는 말없이 J의 바지를 내리고 그의 생식기를 팬티 속에서 꺼내어 모래사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바보야, 그렇게 꼭 움켜쥐면 어떻게 오줌이 나오니? 이렇게 살짝 잡고 앞으로 일 미터를 조준해. 그래 그렇게.”
다나의 쉬이 소리와 함께 J의 오줌줄기가 뻗어나간다.
“좌로 우로 저쪽 저 돌멩이 한번 맞혀봐.”
남자가 웃는다.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 천진난만한 아이의 해맑은 빛이 떠오르고 있다. 다나는 지금만은 그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계도 없고 달력도 없고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는 무인도의 생활은 육지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유 그 자체였다. 배를 가진 남자의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 말고, 모든 것을 다 잊기로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