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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토하 신부님의 ‘칠극’을 읽은 것은 신학원의 리포트 숙제가 계기가 되었지만 읽어갈수록 가슴에 와 닿는 문장으로 가슴을 쳤다. 숙제를 차일피일 미루다 마감을 일주일정도 남겨두고 책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성경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적재적소의 예화로 평소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교리가 아주 쉽게 이해가 되었다.
흔히 한문 서적의 번역문을 읽을 양이면 고답적이고 어려운 말투로 지레 겁을 먹게 되는데, 저자 판토하 신부님의 뛰어난 문장덕분인 지 아니면 번역을 한 박유리 선생의 유려한 번역 탓인지 거의 400년의 세월의 고분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칠죄종(七罪宗), 세븐 또는 칠극
이 책을 읽으면서 수년 전 본 데이빗 핀쳐 감독의 ‘세븐’이란 영화가 떠 올랐다.
한 사나이가 죄-교만, 질투, 분노, 탐욕, 탐식, 음욕, 게으름 등 중세 교회가 규정한 일곱 가지 근본 죄, 즉 칠죄종(七罪宗)을 지은 사람을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이 하나 하나 제거(심판)한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다. 영화는 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제거할 대상으로 본 반면 이 책은 죄를 인간이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보는 점이 다르다. 즉 일곱 가지 인간의 근본 죄악을 심판의 대상(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극복할(긍정적) 대상으로 본 것이다.
아마도 판토하 신부는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정신을 잘 알고 있었고, 천주교를 유교를 보완, 확대시킨 관점에서 칠극(七克)이라고 한 것 같다.
즉, 천주교를 전혀 딴 세상의 가르침이 아니라, 유교와 비슷한, 그러면서도 유교를 뛰어넘는 가르침임을 점차 보여주며 마땅히 하느님을 섬겨야할 대상으로 알려주고 있다.
이런 관점은 저자가 불교의 윤회설을 비난함으로써 불교의 허구성을 많은 분량에 걸쳐 공격하는 곳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천주가사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유교를 이 책에서는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는 것은 중국인의 문화를 존중한 가운데 선교를 하려는 당시 선교사들의 속내를 볼 수가 있다. 결과적으로 칠죄종을 단죄할 대상으로 치부하지 않고 수양으로 극복할 대상으로 제시한 것은 문화가 다른 중국인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고 자연스레 교리를 스며들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칠극’이라는 서양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는 각각의 죄에 대한 정의를 먼저 내리고, 서양 인물의 예화와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간혹 동양(주로 중국이지만)의 예화도 들지만 그것은 무시해도 될 정도로 극히 적다. 세네카나 알렉산더 대왕의 예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점은 흥미롭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자는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성경구절을 자유자재로, 그리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얼마나 저자가 성경에 정통한 지 읽는 도중 몇 번이나 감탄했다. 또한 단순히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은 저자가 곰씹어 묵상한 내용을 들려주어 더욱 더 친밀하게 다가설 수가 있었다. 칠극이 수양서인만큼 성경 중에서도 서간이나 잠언, 집회서 등의 인용이 많은 것은 당연하면서도 이채로웠다.
또한 죄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하느님(天主)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 간략하나마 칠극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교만
“교만은 사자처럼 사나운데, 이는 겸손으로써 눌러야 한다”
저자는 이 책의 거의 1/5이상을(번역서로도 450페이지중 거의 100페이지를) 교만에 할당하고 있어 모든 죄 중에 교만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인데, 다 자기 잘나서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죄는 자기와 타인에게 짓는 죄이지만 교만은 하느님을 대항하여 짓는 죄이기 때문에 가장 무겁고 모든 죄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다른 죄는 하느님(天主)로부터 떠날 뿐이지만, 교만의 죄는 하느님(天主)에게서 쫓겨나게 된다. 질투는 남을 잃게 하고 분노는 나를 잃게 하지만, 교만은 하느님(天主)를 잃게 한다.”(p22)
하지만 교만은 이겨내기 어렵기 때문에 늘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해야 한다.
결국 교만은 겸손으로 극복해야 함을 제시한다.
“겸손이란 무엇인가? 이는 자신을 낮은 자리에 두고, 자신을 낮은 곳에 앉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하느님(天主)은 위대하지만 나는 보잘 것 없고, 하느님(天主)이 아니었다면 나도 나지도 자라지도 못 했을 것이고, 현명할 수도 지덕(智德)이 더없이 뛰어나고 사리(事理)에 완전히 통할 수도 없을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마음은 하느님(天主)에게 겸손해 지고, 나아가 남들에게도 겸손해 질 것이다.”(p74-75)
2. 질투
“질투는 마치 파도처럼 일어나는데, 이것은 용서로써 가라앉혀야 한다”
저자는 질투를 이렇게 정의한다.
“질투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의 복된 것을 근심하고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이다. 질투는 교만의 벗이다.”(p101)
한 마디로 질투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심보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다. 오늘날 우스갯소리에도 있지 않는가?
남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저자는 질투를 극복하기 위하여
1. 남의 나쁜 점을 헤아리지 말고
2. 남을 헐뜯지 말며
3. 남이 헐뜯는 말을 듣는 것도 경계하라고 한다.
4. 또한 남을 사랑할 것을 제시한다.
3. 탐욕
“탐욕의 마음은 마치 손아귀에 물건을 잡고 있는 것처럼 단단한데, 이는 베품으로 풀어야 한다.”
저자는 또 탐욕을 이렇게 정의한다.
“욕심이 많고 인색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끝없이 재물을 바라는 것이다. 탐욕의 마음은 하늘과 땅의 모든 물건을 얻고 싶어한다.”(p147)
저자는 성경을 인용하여 “재물을 욕심내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임을 밝히며 배풂을 권유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늘에 부를 쌓는 것임을 밝힌다. 그리하여 저 세상의 보화를 쌓을 것을 권유한다.
4. 분노
“분노는 타오르는 불같은데, 이 불은 참음으로써 꺼야 한다.”
“분노는 무엇인가? 그것은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나운 말과 욕설, 그리고 살상과 지나친 형벌 등의 여러 일들이 모두 분노에서 흘러나오게 된다”(p200)
분노에 대한 저자의 정의다. 성을 내는 것은 사람의 감정이지만 성냄을 쌓으면 사람은 죄에 빠지게 된다. 마귀들은 사람들을 죄에 빠뜨리려고 하면 반드시 성을 낼 때를 엿보게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래와 같은 성경을 인용하여 남을 용서할 것을 강조한다.
“너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天主)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남을 용서해야만 그제서야 하느님(天主)도 너희를 용서할 것이다.”(p215)
결론적으로 분노는 참음으로써 극복할 것을 제시한다.
“참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침착한 마음으로 해를 받아 들이고, 나에게 해를 준 이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p223)
5. 탐식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이들은 마치 도랑처럼 음식물을 집어삼키는데 이는 절도로써 막아주야 한다.”
맛집을 찾아 전전하며, ‘식객’같은 만화책이 인기를 끄는 요사이에, 탐식을 큰 죄악이라고 하면 시대에 맞지 않는 구 시대의 사고에 머무는 것일까? 칠극을 읽으며 이 부분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물론 이 책 전체가 구두선(口頭禪)같은 담론이라고 자칫 무시당할 수 있는 요즈음 세태에서 어쩌면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서양인들이 과식으로 인하여 소비하는 소화제 값이면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기아들을 전부 해결할 수 있다는 예전에 읽은 책을 상기해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탐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탐을 내어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김에 절도가 없다는 것이다.”(p266)
무엇이든 정도를 넘치는 과는 해로운 법이다. 저자는 “ 너희가 너희의 음식을 알맞게 하여서 그것으로 가난하여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을 먹여준다면, 너희는 정도를 넘지 않음과 은혜를 가질 것이며, 탐욕스러움과 탐을 내어 먹고 마심을 아울러 없애버릴 것이다.”(p304) 탐식의 극복하는 방법으로 절제와 함께 가난한 이와 나눔의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한다.
6. 음란
“음란은 마치 물이 넘쳐나는 것과 같은데, 이는 마음을 곧고 바르게 하여서 막아야 한다.”
“음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러운 재미를 즐기면서 스스로 그것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어두워져 사리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과 마음이 쉽게 바뀌며 일정함이 없는 것,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 하느님(天主)을 미워하는 것, 그리고 덕(德)과 의(義),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이 모든 것이 음란이라는 악(惡)에서 나온다“(p323)
저자는 음란에 대한 정의와 함께, 음란을 불길에 빗된 참으로 멋진 비유를 보인다.
“이 불길은 술과 음식을 땔감으로 하고, 잘난 체하며 거드럭거림을 불꽃으로 하고, 남을 모욕하는 말을 불똥으로 하며, 더러운 명성을 연기로 하고, 나쁜 질병을 재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불길은 그것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비록 미미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소홀히 하면, 반드시 거세게 타올라 참으로 끄기 어렵게 된다.”(p324)
얼마나 멋들어진 표현인가. 이런 곰삭은 그리고 멋진 비유들이 곳곳에 녹아 있는 것이 이 책 ‘칠극’인 것이다.
또한 음란을 즐기는 사람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도 익히 알고 있는 비유를 들어 그 어리석음을 경계한다. 원숭이를 잡으려면 자루에 야자를 넣어두는데, 원숭이는 그 야자를 놓지 않아 잡히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즐거움(야자, 음란) 때문에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아마 이는 중국의 고사를 저자가 인용한 듯한데 이 고사를 아는 중국인의 머리에는 음란의 결과가 가슴에 더 닿았을 것 같다. 특히 저자가 소돔의 예화를 인용하여 남색에 대하여 강하게 질타하는 것도 이채롭다.
7. 게으름
“게으름은 마치 둔하고 힘이 빠진 말과 같다. 그런데 이는 부지런함으로써 채찍질해 주어야 한다.”
저자는 이제 마지막으로 게으름에 대하여 정의한다.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덕행(德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인데, 모든 욕망에 거리낌이 없고, 귀찮은 일을 견디내지 못하고, 선(善)에 대한 굳은 자세가 없고, 여가를 바라고, 하는 일 없이 놀고, 잠이 많은 것들은 모두 그것의 가지이다.”(p379)
저자는 특히 하느님(天主)의 일에 게으르지 말 것을 강조한다. 세상 사람들이 세속 일에 열심한 것을 빗대어
“저들은 죽음으로 나아가는데도 힘을 들이며 즐거워하는데, 우리는 생명으로 나아가면서도 게을리하고 싫어한다. 그리고 저들은 손해를 보는 일에도 부지런한데도, 우리는 이로운 일에도 게으르니, 어찌 참으로 부끄럽지 않는가?”(p386)
참으로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시간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것이 눈에 띈다.
“우리는 그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소중한 것임을 모르고 그것을 함부로 쓰고 있으니, 뒷날에는 그것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중요한 보배를 얻었으면서도 그것을 마치 자갈처럼 내버려두었다가, 그것을 모두 잃은 뒤에 그제서야 그것을 알게 된다면, 어찌 늦다고 하지 않겠는가?”(p393)
그것은 죽음을 준비할 것으로 이어진다. 오늘 날의 ‘웰빙, 웰다잉’과 상통하여 흠미롭다. “언제나 죽음을 대비하면서 죽을 때를 기다린다면, 죽음이 갑자기 찾아오더라도 이는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근심스럽지 않을 것이다. “(p408)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죽은 뒤의 영원한 세월을 위한 일을 갖추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따라서 그것을 미리 갖추는 이는 매우 슬기로운 사람이다.”(p412)
마무리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읽은 ‘칠극’이었지만 읽으면서 공감이 되었고, 책을 덮으면서는 한번 읽고 버려 둘 책이 아니라 머리 맡에 두고 항상 가까이할 책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책을 덮으며 다시 한번 빤또하 신부님의 삶을 새겨 보았다.
"천주교의 전도를 위하여 중국에 왔던 스페인 출신의 사제"가 판토하 신부님의 한 줄로 간추린 이력일진데 1571년에 나서 1618년에 돌아가셨으면 지상에서 47년의 삶을 사신 것이다. 지금의 수명으로 보면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선종하신 것이다. 하지만 4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눈으로 보면 짧거나 긴 인간의 삶의 길이는 오십보 백보인 셈이다. 천주님의 진리를 동양인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수고하심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음이 감사롭고, 또한 이 책이 앞으로의 나의 삶의 여정에 큰 극기의 교과서가 될 것이기에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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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좋은 독서를 올려주셨군요. 저는 다른 관점에서 읽었습니다. 칠극은 무엇을 전하는 내용일까? 신앙의 유산, 순교자의 삶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히브 13,7) 제글은 학생필기에 올려져 있습니다. 오늘도 축복 가득한 삶속에서 기쁨 충만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