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미시간대학을 거쳐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상학석사학위를 받은 뒤 스탠퍼드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하였고, 1934년 독일에서 개발된 <프론토질>을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도입하였다. 1939년 한국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하였다. 그해 미국으로 건너간 후 1942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귀국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돌아와서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성장을 계속하여 우수약품 생산업체로 인정받았다. 1969년 은퇴하면서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조권순(趙權順)에게 사장직을 물려줌으로써 전문경영인을 등장시켰고, 개인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1977년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산업동탑훈장·참경영인상 등을 받았다.
유일한 박사는 9세 때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선진문물을 경험하며 독학으로 미시간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오면서부터 계획했던 기업 운영을 시작하였습니다. 라초이 식품회사가 바로 그것으로, 중국 음식점과 미국 가정집에서 숙주나물을 많이 사용하지만 숙주나물의 신선도가 오래가지 않아 이를 개선하여 판매한다면 큰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보관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유리병 안에 넣는 방법에서부터 열처리법을 이용한 통조림보관에 이르기까지 식품벤처라 할 수 있는 기업을 설립, 성장시켰습니다. 이러한 벤처정신, 기업가정신은 유한양행과 유한킴벌리에 그대로 전수되어 더 좋은 제품을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항상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안쓰러움을 간직하고 있던 유일한 박사는 일제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던 1920년대 한국으로 입국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편안한 미국 생활을 버리고 한국으로 향하는 것을 말리기도 하고, 또 한국에서 교수직 제의 등도 있었지만 본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기업 운영에 뜻을 두고 국내 정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으면서도 약이 없어 제때,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병을 키워 중병을 만드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보건 위생과 관련된 제약사업을 시작으로 기업을 운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가(國家), 교육(敎育), 기업(企業), 가정(家庭). 이 모든 것은 순위를 정하기 매우 어려운 명제(命題)들이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바로 국가ㆍ교육ㆍ기업ㆍ가정의 순위가 된다.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主權)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나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을 신성(神聖)한 말로 서약(誓約)하여야 한다.
기업 이념 기업의 생명은 신용이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연마(硏磨)된 기술자와 훈련된 사원은 기업의 최대 자본이다.
기업은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서 발전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두뇌가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발전되는 것이다.
기업의 제 1목표는 이윤의 추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실한 기업활동의 대가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 성장을 위한 필수선행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