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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긍정)의 한계(1)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2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 무엇이던지 우리는 하면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이 교회까지 정복한 것 같다. 긍정의 미신은 참사랑 능력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자 리 마저 위협하고 있다. 긍정과 신념과 낙관의 사고가 십자가의 복음을 대신 하고 있다 . 그러나 불가능은 없다는 가짜 복음으로 세상을 흔들던 미국의 로버트 슐러목사 교회는 파산햇고 자녀들은 그런교회를 두고 재산타툼에 빠졌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작인 것을.이 겸허함을 배우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은파)
우리는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당신은 힘이 빠졌을지 모르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물 잔을 볼 때도 비어 있는 반을 보지 말고 물이 차 있는 반을 보라. 동화책에 나오는 작은 기차처럼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되뇌라. 그러면 당신도 산을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낙관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긍정적 사고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요 이 시대적 삶의 혈류에 흐르는 산소와 같다. 물론 우리 중에는 우울한 사람들도 있다.우을증은 거의 누구나 한번쯤 겪는 문제이며, 만성인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무리다 . 아, 그날에 우리는 승하리라. 남들은 실패할지 몰라도 우리는 아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도 아니면 ‘그 날’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리라.
그러나 삶에는 한계가 있다! 계속해서 우리가 인정해온 것처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벽에 부딪친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아무리 갖은 애를 써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들이 있다. 사정이 그러할진대, 낙관론 자체에도 한계가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긍정적인 정신이 있으면 우리는 먼 길을 갈 수 있고 낙심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난공불락의 장벽을 뚫고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는 그런 태도를 기르는 것이 좋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특히 미래를 믿는 쪽이 좋다. 그러나 절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망이 인생의 일부라는 말을 들으면 안도감이 든다. 이 안도감이 낙관의 한계가 주는 첫 번째 위안이다. 자신이 항상 쾌청하지 않아도 됨을 알면,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사시사철 싱글벙글 기대에 부풀어 살려면 에너지가(때로 엄청난 에너지가)필요하다. G. K.체스터턴은 “비관이라고 언제나 실없이 부유하는 것은 아니다.…비관은 때로 용감한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비관은 때로 쾌활한 것이다’’라고 썼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부르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바로 그렇게 부르는 것에서 일종의 만족이 온다. 정직한 대화 맥크로우 목사는 사역중 암이나 기타 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믿음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그들은 자기의 병이 치유될 것을 믿으려고 안간힘을 다했고, 죽음의 험한 손아귀가 조여 오는데도 무조건 긍정적 사고를 지키려고 몸부림쳤다. 다른 가족과 친구들은 그 낙관론을 해칠 마음이 없었기에, 그들은 고통스런 진실이 보이지 않는 척, 빙빙 돌며 춤만 추였다. 결국은 모든 사람이 외로운 고독 속에서 아파해야만 했다. 그럴 때 맥크로우 목사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우리가 계속 치유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고, 어떤 일이라도 가능함을 믿지만, 그 래도 당신의 병은 악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아무래도 당신은 우리들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그러면 대개 그들은 확연히 안도감에 횝싸였다.낙관적 태도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에서 해방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자신의 생존 확률에 대한 정직한 비관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두 가지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죽음을 대비하는 내적 자유,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솔직하게 대화하는 외적 자유다. 그 대화는 추억을 나누고 용서를 베풀고 사랑을 표현하는, 치유의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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