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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르네상스의 종말(16세기 중반) 카톨릭과 가톨릭의 대리전쟁 사코 디 로마~~
일부 미술사조들에 의하여 중세에 가까운 1300년대부터 시작된 르네상스는 1490년대부터 시작해 1520년대에 끝난 하이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지나친 조화와 질서 추구에 대한 반동과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쟁으로 종식되고 뒤이은 매너리즘 시대, 르네상스에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바로크 시대 초기로 이어진다.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년 7~ 1374년)를 학자들이 언급을 하나 일부 의견일 뿐 여전히 중세라고 보아야한다.
학자들에 따라 인문학 영역으로 의견이 다르나 중세의 종말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사조가 진행중이던 1453년의 동로마 제국의 멸망 혹은 1521년 루터교회의 출현으로 잡으며 페트라르카의 시대(1304~1374)가 중세라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페트라르카
"비록 이 몸은 지상의 것이지만, 이 확고한 소망은 별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정치가. 사실상 르네상스 시대를 연 최초의 인문주의자으로 평가받는다. 소네트 시의 대가이며 여러 편의 소네트를 집필하면서 이 형식을 확립시켰다.
130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도시 아레초(Arezzo)에서 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세르 페트라코(Ser Petracco, 1267~1326)는 본래 피렌체 출신이었으나 교황파(구엘프) 중에서도 백당 성향이었기에 피렌체를 흑당이 장악하자 아레초로 망명해 프란체스코를 낳게 된다.
1309년 가톨릭이 대분열되는 아비뇽 유수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대립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편에 섰던 페트라르카의 가족은 대립 교황이 머무르던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페트라르카는 대립 교황청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그는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선다. 1327년 아비뇽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인 라우라 드 노베(Laura de Noves, 1310~1348)를 만나 그녀를 짝사랑한 경험을 소네트로 집필하던 그는 1337년 대사 임무를 수행하러 로마를 방문하던 중 영감을 얻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을 소재로 한 첫번째 대작이자 걸작인 아프리카(Africa)를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1341년 4월 8일 그가 로마 시에서 최초로 계관 시인의 영예를 얻게 됨으로서 절정에 이른다.
1342년의 서정시집 ‘칸초니에레(Canzoniere)’는 라틴어 위주의 문학 활동에서 벗어나 속어인 이탈리아어로 집필되어 신 중심의 중세 정신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르네상스적 새로운 시대 정신의 탄생을 의미했다.
르네상스는 제국주의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정통성을 통한 지배의 대의 명분을 얻기 위해 포장된 면이 있기도 하다.
미슐레, 부르크하르트, 페이터는 르네상스를 역사의 시대라기보다는 정신으로 바라보는 19세기식 개념을 만들어냈다.
예술과 문화에서의 성취가 개인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문명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는데, 15세기부터 계속된 현상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설명을 제시하기보다 그것을 19세기 유럽 사회의 이상향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 연구자들은 제한적인 민주주의, 교회에 대한 회의주의적인 태도, 예술과 문학의 힘, 다른 문명들에 대한 유럽 문명의 승리를 찬양했다. 이러한 가치들은 19세기 유럽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명분이 되었다.#부르크하르트
야코프 크리스토프 부르크하르트(독일어: Jacob Christoph Burckhardt, 1818년 5월 25일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 - 1897년 8월 8일 스위스 바젤에서 사망)은 스위스의 미술사와 문화사를 연구한 역사가로, 각 분야의 역사학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문화사의 중요한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현재 학계가 문화의 역사를 생각하고 연구한 방식은 매우 다양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지크프리트 기디온(Siegfried Giedion)은 부르크하르트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발견자로서 그는 어떻게 시대를 온전히 다뤄야 하는지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회화와 조각, 건축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사회적 제도를 같이 고려함으로써 말이다."부르크하르트의 대표적인 저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 1860)이다.
현재의 시각에서 냉정하게 고찰하면 역사에서 르네상스란 없다. 고대로의 복귀라는 가면 아래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변화만 있을 뿐이다. 일련의 르네상스란, 정확하게 말하면 고대에서부터 근대가 완전한 형태를 취한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의 시대적 특징이다. 서양사에서는 8~9세기 카롤루스 르네상스, 12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12~15세기에 시작되고 여타 유럽에서는 15~16세기에 꽃피운 르네상스, 예술과 문학과 신학에 국한된 18~19세기 르네상스(신고전주의, 중세가 고대를 대체한 신고딕주의, 신토마스주의 등)와 같은 여러 르네상스가 있었다. 르네상스란 중세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향수에 의하여 권위를 과거에서 찾고 황금시대를 옛날에서 추구하는 중세 그리고 끝없이 탐욕스런 서구인들의 특성을 지적하며 언급하는 현상일수도 있습니다.
저도 몇편에 걸쳐서 서양인들의 미술사이기에 그들이 시각, 그들의 사료를 통하여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언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무언가'라는 논조로 서술했습니다만 전지적 관객 시점으로 냉정하게 언급하면 예술의 발전보다 자신들의 명예와 부를 위해 예술가들이 활동한 간단하게는 '초기 근대'입니다!
19세기 계몽주의적 관점이 진하게 묻어있기는 하지만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중반까지의 후기 중세-근대 초기에 있었던 이탈리아에서의 문화 경향과 알프스 이북으로 전파된 인문주의의 유행은 실제로 존재했으며 잊혀지고 있었던 희랍-로마 고전에 대한 관심이 학교가 아닌 인문주의 공동체가 마련되었다는 의미"는 부인할수가 없다.
오늘날 관광이 활성화되고 다양화되면서 수도 없는 사람들이 르네상스를 언급하며 유럽의 미술관들을 방문하고 있으니 학술적인 논란은 논외로 하고 르네상스를 상술했는데 역사 위주가 아니라 예술가 위주로 언급한 이유도 "서구우월주의"에 대한 반감이라는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르네상스의 종식을 서술할 시점이 도래하여 역사가 미친 영향을 반추하여 보려고 합니다!
르네상스가 전 이탈리아로 확산되면서 르네상스의 성격도 조금씩 변하게 되어 1400년대 후반 들어서는 지배 계급과 귀족들이 르네상스의 이상을 완전히 독점하기 이르렀다.
초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무명에다가 돈도 없는 가난한 자들이 많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귀족들의 금전적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버렸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취향이 귀족적, 세속적으로 변해갔으며 르네상스 예술은 갈수록 사회 권력층의 입김이 강해졌다.
장황하게 언급했지만 당시 계급 사회는 엄격하여 문화 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게만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이었으나 인구의 4분의 3은 시골에 살며 농업에 종사했다. 농부들의 삶은 르네상스 시대나 중세 시대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봉건제가 발달하지 못한 북이탈리아의 경우 대부분이 자영농이거나 소작농이었지만 영세한 생계형으로 르네상스가 오든말든 신경 쓰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일상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목구멍이 포도청이면 관심없죠!)
도시는 귀족들만큼이나 배타적인 상인 계급들이 무역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가지고 도시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며, 이 부를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에 아낌없이 뿌렸다. 상인들의 비호를 받는 예술가와 장인들이 있어 높은 대접을 받았다. 장인이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다른 유럽 지방들에 비하면 확연히 차이가 있는 부분으로 상인, 예술가, 장인 트리오가 함께 르네상스의 발전을 이끌어나갔던 것이다. 다만 도시의 비식자층인 하류층들, 빈곤층은 르네상스에 당연히 별 관심이 없었다. 도시 빈민들도 생계에 급급했기에 농민들처럼 르네상스의 일자리의 확보를 제외한 나머지 영향에는 관심도 없었다. 북이탈리아의 빈부격차는 대단하여 압도적인 부를 독차지한 몇몇의 막대한 후원 덕분에 오히려 르네상스가 발전했다는 것은 전술 중에 수시로 언급했죠!
도시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탈리아는 "우물안 개구리"로 그들만의 이전투구가 치열할때 1453년 백년전쟁을 마무리한 프랑스가 제버릇 개 못준다고 영토 야욕에 이탈리아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하고,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을 비롯 거의 전 유럽을 한 손에 틀어쥔 합스부르크의 강대한 황제 카를 5세의 출현으로 흥청망청하던 이탈리아는 강대한 영토 국가들의 영향하에 놓이기 시작한다.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영토 국가는 이탈리아 개별 도시 국가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군사력이 강해진 것이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땅따먹기의 현장으로 변하고 특히 1525년 이탈리아를 둘러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에게 박살나서 이탈리아는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놓이고 만다.
(제가 언급한 예술인중 "미켈란젤로"는 생존하여 역사의 암담함을 경험합니다!)
#카를 5세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며, 스페인의 국왕, 이탈리아의 군주 등 국경을 초월한 여러 직함을 갖고 있는, 중근세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국가의 왕관을 쓴 인물이다.
군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부모와 조상의 덕을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이 받은 대단한 상속자로 기록되는 인물. 친가와 외가로부터 막대한 영토를 상속받아 카롤루스 대제(신성로마제국의 카를 1세) 이후 나폴레옹의 부상 이전까지 약 1,000년 동안의 기간 중에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어머니는 스페인 왕국의 후아나 공주, 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후계자이자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이던 필리프이다. 이처럼 화려한 친외조부모님 덕분에 카를 5세는 유럽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상속받는 행운아가 되었다. 훗날 대영제국이 표방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원조인 셈이다.
40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유럽 패권국 수장으로써 재위에 있었던 카를 5세는 다사다난한 일을 겪었다. 그의 치세는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역사적 변곡점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유럽 곳곳에 산재한 워낙 방대한 면적의 영토를 다스렸기 때문에 16세기 전반기의 유럽사를 이야기할 때 그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종교개혁,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신대륙 정복,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등 굵직한 역사적 흐름의 한 복판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오늘날에는 통상적으로 그의 대표작위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로 불린다. 과거 다른 명칭으로 불렸던 현지에서도 최근에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카를의 현지 표현 + 5세'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 '카를로스 5세(Carlos V)'라 표기하는 식이다. 스페인의 관광지에서 외국인들을 위해 카를로스 5세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어떻게든 이탈리아 내에서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코냑 동맹을 결성해 발버둥쳤으나, 이것을 명분으로 카를 5세는 교황의 비열함을 비난하면서 가톨릭 군대로 하여금 교황령을 털어버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로 시원하게 털린 교황이 6개월이나 유폐에 가까운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는 쑥대밭이 되었고 로마에 세워진 르네상스풍 건물은 개박살나서 현재 로마 시내에서는 종교 시설을 제외한 르네상스풍 건물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클레멘스 7세
교황 클레멘스 7세(라틴어: Clemen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VII)는 제219대 교황(재위: 1523년 11월 26일 ~ 1534년 9월 25일)이다. 본명은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이탈리아어: Giulio di Giuliano de' Medici)이다. 사생아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는 두번째로 교황이 되었다.
사코 디 로마는 사실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종결지었다고 평가됩니다!
#독일의 용병인 란츠크네히트가 피난을 간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조롱하기 위해 가마(세디아 제스타토리아)에 가짜 교황을 태운 채 행진하는 모습을 그린 판화다. 가마꾼 용병들은 어디서 주워왔는지 주교관을 쓰고 그 위에 또 챙모자를 썼다.
*사코 디 로마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는 직역하면 로마 약탈을 의미하며, 역사상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중 가장 유명하고 일반적으로 '사코 디 로마'로 칭해지는 것은 152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로마 약탈로서, 교황권의 붕괴라는 역사적인 상징성과 더불어 끔찍한 참혹성 덕에 유명해졌다. 물론 독일 지역에 기반[1]을 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긴 했지만, 명색이 로마 황제가 보낸 군대가 실제 로마를 박살내 버린 사건이었다.
역사가들의 추산에 의하면 사코 디 로마의 타격이 로마 제정 초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네로 시절의 로마 대화재마저 능가한다.
대화재 당시엔 어떻게든 불을 끄려 했고, 후에 재건축과 확장사업으로 원래보다 더 장대한 스케일의 로마를 만들었으나 이 사코 디 로마는 로마 일대가 완전히 폐허가 된 후에야 끝을 봤기 때문에, 재건축은 개나 줘버린 듯 부서진 잔해와 과장 좀 보태서 타다 남은 재까지 약탈해갔다. 14세기 경의 아비뇽 유수가 교황권 쇠락의 상징이었다면 이 사건은 교황권 추락의 정점이자 몰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딱히 통일된 용어가 없어 '로마 대약탈', '로마의 약탈', '로마의 침탈'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며, 원어인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
르네상스의 몰락을 초래한 사건으로 궁금한 분은 더 보시라고 링크합니다.
https://naver.me/xRVFJ9A1
여담이지만 지금도 바티칸을 지키는 근위대는 스위스 용병인데 "사코 디 로마"가 만든 전통입니다.
"용병군은 적의 시체를 짓밟으며 성난 물결처럼 로마 시내로 밀려들었다. 오직 스위스 용병들만이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키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고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이전의 파비아 전투때 그랬듯이 거의 몰살당했다. 모두 전사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189명의 스위스 근위대 중 147명이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사투를 벌여 전원이 용병군에 학살당해 주검이 된 것이다.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이자 스위스 근위대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지레 겁을 먹고, 147명의 근위대가 사투를 벌여 시간을 버는 동안 남은 42명의 호위 아래 바티칸을 버린 후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갔다. 수비군도 없고, 교황도 도망간 로마 시내는 용병들이 들이닥쳤을 때 이미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가톨릭의 본거지다운 엄숙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무질서함만이 팽배하게 들어차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층들은 별 귀감이 되지 못했으나 바티칸은 의리가 있는 건가요?
이탈리아의 부는 고갈되고 대부분 지역이 외세의 지배에 놓이고 말았지만 문화의 경우 예술가들의 토양으로 바로크까지는 건재했으며 유럽에서의 이탈리아 미술의 문화 주도권 상실은 1680년 베르니니 사망을 기준으로 통상 언급합니다.
영토의 지배가 문화의 교류로 이어져 '르네상스가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간 분기점'이라 칭하며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카를 5세 밑에 굴종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이탈리아는 지난 세기의 영화를 대륙에 내준 채 3류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탈리아의 정복으로 유럽 각국으로 이식된 르네상스는 각국의 토양에 문화가 융성하게 꽃피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철학자, 인문학자, 예술가, 건축가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15세기 이탈리아 못잖게 상공업과 개방성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의 경우 자체적으로 회화 예술이 붐을 일으켰으며 확산된 금속 활자 인쇄술 덕분에 15세기말부터 유럽 전역에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전파되지만, 유럽 전체가 균일하게 르네상스를 경험하지 않았다.
르네상스가 전개되던 중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을 위해 율리오 2세가 모아둔 돈을 탕진하다가 기금마련을 위해 면죄부를 팔아치운 행위로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종교개혁의 빌미를 주기도 하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발생한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주면서 예술에서 종교의 입지는 급하게 축소됩니다!군주론이라든가 인문주의에서 파생된 사회계약설은 훗날 유럽 각국의 절대왕정 체제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예술가들은 입장에서는 후원자가 종교에서 절대권력의 군주로 바뀌었을뿐 귀족과 군주들의 후원 하에서 다방면의 발전의 토양이 계몽주의의 새로운 바람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지속될 수 있었다.
#레오 10세
피렌체 공화국의 명문가이며 피렌체의 은행가인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와 클라리체 오르시니 사이에서 '영리한' 차남으로 태어났다. 또한 그와 함께 성장한 사촌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해 독일의 면벌부 판매를 승인했고,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교황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어떠한 측면으로든 빼놓을 수 없는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음에도 이탈리아 내부에서 전문적으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 통일전쟁 이전까지 이탈리아가 여러 군소 도시국가로 나누어있었던 탓이 크다. 이탈리아 외부 국가들에서 연구가 활발했는데 19세기까지 이탈리아는 외지인들에게 경이의 땅이자 관심의 대상이었고 당연히 그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외지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권력자 차원의 후원이 아닌 조르조 바사리 등 이탈리아인의 시각에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도 존재한다.
미술사를 언급하면서 연표가 아닌 예술가와 대표작으로 언급을 하다보면 시기가 뒤죽박죽이 될수 있습니다.
제가 르네상스를 언급하면서 서술한 예술가들뿐이 아니라 수도 없는 예술가들이 당대에 활약했겠지만 일일이 열거할수가 없으니 저의 글에 언급된 예술가들의 생존 시기를 정리해봅니다!
예술이 활동이기에 전성기를 위주로 정리해야하는데 사람으로 수명이 뒤죽박죽으로 탄생순아닌 전성기순으로~~ 참고하시라고..
1.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이탈리아어: Durante degli Alighieri, 1265년 ~ 1321년)
2.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1304년 ~ 1374년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정치가. 사실상 르네상스 시대를 연 최초의 인문주의자. 으로 평가받는다. 소네트 시의 대가이며 여러 편의 소네트를 집필하면서 이 형식을 확립시켰다.
3.치마부에(Cimabue, 1240년 경 ~ 1302년 경)은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4.두초 디 부오닌세냐(이탈리아어: Duccio di Buoninsegna)1260?~1319?
5.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년 ~ 1337년)
6.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1283년경 ~ 1344년경)
7.월튼 두폭화 1395경~~
8.랭부르형제 14세기말~15세기초
베리공작1340~1416
9.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 1375년 )
10.필리포 브루넬레스키 1377~1446
11.로렌초 기베르티 1378~1455
12.얀 판 에이크 1390~1441
13.마사초 1401~1428
14.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1397년∼1475년)
15.도나텔로1386~1466
16.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이탈리아어: Piero della Francesca, 1415년경 ~ 1492년 )
17.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년경 ~ 1506년 )
18.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년 ~ 1510년)
19.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1519
20.미켈란 젤로 1475~1564
21.라파엘로 1483~1520
22.조르조 바사리 1511~1574
*하이 르네상스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는 1490년, 혹은 1500년 즈음에 시작되어 1520년 라파엘로의 죽음으로 끝난 짧은 시절을 가리킨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와 메디치 가문이 있는 피렌체 등 북중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가장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시기로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의 이미지가 바로 이 '하이 르네상스'의 것이다. 이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바로 르네상스의 대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도나토 브라만테 등이다.
하이 르네상스 양식과 고딕 성당과 비교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뾰족하고 높은 첨탑과 외부로 나와있는 기둥들, 넓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높은 천장을 가진 성당은 고딕양식이다. 반면 네모와 같은 도형과 그리스, 로마식 기둥과 창으로 장식된 벽면, 그리고 건물 가운데의 거대한 돔과 그 아래의 큰 공간을 가진 성당은 르네상스 양식이다. 다만 이후 시대로 가면서 점점 위의 특징들이 섞이게 된다는 점은 유의하자. 이 특징들은 고대 로마의 건축을 응용한 것으로 레온 알베르티에 의해 로마 고전주의의 부활과 함께 등장했으며 그동안 서유럽의 건축 구조에서 등한시되어왔던 돔이 다시 건축구조로 나타나게 된다.
*도나토 브라만테(1444~1514)
도나토 브라만테는 1444년 우르비노에서 태어나 밀라노 공작 아래에서 20년 동안 일하다가 밀라노가 프랑스에 패배해 함락당하자 로마로 향해 교황 아래에서 일했다. 밀라노에서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수도원에 지은 십자형 성당. 벽돌로 만들었고 화려한 테라코타로 장식한 북이탈리아식 전통 건축법을 따랐다. 부지 문제 때문에 신랑이 익랑보다 더 멀리 뻗어있는걸 제외하면 거의 대칭이다. 팔각형의 드럼 내부에 숨겨져서 외부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무려 직경 20m에 달하는 거대한 반구형 돔을 천장으로 이고 있는 건물이다. 그 외에 옛 베스타 신전의 외양을 본뜬 '템피에토'를 지어 '건축학적으로 완벽한 보석'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특히 교황 율리오 2세의 요청을 받아 1506년 성 베드로 대성당, 벨베데레 정원 등 역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되기 전에 이미 죽어 끝을 보진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은 설계사들은 마음대로 브라만테의 설계도를 변경했는데, 미켈란젤로가 다시 설계 지휘권을 잡자 브라만테의 설계안 상당수를 되살렸다고 한다.
#키오스트로 델 브라만테(이탈리아어: Chiostro del Bramante)는 로마에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랑 건축물로, 바로 옆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과 인접해 있다. 1500년경 올리비에로 카라파 추기경의 의뢰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건축물이다.
이번 서술에서는 르네상스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돌아봄으로 미술사임에도 별다른 예술가의 소개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