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25. 주일예배 설교(사도행전 강해 44)
사도행전 27장 1-44절
바울의 구원 천사, 누가-아리스다고-율리오
■ 우리는 늘 즐겁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늘 슬픈 일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늘 죽을 일만 있는 것 같다가도 살고, 잘 살다가도 죽을 것 같은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늘 병들었다 낫고, 건강하다 병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늘 기쁜 일, 슬픈 일, 행복한 일, 화낼 일 등등이 수시로 번갈아 옵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일들이 자연스럽지 않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슬프고, 괴롭고, 병들고, 죽을 것 같을 때,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생기는 거지?’라며 짙은 의심을 갖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도 예외이질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이 자신을 떠난 것 같고, 구원이 없는 것 같고...하는 등의 깊은 의심의 늪에 빠집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것의 답을 본문을 통해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바울의 사역 여정이 얼마나 거칠고 다난(多難)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이라는 제한된 지면 안에 사역을 십자가의 측면에서 설명하느라 거친 면을 중심으로 소개했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날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좋은 날들 보다는 거친 날들을 주로 소개했다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의 사역 여정이 거칠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단 하루도 쉽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거친 여정을 다 소화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니 소화하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구원의 손길’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이미 그를 구원할 천사들/사람들을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전체를 되짚어 볼 필요도 없이 오늘 본문만으로도 이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바울에게는 늘 천사들이 길목마다 있었는데 이번 로마로 가는 길에는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율리오’가 특별히 그 역할을 하였습니다.
1-1. 누가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의사로서 바울의 주치의 노릇을 하면서 선교 여행에 파트너로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 파트너로 누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나바도 있었고, 마가, 디모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다고’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아리스다고를 처음 만난 것은 19장에서였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데메드리오’라는 은세공업자로 인해 곤경에 처한 일이 있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바울 때문에 이 신상 모형 장사가 어려움에 처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모형을 구매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데메드리오는 가짜 뉴스를 퍼트려 시민들의 분노를 유도하여 바울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바울은 못 잡고 그의 동지들을 잡아 혼을 내는 정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바울을 대신해서 고초를 겪은 이가 ‘아리스다고’였습니다.(행 19:29)
이 사건 이후 아시아 선교 여행 일정에 동무를 한 사람 중 한 명도 ‘아리스다고’였습니다.(행 20:4) 그리고 로마행 배에 오른 사람 중 한 명도 ‘아리스다고’였습니다.(행 27:2) 더욱이 바울이 로마에 도착해서 감옥에 갇혔는데 그때도 함께 감옥에 갇힌 사람이 ‘아리스다고’였습니다.(골 4:10)
신약성서 전체를 봐도 ‘아리스다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 한 줄 없습니다. 바울의 인생에 이렇게 자주 등장하고, 이렇게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신약성서에 5번이나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9:29, 20:4, 27:2, 골로새서 4:10, 빌레몬서 1:24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서 아리스다고를 동역자라고 소개하며 깊은 애정과 감사를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아리스다고’, 그는 자신에 대한 단 한 줄의 소개가 없었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 바울과 동행하는 자리를 변함없이 지켰던 것입니다. 주님이 맡기셨으니 주님만 드러나면 됐고, 바울만 일 잘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과 자리를 지켰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아리스다고는 이 거친 사역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었고, 바울을 견디게 한 구원의 천사였습니다.
1-2. 그런데 로마로 가는 바울에게 아리스다고만 천사였던 것이 아닙니다. ‘누가’도 천사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놓지 않고 ‘우리’라는 대명사로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았던 누가도 천사였습니다.
그리고 백부장 ‘율리오’도 천사였습니다. 총독의 시위대(侍衛隊)이며 죄수를 호송하는 경찰부대인 아구스도 부대의 백부장인 율리오도 바울의 천사였습니다. 율리오가 아니었으면 바울은 로마로 가기도 전에 바다에서 살해당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율리오 덕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율리오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율리오는 바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시키신 천사였습니다.
본문에서 율리오의 활약을 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율리오는 바울에게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3절을 보시죠.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이튿날 우리는 시돈에 배를 대었다.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친구들에게로 가서 보살핌을 받는 것을 허락하였다.”(새번역)
율리오와 바울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던 것일까요? 바울의 성정으로 봐서 물질적/정치적 거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율리오의 자발성이었다고 보입니다. 율리오는 총독 휘하의 신임 받는 자로서 바울을 자세히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삶은 율리오의 마음을 열도록 하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린 율리오는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바울을 위한 구원의 천사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보실까요?
9-11절.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27-32절.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41-44절.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율리오는 바울과 어떤 인연도 없이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총독 앞에 죄수로 온 그날부터 알게 된 사이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죄수와 관리자 사이로 매우 엄격한 사이였습니다. 결코 친할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구원을 위한 천사가 되었습니다. 아니 천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는 바울의 삶이 그에게 감동을 주었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를 바울의 천사로서의 역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 저는 살면서 이 경험을 수없이 하고 있습니다. 60을 바라보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단 한 순간도 도움의 천사, 구원의 천사가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 늘 있었습니다.
크게 설명을 드리자면, 제가 교회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은 천사이신 여러분 덕분입니다. 제가 학교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은 천사이신 몇몇 교수님들 덕분입니다. 제가 사회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은 천사이신 의식 있는 많은 분들 덕분입니다.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고, 글을 쓰고, 여러 활동을 하는 이 모든 일,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통해 먹고 사는 일을 가능하도록 도와주시는 많은 천사들이 있음을 저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아마 여러분도 다르지 않으실 것입니다. 혹시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가만히 삶을 돌이켜 보시지요. 반드시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천사들이 매번 곳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아리스다고, 율리오와 같은 분들이 여러분의 천사로서 역할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 나한테 생기는 거지?’라며 하나님이 의심스럽고, 심지어 믿음이 흔들리고, 구원에 대한 의심이 생기십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단순히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을 사랑하십니다.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에게 돕는 분들을 천사로 보내십니다. 혹시 지금 옆에 앉아 계신 분이 여러분의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 우리는 일에 치이다 보면 인생이 일에게 지배를 당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이 무섭고 짜증납니다. 그러나 일이 인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만들 듯이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바꾸는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일에 치여 괴로운 사람, 삶의 고단함에 지친 사람, 사역의 거친 여정에 믿음이 저하된 사람, 등등 모두에게 구원의 천사들을 배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여러분 앞에 닥친 그 거친 일들을 바꾸십니다. 그래서 그 인생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잠시 눈을 들어 앞뒤 좌우를 보십시오. 어딘가에 하나님이 보내신 여러분을 돕는 천사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보이지 않더라도, 찾지 못했더라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천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자, 힘을 내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