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송영)으로서의 기도
구약에서의 기도는 제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창세기 12장 8절의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에서 볼수 있듯이 제사와 기도는 연결이 되어 있다
욥 42장 8절 - 9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에서와 같이 욥의 친구들의 제사와 기도는 긴밀한 연관을 이루고 있다
제사가 외적 형태의 나아감이라면 기도는 내적인 형태의 나아감이다. Wayne R. spear은 “구약성서의 기도와 제사는 대립적이 아니고 보조적(보완적)이라고 말할수 있다” 고 말하고 있다
오리겐은 기도의 단계를 서술한다. 먼저는 비록 영적이지만 제한적인 것을 간구함이요(dehsij), 그 다음은 하나님과의 순수한 교제 중에서 우리 자신을 바침이요(proseuch), 마지막은 기도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들어내는 송영이다(docologia). 이 송영의 단계에서는 하나님과의 합일 (enwsij)이 강조된다. 물론 여기서도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 구별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기도의 가장 최고봉으로서 송영이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사심 없는 기도라 할 수 있다.
송영에서 기도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지향한다. 신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높이 고양되며, 이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 그는 사소한 것을 간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무가치한 축복을 구하지 않고, 크고 신적인 것을 구한다.
오리겐은 간구나 사죄 기도보다는 삼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더 강조한다. 기도에서 제일 먼저 송영이 나오고 그 다음이 하나님의 은덕에 관한 감사이다. 셋째는 사죄 기도요 마지막이 간구이다. 그리고 기도는 다시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리는 송영으로 마쳐야 한다.
비록 삼위일체론이 오리겐에게는 여전히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지만, 기도는 삼위를 향한 송영으로 시작하여 삼위를 향한 송영으로 마쳐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물이 성부에게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오듯이,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삼위 안에 있는 삶이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오리겐은 책을 쓰면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이것은 나중에 힐라리나 어거스틴에게서도 나타난다.
루터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오시는 길이다. 즉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며 당신의 중보사역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기도자가 제물로 바쳐지는 제단이며, 그리하여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 이 점에서 기도와 찬양의 제사는 상호 교차한다
개혁자들은 기도에서 간구보다는 경배의 측면을 더 부각시켰다. 이 것은 바로 삼위 하나님을 향한 찬양, 곧 송영이다. 송영을 우리는 기도의 최고봉이라 부르려고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그 존재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기도의 목적은 무엇일까?
첫째 목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며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입술과 삶, 예배와 기도를 통하여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며 또한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주기도문의 서두에 이같이 사실이 분명히 나타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만이 임하기 원하는, 하나님을 위한 찬양, 영광, 송영.. 이것이 바로 기도의 본질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칼빈 신학에 의하여 정위(定位)되어 있는 “기도”는 본질상, 우리 기도자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열심히 관철시키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뜻하시고 약속하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질(성취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일 뿐임을 보게 된다. 실로, 우리 기도자는 우리의 최고의 소원이 곧 “하나님의 뜻”자체가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올바른 기도를 드리지는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빌 4:6-7)에서5)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 모든 우수사려마저도 모두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동시에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반드시 인간을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는 본질상 “모든 사건을 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하나님 신앙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송영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입니다 기도의 깊은 차원에 들어가면 기도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요 송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뜻, 나의 의지, 나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나의 기도가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열망,
그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 죤 뉴톤(John Newton)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단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여러분은 이 단 하나의 기회로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리고는 스스로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단 하나의 선택의 권한을 주신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 주실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내가 무엇이 필요한 가를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내가 나를 아는 것 이상으로 내 미래를 아시고, 내가 내 미래를 완벽하게 계획하는 것 이상으로 내 미래를 완벽하게 계획하며 섭리하시는 분은 한 분 뿐이심을 알기에, 그 단 하나의 선택을 하나님께 맡기어 하나님의 뜻이 내 생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는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구분하는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기도한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을 배운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다.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릴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요한 4장 23절 -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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