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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柳寬順) 1902. 3. 15~1920. 10. 12 충청남도 천안(天安)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갈전면(葛田面, 現 竝川面) 아우내(竝川)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녀는 1916년 기독교 감리교(基督敎 監理敎) 충청도 교구(忠淸道敎區) 본부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宣敎師)의 주선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고등과(高等科) 1학년 3학기 때에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3월 5일 남대문(南大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그녀는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돌아 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과 김구응(金球應)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두 계열에서 계획되었는데, 그 하나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 등의 수신면(修身面)민과 이백하(李柏夏)・김상철(金相喆)로 대표하는 성남면(城南面)・갈전면들이고, 하나는 동면(東面)의 유관순・조인원・조병호(趙炳鎬)・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 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와 갈전면의 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이다. 이 두계열의 주동자가 서로 연락을 취하여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31일 자정을 기하여 다음날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는 봉화를 요소마다 올렸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원군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시위군중의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그녀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시위대열에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그녀는 시위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 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 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고, 일부 흥분한 청년들은 파견소의 뒤로 돌아가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내로 들어가 숨어 버렸고, 시위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없이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 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울 끝까지 추격하면서 발포하고 칼로 찔러 쓰러뜨렸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오후 4시경, 그녀는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김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小山)과 헌병 상등병 주곡(湊谷) 등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그녀는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으니, 그녀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가 아닌 이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경성(京城) 복심법원에서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그녀는 옥중에서도 이윤희(李允姬)・박인덕(朴仁德)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조그만한 땅덩어리에서 배불리 먹고 등 따스하게 지냄에 있어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으나 바쁜 세상사에 모두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삼일절을 맞이하여 빼앗긴 조국을 찾고자 목숨바쳐 싸운 선열들의 순고한 정신을
조금이나마 돼새겨 보고자 합니다.
ㅇ 천안역에서 버스로 단체로 출발하니 매봉교회부터 둘러봅니다.
짧은 인생에 집은 불타버리고 부모님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총맞아 돌아가셨기에
자료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매봉교회에서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소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ㅇ 다음번엔 꼼꼼히 살펴볼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아야겠네요.
끔직했던 90여년전 형무소가 잘 보관되어 있는 서대문 형무소도 꼭 둘러보았으면 합니다.
ㅇ 옆에 있는 생가도 둘러보고 단체사진 찍고 아우내 장터로 이동합니다.
ㅇ 구미산에 있는 기념비(1947년도 건립)도 돌아보고 유관순기념관으로 걸어갑니다.
ㅇ 10시에 만나 매봉교회와 생가, 기념비를 둘러보고 병천순대로 식사하니 3월 1일이네요.
이제부터 산행길 오릅니다.
ㅇ 6토막 난 유관순 열사의 시체를 오빠와 이화학당에서 수습하여 이태원에 안장하였으나
비행장 건설로 미아리로 이전하면서 유실.... 초혼묘가 대신하는 아따까움이 있습니다.
ㅇ 보리밭을 지나면서 아카시아 나무가 등로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설명절을 이용 천안백호님이 말끔히 등로를 정비하여 편히 올랐네요.
ㅇ 출발할때 따뜻했던 날씨가 밤새 눈도 내리고 추위를 느끼게 합니다.
만뢰산 내려오면서 빙판에서 엉덩방아도 찍고
클린턴대통령님은 연신 미끌어집니다.
ㅇ 작년엔 이곳에서 태극기도 얻어 사진도 찍었는데 날씨가 싸늘해서 그런지 등산객은 별로 없네요.
ㅇ 밤새 내린 눈이 바지가랑이에 달라 붙더니만 모두들 바지꼴이 말이 아닙니다.
ㅇ 독립운동 기념산길을 걸으며 천안 12경중 2경 3경 5경을 구경하는 행운도 덤으로 얻네요.
ㅇ 보이죠 말짱황님
어제 정맥길 다녀와 오늘 머리올리러 왔다는데... 줄곳 앞에서 남들 기죽이러 온듯하나
파도님만 살판 낫네요. 오늘 산길중 말짱황!를 몇번을 외쳤댓는지!!!
ㅇ 두시에 에어쇼 구경한다고 왔는데... 한시간 빨리 도착하였네요.
날씨는 춥고 마땅히 쉴곳이 없어 따뜻한곳 찾아 내려갑니다.
ㅇ 전망좋은 곳에서 쉬다가 중간그룹은 만났는데 후미의 만사성대장님이 이끄는 팀
(멀리서 오신분) 흑성산 올라오고 있어 에어쇼 구경시켜 줄려고 세시로 연기시켜 놓고
독립기념관에서 구경하기로 하고 내려갑니다.
ㅇ 추모의 자리에서 황금상 지부장이하 묵념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주는 멋진 아줌씨가
있었네요.
ㅇ 이렇게 사진까지 찍어주시고 전송해 줘 넘 감사드립니다.
ㅇ 이제 에어쇼 구경하러 갑니다.
ㅇ 예전보다 몇배 많은 인원들이 웅집해 있습니다.
뱅기를 잘 불러다고 생각듭니다.
ㅇ 에어쇼가 펼쳐집니다.
ㅇ 모두 8대인데 한대 이상하죠.
중부지부 장삼이사님이 조종하느냐고 산길엔 함께하지 못하였다고 소식 전해와 전달합니다.
ㅇ 겨레의 탑에서 단체사진 찍어야 되는데...
저 많은 인파들이 몰려 오는바람에 우리팀 찾기도 어렵고...
천안역 깊숙한 곳에서 오늘의 산행 뒤풀이 찐하게 하고 마무리합니다.
ㅇ 독립운동 기념산길 찾아준 회원님들 감사드립니다.
3월1일 독립운동 기념산길은 해마다 쭉~ 이어지니 참석 못한 회원님들
꼭 한번쯤은 참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지만 학생의 몸으로 몸숨바친 유관순 열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은 잊어서는 안되죠,
언젠가 함께 할 날 기대해봅니다.
벌써 3차 인가요?
한번은 참석해야 하는데 일이 여의치 않군요.
내년에는 꼭 함께 해야 하는데....
대간하시느라 지부산행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한번 빼먹었는데도 3회차네요. 길도 넘 좋으니 내년엔 꼭 함께하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