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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4년 8월 15일(금)
장소 : 석남사. 언양지석묘. 언양읍성. 원원사지. 원성왕릉. 성덕왕릉. 경상도 개도(開道) 700주년 특별전(경주박물관)
반월당(08:00출발) - (87.5km.1시간40분) - 석남사(09:40 도착. 관람 1시간 30분. 11:10 출발) - (9.6km. 20분) - 언양지석묘(11:30 도착. 관람 20분. 11:50 출발) - (1.4km. 5분) - 언양읍성(11:55 도착. 관람 20분.12:15 출발) - (35.9km. 1시간. 점심1시간) - 원원사지(2:15 도착. 관람 45분. 3:00 출발) -(12.2km. 20분) - 원성왕릉(3:20 도착. 관람 30분. 3:50 출발) - (5.1km. 10분) - 성덕왕릉(4:00 도착. 관람 40분. 4:40 출발) - (7.3km. 13분) - 경주박물관(4:53 도착. 관람 2시간 6:53 출발) - (71.7km. 1시간) - 반월당(7:53 도착)
** 위의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도 있습니다.
** 신청 :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팀장(이창석교장선생님)에게
석남사(石南寺)
위치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석남로 557번지
석남사는 불자들에게는 국내외 가장 큰 규모의 비구니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울산사람들에게는 늘 열려있는 휴식처로서 늘 푸르른 산림과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제공하며 한겨울에는 가지산의 설경과 어울려 가람을 하얗게 덮은 눈은 우리들에게 절경을 보여줍니다.
석남사(石南寺)는 가지산(迦智山)동쪽 기슭,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위치한 절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입니다.
고헌산맥은 저 멀리 강원도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뻗으면서 줄달음질을 치다가 도중에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산을 형성한 뒤 다시 뻗으면서 형성되는데,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천황산, 영취산 등의 영산 명봉들을 이루어 놓고 있습니다.
가지산에는 석남사, 신불산에는 간월사, 영취산에는 통도사 등의 신라 명찰이 들어앉게 되었으니 불심과 영통한 법운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남사(石南寺)란 이름은 가지산(迦智山)을 석면산(石眼山)이라고 하는데 이 산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헌덕왕(신라 제41대 憲德王 서기809-826)에 한국에 최초로 선을 도입한 도의국사 (道義國師)가 일찍이 영산 명지를 찾다가 이곳 가지산의 법운지를 발견하고 터를 정한 뒤, 신라의 호국을 염원기도하기 위해 창건하셨습니다.
도의국사는 신라 제 27대 선덕왕 1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지장의 제자가 되어 그 불법을 물려받고 법호를 도의라고 개명한 뒤 821년에 신라로 금의환향하여 최초로 선문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남종선의 시조가 되었으나 고국에서는 아직 그의 혁신 이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제자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다가 3년 만에 석남사를 창건하고 가지산파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극락전 · 강선당(講禪堂) · 조사전(祖師殿) · 심검당(尋劍堂) 등 30여 동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건물로 1791년(정조 15년)에 세운 극락전이 있으며 다음 가는 건축물로는 순조 3년에 세운 대웅전입니다.
이 외에도 문화재로 도의국사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369호 석남사 부도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의 엄나무구유 · 돌구유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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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석남사 승탑(蔚州 石南寺 僧塔.보물 제369호.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산232-2번지 석남사)
석남사 동북쪽 언덕의 넓은 대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일찍부터 석남사를 세운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불려왔다.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8각의 바닥돌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탑신(塔身)을 놓은 모습이다.
기단부의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사자와 구름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에는 상·하·좌·우에서 안쪽을 향하여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겼고, 그 안으로 꽃모양의 띠를 둘렀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얇게 새겼고,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그 중 앞면에만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문의 양 옆으로 신장입상(神將立像)이 배치되어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짧고 서까래와 기왓골이 상세히 표현되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얹혀 있다.
전체적으로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부재로 구성되어 길쭉해 보이며, 바닥 돌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래받침돌의 구름무늬나 탑신의 신장상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특히 가운데받침돌의 안상조각에서 시대가 내려옴을 볼 수 있으나 각 부분이 완전히 보존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기단부의 가운데받침돌에서 사리장치를 두었던 공간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남은 것이 없었다.
석남사삼층석탑(石南寺三層石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 울산 울주군 상북면 석남로 557(덕현리))
석남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절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을 창건한 도의국사가 호국의 염원으로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형태는 2층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위층 기단과 탑신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고,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아담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석탑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석남사수조(石南寺水槽.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 울산 울주군 상북면 석남로 557(덕현리))
석남사 내에 남아 있는 수조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는 곳이다. 석남사는 통일신라 현덕왕 16년(824) 도의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지금은 비구니의 수도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조는 일반적인 사각형의 형태와는 다르게 사각의 각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모습이며,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각 면을 잘 다듬은 세련된 수법을 보이고 있어, 고려 말·조선 초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는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는데, 지금도 물을 담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석남사에서 본 꽃
석남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 아래에 핀 흰겹도라지
(학명 : Platycodon grandiflorum var. duplex for. leucanthum H.Hara. 분포 :아시아. 서식 : 산지. 크기 : 40cm-1.0m)
능소화
맥문동
언양지석묘(彦陽支石墓.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호. 울산 울주군 언양읍 서부리 232-1번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울산광역시 언양읍 서부리에 있는 이 고인돌은 규모로 보아 경상남도 최대의 바둑판식 고인돌이며 길이 8.5m, 너비 5.3m의 덮개돌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6매로 된 받침돌의 높이는 2.8m∼3.1m 정도로 거대한 편이다.
서부리 주민들은 이 고인돌을 ‘용바우’라고 부르며, 민속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정성을 드렸다고 한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하의 묘실 형태나 출토 유물은 알 수 없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덮개돌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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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언양읍성(蔚州 彦陽邑城. 사적 제153호. 울산 울주군 언양읍 서부리)
예부터 경주·울산·밀양·양산과의 교통 중심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옛 언양 고을의 읍성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처음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던 것을 연산군 6년(1500)에 현감 이담룡이 확장하여 돌로 다시 쌓았다. 평지에 네모꼴로 만들어진 보기 드문 평지성으로, 원래는 둘레가 약 1,000m, 높이가 4m나 되었으며 성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성을 쌓았던 큰 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 축조의 일반적인 방식이 반영되었다. 큰 돌을 대충 갈아 쌓은 후 빈 공간에 잔돌을 채워 성벽을 튼튼하게 하였다.
언양읍성은 전국의 중요 읍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14∼15세기의 축조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나타나는 축성법 변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경주 원원사지(慶州 遠願寺址.사적 제46호.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2번지)
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원원사는 밀교의 후계자들인 안혜·낭융 들과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들이 뜻을 모아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절터에는 금당이 있던 자리와 2기의 3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가 남아 있다. 탑은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규모와 형태가 거의 같으며 일제시대에 복원된 것이다. 탑에는 12지신상과 사천왕상을 새겨놓았는데, 그 수준이 매우 높아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우수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두 석탑 사이에는 석등이 있고 4기의 부도가 동쪽과 서쪽 계곡에 나누어져 있으며 모두 고려시대 이후 것으로 보인다.
원원사는 명랑법사가 세운 사천왕사·금광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전기까지 밀교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고 조선 후기까지 명맥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탑의 조각수준으로 보아 당시 품격있는 절이었음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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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원사지 동ㆍ서 삼층석탑(慶州 遠願寺址 東ㆍ西 三層石塔.보물 제1429호.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산12-3번지)
동·서 쌍탑의 경주원원사지삼층석탑은 사적 제46호 경주원원사지 안에 있다. 원원사(遠願寺)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밀교(密敎)를 계승한 안혜(安惠)ㆍ낭융(朗融) 등이 김유신ㆍ김의원ㆍ김술종 등과 뜻을 모아 호국의 사찰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동ㆍ서 삼층석탑(높이 약 7m)은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31년 가을〔조선건축사론 중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일반형 삼층석탑론(건축잡지 1933.11월호. 藤島亥治郞)〕에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복원하였다.
두 탑은 같은 구조와 양식으로 조성된 2중 기단의 삼층석탑이며, 하층기단 면석과 갑석 및 상층기단 면석은 각각 8매, 상층기단 갑석은 4매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층기단의 면석에는 2개의 탱주와 우주가 있고, 하층갑석의 상면에는 2단의 상층 기단 괴임이 있으며, 상층갑석 4면의 각 기둥 사이에는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십이지상을 조각하였는데 이들의 머리는 짐승이나, 몸체는 평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며 옷자락이 하늘로 날리고 있는 형상이다.
1층 탑신석 이상 3층 옥개석까지는 모두 1매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1층 탑신에는 우주가 있고, 4면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각 층 옥개석의 하면에는 5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 괴임이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석과 앙화석이 남아 있다.
경주원원사지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일반적 표현형식, 옥개석의 돌다듬기 수법, 기단부와 탑신부에 구현된 양식, 석재의 조립방법 등으로 보아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하층기단에서 십이지상을 최초로 배치한 점 등 석탑의 조각기술, 구조적 특징, 표현양식 등을 고려할 때 학술적, 미술사적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주 원성왕릉(慶州 元聖王陵. 사적 제26호.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 산17번지)
괘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 쌍·문인석 한 쌍·무인석 한 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 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 이라는 주장도 있다.
괘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이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경주괘릉 → 경주 원성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일괄(慶州 元聖王陵 石像 및 石柱一括. 보물 제1427호.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611-4)
사적 제26호 경주 원성왕릉을 중심으로 좌·우 입구에 한 쌍씩 석조상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수량은 문·무인 4점, 사자상 4점, 석주 2점으로 총 10점이다.
무인상은 서역인 또는 서역풍을 나타내고 있어서 동서문화의 교류적 측면에서 크게 중시되고 있는 자료이며, 통일신라시대 절정기의 사실적인 조각인 성덕대왕 능 석인상을 계승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된 상이다.
또한 이들 문·무인상들은 흥덕대왕 능의 석상들보다 앞선 생동감을 갖고 있고 역동적인 사실성을 나타낸 대표적인 조각품으로 신라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울러 8세기의 이상적 사실 조각과 함께 당대의 찬란한 신라 문화의 진수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경주 성덕왕릉(慶州 聖德王陵.사적 제28호.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8)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능은 밑둘레 46m 높이5m이다. 무덤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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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릉귀부(聖德王陵龜趺.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6호. 경북 경주시 조양동 666)
통일신라 성덕왕(재위 702∼737)의 능 앞에 세웠던 비석의 받침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는 원래는 비몸과 그 위에 머릿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이 받침돌만 남아 있다. 받침의 거북은 목이 부러졌으며, 앞·뒷발에는 발톱을 새겨 놓았다. 등에는 6각형 무늬를 새겼으며, 중앙에 비몸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파여 있다. 거북의 등에 새긴 무늬나 다른 덩굴무늬를 통해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비록 비몸과 머릿돌이 없어졌으나 왕릉을 만들 때 이용된 거북받침돌의 제작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문화재청 자료)
경상도 개도 700주년 기념 특별전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과 상주박물관(관장 전옥연)은 경상도慶尙道 개도開道 7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경상북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특별전‘경상북도, 1314~1896’을 개최합니다.
2014년은 경상도慶尙道라는 도명道名이 사용된 지 7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경상도라는 도명의 유래지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과 상주박물관은 이 해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특별전을 공동 기획하였습니다.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경상도 지역은 분지 속의 분지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지정학적 특성을 지닌 곳입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았던 경상도 사람들은 과거부터 다른 지역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신라가 그러했고,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의 경상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에는‘동경東京’이라 불리면서 독자적인 위상을 유지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조선인재朝鮮人才 반재영남半在嶺南’이라 기록될 정도로 성리학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특히 경상북도 지역은 경상도라는 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 이래 경상좌도(낙동강의 동쪽)와 경상우도(낙동강의 서쪽)를 대표하는 고을이 위치해 있었던 곳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과 상주박물관은 이 점에 주목하여 도道의 이름이 정해진 1314년부터 남․북도로 분리된 1896년까지의 시기 동안, 경상북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삶을 재조명해 보려 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환경, 인물, 사건, 이야기 등 경상북도 사람들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는 문화재 170여 점이 선보입니다. <경상도의 등장>, <경상 감영 Ⅰ기(경주, 상주 시기)>, <경상 감영 Ⅱ기(성주, 달성, 안동 시기)>, <경상 감영 Ⅲ기(대구 시기)> 등 모두 4개의 주제로 나뉘어 전시됩니다.
특히 <조선고지도(보물 제1538호)>, <이의성필 하외도>,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쓴 <임난일기(보물 제1003호)>, <정선의 내연삼용추도>, <이색 초상>, <정몽주 초상>, <정경세 금관> 등은 눈여겨 볼 만합니다.
이번 전시가 경상북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정서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가 되길 기대합니다.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 2014년 7월 22일부터 9월 14일
(상주박물관) : 2014년 10월 21일부터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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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전 탐방 잘 했습니다 고밉습니다 건강하세요 더운여름
예습 잘 했습니다
공부 다 한 기분이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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