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부사공파(副使公派)는 파조(派祖)이신 부사공(副使公 ?, 1世)이하 2세 규정공(糾正公, 時玉)과 3세 서령공(署令公, 守明)까지는 그 생졸년(生卒年)과 어디서 사시었는지 사적(史蹟)이 전하지 아니하여 알수가 없으며 4세이신 사간공(司諫公, 卜麟)께서 처음으로 진주로 낙향(落鄕)하신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지만 그 정확한 연대(年代)는 알 수가 없다. 대개는 태종(太宗)때 정승을 지낸 하윤(河崙)의 권고로 만년에 그의 고향인 진주로 함께 낙향하신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늘날 합리적인 추측에 불과할 뿐 사실이 아니다. 그 증거로는 조선왕조실록 태종조 제26권 태종 13년(1413) 12월 27일조를 보면 「좌사간(左司諫) 최복린(崔卜麟)을 검교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삼았다. (중략)
최복린(崔卜麟)은 바로 하윤(河崙)의 동향인이었는데. 그가 사간이 된 것도 하윤(河崙)이 천거한 것이었다. (후략)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사간공께서 진주로 낙향하신 시기는 관직에서 마지막으로 물러나신 뒤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앞선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왕조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새로 일어난 1392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
|
사간공께서 문과(文科: 進壯)에 오르신 해(1374, 공민왕23)보다 9년 앞선 1365년(공민왕 14)에 과거(文科)에 오른 하윤(河崙)이 1388년(공민왕 14,당시 河崙은 僉書密直司事였음) 최영(崔瑩)장군의 요동정벌정책(遼東征伐政策)을 적극 반대하여 귀양갔다가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이은 역성혁명으로 풀려나 잠시 고향인 진주(晋州)에 머물렀을 때, 사간공께서 친분을 맺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하윤(河崙)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곧 경기좌우도관찰사로 기용되어 한양으로 올라간 뒤 승승장구하여 영의정(領議政)까지 지낸 인물인데, 사간공께서는 그 무렵 진주에서 한양으로 하대감(河大監: 河崙)을 찾아 올라가신 듯싶다. 어쨌든 사간공께서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같이 검교 공조참의로 전임되신 뒤 곧 진주로 귀향하신 것으로 밝혀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진주 누정조(晋州 樓亭條)에 보면 촉석루(矗石樓)에 대한 하윤(河崙)의 기문(記文)가운데「....(전략) 고을의 부로(父老)인 전판사(前判事) 강순(姜順)과 전사간 최복린(崔卜麟)등이 의논하기를 “용두사(龍頭寺)는 이 고을(邑)을 설치할 때에 함께 된 것이고 촉석루(矗石樓)는 이 지방의 빼어난 경치였는데 황폐한지 오래 되었으나 다시 새롭게 하지 못함은 우리고을 사람들의 책임이다”하고 이에 각자 재물을 추렴하여 이 고을 중으로서 용두사 주지인 단영(端永)에게 그일을 주간(主幹)하게 하였다.
1413년(太宗13)에 판목사(判牧使) 권공충(權公衷)이 판관 박시결(朴施潔)과 함께 부로(父老)들의 말을 채납하여 (중략) 높은 누(樓)가 비로서 새로워져서 훌륭한 경치가 예전과 같았다. 내 이미 인심세도(人心世道)로서 기쁘기 그지없고 또 부로들의 갸륵한 뜻에 대하여 큰 감명을 받았다. .... (중략) 그런즉 부로들이 간절히 마음써서 이 누(樓)를 부흥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나도 치사(致仕)한 날이 이미 가까우니 필마(匹馬)로 시골에 돌아와서 여러 부로들과 함께 좋은 시절 좋은 날에 이누에 올라 술잔을 들며 시(詩)를 읊조려 즐거운 바를 함께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니 부로들은 기다릴지어다.」 한 내용으로 보아 이때 사간공께서는 이미 진주에 귀향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윤(河崙)은 1398년(定宗 즉위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1399년에 우의정, 1400년(太宗 즉위년)에 좌의정, 1402년(太宗 2) 壬午에 56세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1414년(太宗 14)에는 영의정부사가 되어 1416년(太宗 16) 나이 70세에 치사(致仕)하였는데. 선왕(先王)의 능침순심(陵寢巡審)의 왕명을 띄고 함길도(咸吉道)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사간공과는 다시 만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사간공께서는 결국 1392년경에 진주로 낙향하셨다가 1400년경에 한양(漢陽)으로 하윤(河崙)을 찾아 올라오신 듯하며 1413년(太宗 13)에 검교 공조참의로 전임되면서 진주로 귀향하신 것이 확실하다고 보겠다. (檢校: 검교는 정원 외에 임시 증원한 경우, 실지로 근무는 하지 않고 명예직으로 직함만 가지고 있게 하는 경우에 관직 앞에 붙여 불렀음) |
|
|
부사공파의 파조(派祖: 1世)로서 고려 후기 함경전 부사를 지냈으며 배위는 낙랑김씨로 검교 군기감을 지낸 김수표(金受豹)의 따님이다. |
|
|
부사공파 2세로서 승봉랑(承奉郞)과 사헌부 규정(司憲府 糾正)을 지냈으며 배위는 초계정씨로 신호위 녹사 참군(神號衛 錄事 參軍)을 지낸 정경(鄭瓊)의 따님이다. |
|
|
부사공파 3세로서 승봉랑과 사설서령(司設署令)을 지냈으며 배위는 진강정씨로서 전객시(典客寺) 판사(判事)를 지낸 정자권(鄭子權)의 따님이다. ※ 이상 부사공파의 1,2,3세조는 묘를 실전하여 사간공 제각인 영사재(永思齋)에 제단(祭壇)을 설단(設壇)하였다. |
|
|
고려말 공민왕23년(1374)에 갑인년방(甲寅年榜)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직장(直長: 종7품), 좌랑(佐郞: 정6품)등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정3품)을 역임하고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다. 사간공은 고려가 망하자 멀리 진주(晋州)까지 낙향하였으며 풍광이 아름다운 남강 가에 이미 여말에 없어진 촉석루를 전판사 강순(姜順)등과 함께 사재를 모아 크게 중창하였으며 호정(浩亭) 하륜이 그 사실을 찬미한 누기(樓記)와 함께 오늘날까지 관광명소로 보존되고 있다.
묘는 진주 조동(晋州 槽洞)에 간좌(艮坐)로 예장(禮葬)하였고 14세손 병묵(秉?)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배위 숙부인 사천강씨는 전객령(典客令) 강득봉(姜得封)의 따님이며 독자로 지평공 도원(道源)을 두었다. |
|
|
고려말 공민왕 22년(1373)에 사간공의 독자로 태어나 일찍이 진사(進士)가 되고 천유일(薦遺逸)로 사헌부 지평(정5품)이 되었으며, 4개군의 군수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명성이 자자하게 치적을 남겼다. 부사공파 5세인 공의 묘는 진주시 상대동 선학재(仙鶴峙)에 계좌(癸坐)로 있으며 묘갈명은 집현전 응교(應敎, 정4품) 정이창(鄭以昌)이 짓고 또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가 지었다.
배위는 숙인(淑人) 서흥김씨로서 판서 운관사 선보(判書 雲觀寺 善保)의 따님이며 4남2녀를 두었다. 1자 경부(景溥): 교 도〔교도공파 派祖〕 2자 경연(景淵): 부사정〔사 천 파 派祖〕 3자 경천(景泉): 부사정〔진 주 파 派祖〕 4자 경시(景時): 현 감〔현감공파 派祖〕 1녀 변효문(卞孝文): 직제학, 초계인 2녀 곽비(郭庇): 녹사 |
|
|
교도공은 지평공 도원(道源)의 장자로 태어나서 자는 겸보(謙甫)로 세종5년(1423) 생원시에 급제하여 용인교도(龍仁敎導)를 지내시고 단종2년(1454)에 졸하였으며 묘는 양성군 소곳면 수랑교 건좌에 있으며 묘비가 있다. 배위숙인 연안김씨는 예빈사윤(禮賓寺尹) 치지(致知)의 따님으로 묘는 공묘의 동쪽기슭 건좌(乾坐)에 있다. |
|
|
별시위부사정공의 증조 수명(守明)은 사설서령(司設署令)이고 조부 복린(卜麟)은 대사간(大司諫)이며 아버지 도원(道源)은 사헌부 지평(持平)이고 어머니는 숙부인 서흥 김시(淑夫人 瑞興金氏)이며 아들 자문(自雯)은 충순위(忠順衛)로 사천(泗川)에 시거(始居)하였는데 보책(譜冊)을 상고하여보니 공의 사적이 관직뿐이고 생졸년과 행장이 전무하다.
옛어른들의 전언에 의하면 공은 조선초기에 진주에 사시다가 진위(振威)에 살고계신 큰형님 교도공(敎導公 景溥)의 문병을 가시었다가 돌아가시어 그곳 송탄면 서정리 수랑교 해좌(亥坐)에 장례하고 배위 숙인 영가권씨(永嘉權氏)를 합폄한지 500여년이 지나면서 자손들이 면면히 이어가며 선산에 진력하여 세제를 받들어 왔으나 세상이 변하고 도와 예가 쇠하여 혹수호에 태만할까 두려워한 끝에 이장론이 일어서 의론을 정하고 壬申年(1992) 8월 21일에 사천시 정동면 풍정리 저전산 간좌(艮坐)로 면례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자손들이 송구하여 주저한 것은 오직 취토장을 염려해서인데 뜻밖에도 양위분의 체백(體魄)이 강녕하게 보전되었음으로 이에 자손들은 옛날을 추사(追思)하며 슬퍼하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공께서 형님 생각하는 정(情)에 못이겨 천리먼길을 달려가 문후하고 홀연히 득병하여 형님댁에서 돌아가시어 묘소(墓所)가 그곳에 위치함은 이치에 맞거니와 숙인(淑人)의 합폄은 소연하지 못하니 혹 분상걸음에 그곳에서 돌아가신 것일까? 지평공과 교도공과 군수공 3세의 생졸년을 상고하면 공의 연세는 50내외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하면 이때에 지평공의 학문과 덕망이 영중에 유명하였으니 공은 마땅히 시예(詩禮)와 문자에 조예가 깊었을것이 분명하다. 만약 공께서 수(壽)를 누렸다면 세상에 중용되어 시혜했을 것이나 그만 중도에서 하세하시니 참으로 차탄할 일이다.
| |
부사정공은 지평공 도원(道源)의 셋째아들로 태어나서 자는 대재(大哉)로 별시위 부사정을 지내시고 졸하여 진주 동산 지동 간좌(艮坐)에 있으며 묘비가 있다. 배위숙인 곡산우씨는 현감 정(定)의 따님으로 묘는 합부하였다. |
|
|
현감공은 지평공 도원의 넷째 아들로 세종2년(1420)에 태어나서 하양현감을 지내시고 성종21년(1490)에 졸하였으며, 배위숙인 성주이씨는 통덕랑 개(?)의 따님으로 세종4년(1422)에 태어나서 연산군1년(1495)에 졸하였는데 묘를 진주동쪽 금산 동사곡에 모시었는데 실전하여 만경 영모재뒤에 추모각을 세우고 매년 향사를 하고 있다.
|
|
|
사천읍에서 동쪽으로 5리쯤 가면 정동면 풍정동이 있고 여기는 충순위공(忠順衛公, 自雯 7世)께서 처음 사시던 곳이며 그 서남쪽에는 예로부터 큰 숲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첨추공(僉樞公 斗南 11世)께서 당시 겨우 12세의 어린나이로 그의 아버지인 참봉공(振寧)을 모시고 그 숲속에 숨어서 피난을 하던중, 하루는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가 왜적에게 붙잡혀 선진성(船津城)까지 끌려갔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자 왜적도 감복하였으며 이윽고 밤이 깊어 술에 취한채 깊은 잠에 빠졌을 때 기지로 칼을 빼앗아 왜적 파수병을 죽이고 탈출하여 숲속으로 돌아와 보니 참봉공은 그동안 며칠을 굶었으므로 탈진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는지라 첨추공이 지성으로 받들고 봉양하여 마침내 깨어났다는 효성어린 일화가 전하고 있다. |
|
|
사천읍 동쪽에 니구산(尼邱山)이 있어 산기(山氣)가 매우 수려한데. 첨추공(斗南, 11世)께서 부인 정씨와 함께 그 산에 단을 쌓고 샘을 판뒤 성심으로 기도한 끝에 아들만 6형제를 연달아 얻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단과 샘이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 이리하여 사천6파가 갈렸고 그 자손이 퍼져 크게 번성하였다. |
|
|
진주에서 북쪽으로 20리쯤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사죽리 관동은 고려시대의 읍기(邑基)였는데 바로 사정공(司正公 彦亮, 10世)께서 아들인 참봉공(衡晋)과 창의하여 진주성을 지키다가 부자가 함께 순절하였기 때문에 창렬사(彰烈祠)에 향사(享祀)되었으며 세상에서는 그곳을 두 충신이 난 옛터라 하여 쌍충고기라 일컬어 온바, 지금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
|
|
함의재선생의 휘는 관(瓘)이고 자는 화서(和瑞) 호는 함의재(涵義齋)로 숙종42년(병신1716)에 극히 간구하고 담박한 예를 갖춘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또한, 공의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함에도 어릴 적부터 학문에 심취하고 사례(四禮)에 의거 예의범절이 깍듯하고 어른들을 공경함에 소홀함이 없었으니 주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공은 조선조 중엽 퇴계선생과 이정선생(號 龜岩)의 학덕을 깊이 연모하고 두 선생의 현기론과 사례로부터 심덕을 전수받은 연유로 인근일대에서는 평판이 높은 유학자로서 함의제 최선생이라 불리어졌고 ‘사례요의’란 일편을 편술하셨는데 사례가 길흉상변(吉凶相變)요점과 예학을 근본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 및 동현논설(東賢論說)의 절목의 요점을 나누어 합쳐 한편의 ‘사례요의’로 집성한 것인데 지금은 유문과 함께 소실되어 애석불금할 따름이며, 최근 새로 발간된 사천시사(泗川市史)에는 ‘함의재실은 조선조 말엽 최관선생의 강학지소’라고 소개되고 있다.
공의 배위는 동성이씨이며 이구암선생(諱 李楨)의 육대손서이시다. 퇴계선생과 이정선생은 호형호제를 나누는 학문적 동지이고, 숙종 때 사액받은 서원이 구계서원이며 대관대라는 곳이다.(현 사천구암소재) 퇴계선생은 구계서원에 오셔서 종종 오래 머무시면서 이정선생과 친구의 정을 돈독히 나누셨는데 함의재공은 그런 사유로 구계서원을 계승발전시키고자 무던히도 애쓰셨고 고종 5년에 서원이 철폐된 후 복원될 때에는 공의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많은 재물과 열과 성을 바쳐 재건하였다. 공은 또한 사천구암의 삭녕최씨의 입향조(入鄕祖)이시며 서부경남에서는 사천최씨의 대명사로 알려질 정도였다.
공의 입구암 이후로 자손의 번창함이 날로 더해서 실로 사천에서는 구전속담에 ‘동으로 가도 삭녕최씨, 서로가도 삭녕최씨 판이다’라고 진담반 농담반으로 화제가 되었있음은 자손많고 인물많다는 애기로 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공은 사후에 학문실행과 고매한 윤도(倫道)의 사상이 높았다하여 1912년 구계서원을 중건할 때 공을 기리기 위해 당대의 거유(巨儒)이신 정만조(鄭萬朝: 가선대부 규장각 제학) 선생께서 ‘함의재공을 이정선생과 함께 배향함이 관련유생과 문하생들을 위하고 여론에 부응할 것이며 공도 함께 배향함이 가하다’고 인지하고 구계서원 중건 추배기실비 비문을 남겨주셨다. 작금도 봄철에 사천구암의 대관대 구계서원에서는 이정선생과 함의재공의 제향을 전액 사천시 문화재국 예산지원으로 성대하게 올리고 있다. |
|
|
남주공의 휘는 연국(演國) 자는 선중(善仲) 호는 남주(南州)로 고종 23년(병술1886)에 가선대부 장례원 전사 휘 형민(炯敏)과 정부인 동성이씨(東城李氏)의 장남으로 사천 구암에서 태어나셨다.
공의 시조는 고려평장사 휘 천로(天老)이시고 진주 촉석루를 중창찬 휘 복린(卜麟)는 공의 십 칠대조가 되신다. 공은 어릴적부터 품행이 단정하고 명석한 두뇌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십칠세 되던해에 진주관찰사가 주관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해서 만장의 선비들을 놀라게 하였다. 곧 체신사 주사가 되었고 스무살 때는 조선왕조의 통훈대부로 승진하는 영광을 입었다.
공은 경술국치를 당하여 관로에는 뜻을 접고 낙향하셨으며 혹 권하는 자가 있으면 세상이 예스럽지못하니 나가면 의가 아니라고 하셨으며, 그 후 공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물을 풀어 농민들의 숙원인 천수답을 수리안전답으로 개량하는 수리개발 사업에 몰두하셨다. 공은 실로 그 시대의 선구자로서 미래를 내다보는 깊은 안목이 계셨다. 공이 이루어 놓은 저수지는 (두량저수지, 구룡저수지, 구암저수지) 그 규모면에서도 개인이 만든 저수지로서는 나라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큰 규모였다.
공의 업적을 기리어 각 저수지에는 목리지역의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송덕기념비가 지금도 현존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다. 또한 공은 교육진흥에 열과 성을 다하였으니 많은 일 가운데 몇 예만 들면 1910년에 명달보통학교를 설립하셨고(현 사천초등학교), 1920년에는 일신재단창립발기인이 되어 현재의 진주고등학교의 전신을 만드셨고, 1925년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어 오늘의 진주여고이다. 이러한 교육사업 참여외에도 나병환자를 위한 전국적인 모금을 주도하시기도 하였다. 또한 공은 춘궁기에 수백석의 곡식으로 빈민을 구휼하기를 의무처럼 여기셨고 대원군 서원철폐이후 재정이 열악한 서원과 향교에도 수백석의 재산을 쾌척하시어(구계서원, 사천향교) 중창을 하시었다.
또한, 종중발전과 선산수호에 (경남, 경기) 성력을 다하였다. 공이 참여한 직접사업으로는 도지정 정미소(대단위 정미소) 임자조합, 주일상회, 경남은행, 구암토지 주식회사등을 설립 및 참여하셨다. 공은 많은 일을 하시는 중에도 학문을 놓지 않으시어 시문제술이 20여권이나 되었는데 6.25동란에 모두 불타 없어지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서예는 경지에 이르러 지금도 몇 편 남아있는 작품이 세인을 놀라게도 하였다.
공은 슬하에 삼남 삼녀를 두었고 그자제와 사위들은 현대사에도 족적을 남기는 인물들이 되었다. 공은 1951년 봄 66세로 세상을 뜨시었다. 공의 배위는 숙부인 문화유씨이다. 공의 역사적인 평가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그 시대의 슬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후세의 현명한 판단과 정확한 사료로서 그 업적과 공과를 충분히 논하는게 정도일 것이다. 여기에 현 성균관장이시며 대학교수이신 최근덕(崔根德)님이 쓰신 시한편을 수록한다
맑은 기상(氣像) 밝은 재지(才智) 십칠세에 떨친 문명(文名) 내 몸잊고 쏟은 열성(熱誠) 재물흩어 덕(德)쌓았네 경제진흥(經濟振興) 교육진작(敎育振作) 한결같이 애쓴보람 남을 위한 육십평생 길이 길이 빛 있으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