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빼고 힘빼고

야구에서 흔히 힘빼고 던진다. 힘빼고 스윙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몸이 너무 경직되지 않게 그래서 유연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힘을 몸에 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로 할 때 너무나도 쉬운 이 ‘힘 빼기’가 실전에서는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힘을 자유자재로 뺄 수 있다면 그 선수는 이미 그 종목의 경지에 오른 것’ 이라고 말이다. 볼링을 칠 때도 지나치게 긴장되어 있다. 경직되어 있다는 지적을 하며 코치들이 ‘어이 힘 빼고 힘 빼고…’를 외친다. 또는 레인이 몹시 미끄러울 때 70%의 힘으로 스윙하라는 주문을 듣기도 한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70%의 힘으로만 스윙을 하려고 하면 컨트롤마저 흔들린다. 심지어 PBA 경기를 볼 때도 힘을 빼지 못해 낭패를 보는 선수들을 많이 본다. TV로 보기에도 미끄러운 레인에서 스피드를 줄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페이스를 잃고 무너지는 예를 종종 보게 된다. 4스텝의 강자 파커 본, 기술 볼링의 달인 놈 듀크도 최근 경기에서 이 같은 낭패를 본 바 있다. 한마디로 힘을 주체 못해 망가진 것이다. 뜨거웠던 WBC가 얼마 전 막을 내렸다. 우리 대한민국 선수들이 메이져리그의 드림팀과 오만방자한 일본을 두번이나 무너뜨리고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같은 팀이 세번이나 지긋지긋하게 싸워야 하는 이상 야릇한 대진방식 탓에 두번을 이긴 일본에 단 한번을 지고도 우리는 결승진출에 실패했지만, 스포츠 광인 나는 그 결과와 상관 없이 이번 WBC를 통해 우승 보다 귀중한 결실을 우리 선수들이 얻었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선수들은 소속팀으로 돌아가 긴 시즌을 치르게 될 것이고, 이번 대회의 경험은 이들에게 매우 귀중한 훈련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수확이다. 내가 가장 주목한 선수는 역시 박찬호다. 20대 초반 메이져리그에 홀홀단신 건너 가, 서양의 무지막지한 투수들 보다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강속구를 던지며 타자들을 얼려버리던 그가 이제 30대 초반의 베테랑 선수가 되어 이번 세계대회에 나섰다. 젊은 시절의 그 불 같은 강속구는 이제 많이 그 위력을 잃었고 부상으로 신음한 최근의 성적 탓에 과거 우리가 그에게 기대하던 대표팀 주축 투수로서의 역할은 처음부터 생각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그가 보여준 투구는 놀라움과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구석구석에 컨트롤되는 공, 맞추는데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의 이치로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낼 때 보여준 그 어마어마한 공의 움직임…전성기를 지났다고 평가하기에는 여전히 너무나 위력적인 공을 뿌려댔다. 투구자세도 과거 전성기 때와 달리 무척 부드럽고 무리가 없어 보였다. 공의 빠르기는 전성기 때만 못했지만 그래도 공 끝의 위력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한마디로 ‘힘 빼고’ 던지면서도 위력적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박찬호는 이미 3년 전부터 “힘 빼고’ 던지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최근 2,3년 간 “70~80% 정도의 힘으로 던진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부상으로 예전 같지 않은 허리와 노쇄해 가는 어깨로 과거와 같이 힘으로 밀어 붙이는 투구를 할 수는 없고 그러다보니 밸런스에 의존해 힘을 ‘주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집중’시켜 던지는 방법을 터득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의 노력이 큰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박찬호는, 연습투구 때 너무나 좋던 공이 경기에 나서고 타자만 들어서면 엉망이 된다는 지적을 자주 들었고 그래서 그에게 몇몇 한국인 안티팬들이 지어준 치욕적인 별명이 ‘새가슴’이었다. 메이져리그를 홀로 개적한 선구자요 용감한 대한의 젊은이 박찬호에게 너무 가혹한 비아냥이 아닐 수 없었지만 실제로 그는 이상하리만치 실전에서 그가 가진 위력적인 공을 확실히 보여주지 못했다. 그가 추구하는 ‘힘 빼고 던지기’가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연습 때는 부드럽던 몸이 실전에서 타자만 들어서면 긴장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들어가게 된 때문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힘 빼고' 던지기의 미완성 단계 였던 것이다. 이번 WBC에서 박찬호는 바로 자신이 얘기해 온 ‘70~80% 힘으로 하는 투구’를 완성단계까지 끌어 올렸음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본다. 컨트롤은 놀라울 만큼 정교해졌고 공은 충분히 위력적인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엄청난 움직임을 만들며 포수 미트에 날아가 꽂혔다. 이치로가 휘청대며 삼진을 당할 때, 그의 투구는 베테랑 박찬호의 두번째 전성기를 확신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치로가 누구인가? 야구 방망이를 테니스 라켓 마냥 쓰며 구슬치기 하듯 공을 쳐내는, 그야말로 맞추는 재주 하나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삭 빠른 타자 아닌가? 내게 있어 이치로의 모든 타격은 기습번트의 변형으로 보여진다. 중심을 뒷 다리에 두는 것이 아니라 공을 맞추고 앞으로 튀어나가기 좋은 자세로 타격을 하고, 몸은 스윙과 거의 동시에 이미 1루를 향해 스타트를 끊는다. 그런 이치로가 특유의 번트식 스윙을 하면서도 박찬호의 공을 맞추지 못할 만큼 그 움직임은 타자 입장에서 대책이 없어 보였다. 방망이의 아래 또는 위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끝을 훨씬 벗어날 정도로 횡으로의 움직임이 굉장했다. 이치로의 헛스윙을 유발하던 그 엄청나게 움직이던 공을 나는 내내 잊지 못한다. 개인적으로는 미운 놈에게 그런 창피를 준 박찬호씨에게 고마운 마음이고...(여담이지만 나는 장효조라는 예전 우리의 야구 천재가 몹시 그립다. 그 역시 맞추는 재주에 있어 이치로 보다 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다만 시대를 잘못 타고 났을 뿐...그 역시 오늘날과같은 환경에서 훈련을 하고 누군가의 지도를 받았다면 이치로 못지 않은 교타자로 세계 야구계에서 인정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승엽이 일본전에서 홈런을친 후 ‘감기가 걸려 힘이 빠져있는데 그 상태에서 힘 안들이고 스윙을 하니 오히려 좋은 타구가 나오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주목할만한 언급이다. 이승엽이 멕시코전과 미국전에서까지 연속으로 홈런을 쳐내며 기염을 토한 것은 바로 ‘힘 빼고’하는 스윙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진영과 박진만의 그림 같은 같은 수비, 축구 선수 호나우도의 환상적인 드리블과 슛팅…어느 스포츠의 명장면을 보더라도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의 무리스럽고 딱딱한 느낌은 절대로 갖게 되지 않는다. 볼링 이론가 존 조우디는 ‘로봇이 되지 말라’는 충고를 한다. 자세나 스윙을 딱딱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힘 빼고 치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나도 ‘힘 빼고’ 볼링 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힘 빼고 볼링 칩시다’하고 공허하게 외칠 입장은 아니다. 다만 그 경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자고 우리 회원님들을 독려하고 싶다. ‘힘 빼고’ 볼링 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십시다’ 고 말이다. 출처 - PBA PH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