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운전면허증
“강점순 할머니 드디어 합격이군요.”
번번이 필기시험에서 떨어지시던 강 할머니께서 마침내 합격하셨다.
합격자를 발표하는 순간, 어머님은 우셨다. 교실에 모여 있던 다른 응시자들 사이에서는 함성이 터져 나오고 박수가 쏟아졌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붙은 걸 두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보다 더 난리들이었다. 필기시험 도전 3년 만의 일이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어려서 혼자가 되어버린 어머님은 고모 집에 얹혀서 자랐다. 사실 제천 고래미에서 제일가는 한옥 집과 수천 평에 달하는 논밭이 법적으로 어머님 소유가 분명하였는데도, 어린 소녀로서는 부모님께서 땅을 물려주신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어머님은 눈치꾸러기 부엌데기로 밥상머리에도 제대로 앉지 못하고 모래알 같은 밥을 먹으며 큰 눈에 물기만 가득 담고 자랐을 것이었다. 6.25전쟁을 겪으며 고모부께서 ‘여자가 학교에 가면 무엇하느냐’며 가방이며 책이며 죄다 아궁이에 집어 넣으셨다. 결국 천덕꾸러기 신세로 부엌일만 하다가 16세가 되던 해에 송학면 시곡리 깊은골로 시집을 보내졌다. 그 때로서도 일찍 한 결혼인데다, 시아버지는 오랜 병으로 앓고 계셨으니 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나이 어린 며느리는 병수발이며 논 밭 일을 도맡아 하느라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이 살았다. 사는 게 원래 그런 것인 줄로만 알고 이를 악물고 견디며 하루하루를 황토흙 속에 살이 터져라 뒹굴며 보낸 것이다.
어머니는 18살에 첫딸을 낳고, 20살에 첫아들을 낳으셨다. 득남하였다는 전보 덕분에, 부산 어디엔가 있는 부대의 위병초소에 군복무 중이던 아버지께서는 특별휴가를 나오시기도 했다. 제대하고 돌아온 아버님은 제천지역을 다니며 방송시설 사업을 하시다가, 서울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얼마 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신 어머님은 아버님과 함께 충무로 거리 전봇대 옆에서 드럼통을 놓고 군고구마를 팔기 시작하셨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몇 해 후에 제법 돈을 모아 어엿한 가게를 차렸다. 가게에 딸린 방이나마 등 붙일 곳이 생기자, 부모님께서는 할머니 품에서 자라고 있던 우리를 서울로 불러 올리셨다.
우여곡절 끝에 나름대로 엄청나게 벌었던 돈을 다 까먹고 나자, 어머님에게는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고난의 무게까지 밀려들었다. 평생을 일하며 고생하는 힘든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내 빛바랜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오래된 어머님의 모습이 있다.
강보에 싸인 막내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옷가지 보따리를 이고, 양손에는 껌을 들고 청계천 거리를 다니며 장사하시는 모습이셨다. 중학교 시절에는 ‘포장마차’를 하시며 무허가동네 골방에 사셨고, 고등학교에 가자 새벽 고물상을 다니며 순두부를 파는 ‘순두부리어카’를 끄셨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녀오다가 집 근처 고갯마루 거리에서 마주치는 차창 밖의 어머님은 여름이면 그 순두부리어카에 엎드려 졸고 계셨고 겨울이면 눈보라 속에서 덜덜 떨며 아예 연탄불을 끌어안고 계셨다. 오죽하면 그 시절 아들 녀석은 책상 위에 ‘지금도 어머니께서는 뙤약볕 아래에서 졸고 계신다’, ‘지금도 어머니께서는 겨울바람 속에서 떨고 계신다’는 경구(警句)를 붙여 놓았을까.
대학교에 진학한 아들 자랑을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한 그릇 값에 순두부 두 그릇을 내어 놓았다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고운 여대생과 걸어오는 대학생 아들 녀석을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치자 피하려고 했다는 어머니, 먼발치에서 알아 본 아들 녀석이 달려가 그 여학생과 함께 리어카를 밀며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모습을 뒤에서 보며 공연히 미안해했다는 그런 어머니였다.
데모하는 아들을 잡으러 쫓아다니는 형사들이 찾아와 협박을 해대자 “내 뱃속에 있을 때나 내 자식이지, 다 큰 녀석을 에미가 어찌 마음대로 하겠시유~ 품안에 자식이쥬..”
핑계가 아니라 아들 녀석을 꼭 믿고 있는 터에 그렇게 말문이 트인 것일 것이었다.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세상 어찌 돌아가는지 잘 모른다마는 나는 누구보다도 너를 믿는다.’ 나의 어머님께서 아들에게 해주신 가장 오래되고 가장 소중한 ‘말씀’이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확실하게 도와주고 지켜주는 힘은 ‘믿음’이다. 경제적인 궁핍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가히 ‘절대적인 믿음’ 안에서 풍요로울 수 있었던 그 아들 녀석은 분명 축복받은 행운아였다.
‘자동차면허증을 따보시라’는 아들의 권유에 마지못해 시작한 일이었다.
아들 녀석은 이미 대학교 신입생시절에 면허증을 따서 아르바이트로 렌터카, 자가용기사에 한시택시 기사까지 했으니 말 그대로 운전의 대가였다. 눈, 비 오는 날에도 써금써금한 50CC 스쿠터를 타고 다니시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아들은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한 대 마련하자’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면허시험인데 어머니는 1차 필기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졌던 것이다.
어머니는 6.25 난리 통에 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니다 말았다. 그 때문에 책을 많이 볼 기회가 없어서 글씨를 빨리 읽을 수가 없으셨다. 성경책을 통독하시는데 걸리는 시간도 남들의 서너 배는 더 걸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나중에 보니 정답은 대충 알겠는데 시험문제를 찬찬히 읽다가 보면 시간이 다되어서 답을 채 다 쓰지도 못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 아는 문제인데도 어쩔 수 없이 낙방하기를 수년간 하신 것이 아닌가. 얼마나 한 맺힌 시간들이었을까.
시험장 드나드는 일이 하도 오래되니 면허시험장 접수창구 직원들이나 시험 감독관은 물론이고 같이 시험 보는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이었다. 필기시험합격 발표자 명단에서 자기들은 제쳐두고 제일 먼저 어머님의 번호를 찾아보고 공연히 안쓰러워들 하곤 했다. 한 3년쯤 되자 어머니는 시험지의 첫줄만 읽어도 무슨 문제인지 알만 했고, 정답도 눈에 선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마침내 면허증을 따셨으니, 참으로 끈기와 집념의 세월이었다.
이런 어머니의 운전면허증 덕분에 무시로 병원을 드나들던 아버님의 병수발이 수월해 졌다. 아반떼를 사서 몰고 다니기 시작한 어머님은 방구석에 누워있는 것을 답답해하는 아버님을 태우고 북한산 승가사까지 올라가 서울구경을 시켜드렸고, 때로는 봉양 닷돈으로, 고래미로, 송학 깊은골, 쌍용으로 집안사람들을 만나러 가시기도 했다. 청풍을 돌아 단양팔경까지 돌아보셨다는 어머니는 어느새 운전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손주 녀석들을 태우고 골목골목 태우고 다니며 자랑하기도 하고, 물건을 하러 시장에 가실 때면 부치기를 부쳐가 시장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기를 즐기셨다. 오가며 만나는 동네사람들 태워다 주는 재미까지도 쏠쏠했다.
그 아반떼가 15년이 지나자 교회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앞바퀴에서 심상찮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냉각수를 한통씩 실고 다니며 틈틈이 부어야 했다. 새벽길에 ‘삐걱거리는 차 소리’에 운전하다가도 놀랄 지경이었다.
아들은 어머님께 ‘효성이 지극한 새 차’를 하나 사드리기로 했다. 어머님은 극구 사양하시다가 아반떼보다 작고 싼 경차를 택하셨다. ‘모닝(Morning)’이라는 이름도 좋고 차가 귀엽고 예쁘다고 하셨는데, 기실 어머님은 아들녀석의 여러 가지 형편을 고려하신 것이 분명했다.
새 차가 오던 날, 생애 첫차였던 아반떼를 이 곳 저 곳 쓰다듬던 어머님은 남몰래 눈시울을 붉히셨다. 15년간 하루도 놓지 않았던 정분에 북받쳤을까.
아들 녀석은, 어머님의 생이별을 보는 듯 마음이 저려와 헛헛한 웃음 웃으며 사진기를 찾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