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톡
'연해주'는 한자로 '沿海洲' , 러시아어 '프리모르스키(Primorski)주'를 의역한 것이랍니다. '프리'는 '연안', '모르스키'는 '바다의' 라는 뜻으로, 과연 해안선이 1,350 km 에 달한다고 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 는 [블라디(정복)] + [보스토크(동방)]의 뜻이라네요
한국에서 비행기로 두시간 남짓 거리에 위치한 블라디보스톡. 블라디(vladi:정복하다)+보스톡(vostok:동쪽)이라는 지명 그대로 블라디보스톡은 1860년7월 2일 러시아 극동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된 도시로 1873년에는 러시아의 태평양쪽 주요 항구가 되었고 1880년 4월에 도시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인구 70만에 이르는 이 곳은 오늘날 러시아 극동지방의 중심지가 되기에 이르렀다. 중국, 한국, 일본이 가까운 곳에 위치한 탓에 블라디보스톡은 일찍이부터 무역, 외교, 상업의 중심지로서의 자리매김을 하였다.
1890년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도시는 급진적인 성장을 하였고 전세계의 무역전문가, 자본가와 외교관들은 이 곳으로 몰려들었다. 또한 광활한 러시아 대륙을 잇는 최장의 철도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착역이 건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소연방 시대에 이곳, 블라디보스톡에 극동함대 본부가 자리잡게 되면서 외국인들 뿐만이 아니라 자국민들조차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군사상 보안지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연방이 해체되고 난 후인 1992년 1월에야 이 곳은 다시 개방되었다. 권력의 부재와 정부-지역간의 정치적 갈등 등이 이전의 영화를 되찾는데에 장애로 작용하고 있기는 하나 "동방의 진주"라는 옛칭호에 걸맞는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오늘도 블라디보스톡은 움직이고 있다.
1. 블라디보스톡시 개요
인구 : 약 70만명 면적 : 561㎢ 설립 : 1860년(중·러 조약에 의거, 중국으로부터 할양) 주요산업 : 수산업, 조선업, 군수산업 모스크바와의 거리 : 9,302㎞(비행기로 9시간30분) 한국과의 시차 : 하절기(한국시간+2시간), 동절기(한국시간+1시간) 종교 : 슬라브정교 (국교 : 없음) 언어 : 러시아어 주재총영사관 : 한국(D124), 미국(D004), 일본(D005), 인도(D032), 베트남(D084), 중국총영사관 분관(D090)
* 명예영사관 : 영국, 독일, 호주, 필리핀, 방글라데시, 태국, 아르메니아, 뉴질랜드, 카나다 * 북한(D087)은 나호트카, 중국과 일본은 하바롭스크에 총영사관 주재
러시아어로 "동방을 점령하라"라는 뜻을 담고 있는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나, 이곳에도 러시아의 승리와 비극, 과거와 미래, 자유와 속박의 역사가 표현되어 있음. 오래전부터 러시아에서는 일본 가까이 중국 근처에 자유로운 땅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음. 청수국(淸水國)이라고 불린 그 놀라운 왕국은 평등과 진실한 믿음의 피난처라고 생각되어 왔다. 청수국을 찾는 가운데 러시아인들은 동해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리하여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 제국을 이룬 동쪽의 마지막 지점이 된 것임.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 극동지역의 가장 중요한 공업, 교통, 문화의 중심 도시임. 블라디보스톡은 높고 나지막한 언덕으로 둘러있는 나폴리를 연상케하는 도시로 구부러진 모습의 깊고 작은 만(灣)인 졸라또이 로그(Golden horn)가 높은 해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으며, 이 졸라또이 로그만을 임페리얼 예브게니(Imperial Evgeny) 군도에서 가장 큰 루스끼(Russky) 섬이 감싸고 있음. 태평양 진출을 위한 러시아의 중요한 전략적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톡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의 출발점이며, 종착역이기도 함. 따라서 개인 사업, 국제 무역과 관광 등이 급속도로 성장, 발전하고 있으며, 동시에 수산물가공, 선박수리, 기계제작공업도 지역경제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 2. 블라디보스톡 역사
블라디보스톡은 1860년에 창립, 1880년에 시로 승격되었으며, 1891.5.19에 황태자인 니꼴라이 2세가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기도 하였음. 1899년에 현재 극동·시베리아지역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극동국립대학의 전신인 동양학 대학이 문을 열었으며, 1917년까지 블라디보스톡은 극동지역 중심도시로 성장하게 됨.
내전 초기인 1918년 봄 블라디보스톡에 외국 군대(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이탈리아)가 진주하면서, 도시에는 예전의 제국 여러 곳으로부터 피난민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짧은 시간이나마 블라디보스톡은 헛된 망상과 몽상의 수도가 되었음.
1922년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국민회의는 블라디보스톡을 "4번째 로마"로 공포하고 사람들은 유럽으로부터 새로운 황제의 도착을 기다림. 그러나 1922.10.25 극동 공화국 빨치산 부대들이 도시에 진주, 수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어쩔수 없이 영원히 고향을 등지게 되었음.
3. 중심 시가지 및 명소
가. 신한촌 기념비
한국의 정치불안과 빈곤으로 인한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되었던 1863년, 양치해, 지신허 등 하산지역 남쪽을 중심으로 최초의 한인촌이 생겨났다. 1870년대에 8,400명으로 집계된 연해주 한인 이주민의 수가 1923년에는 12,000명까지 이르게 되었음.
1929년 하산지역 북부의 포세에트구 한인마을은 한인극장과 문화회관은 물론 한인 자치기관을 두고 있었으며, 행정기관에서는 한글을 사용하는 등 한인정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이 보였음. 그러나 1937년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강제이주 명령에 의해 2차례에 걸친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가 집행되면서 현재 러시아·CIS 국가에 산재해 있는 고려인 동포들의 한과 설움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임.
이렇게 붕괴된 한인촌은 일제침략시 항일운동에 크게 기여한 지역으로 많은 독립지사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1999.8월 한민족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고 재러 고려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한촌 기념비를 설립하였음. 이에 '2002 한·러 친선특급 시베리아철도 대장정'도 항일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신한촌 항일운동 기념비 앞에서 그 첫발을 시작하였음.
나. 중앙광장(혁명전사광장)
중앙대로인 Svetlanskaya가(街)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으로 중앙에 깃발과 나팔을 든 병사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음. 왼쪽에는 White House, 벨르이 돔이라 불리우는 흰색건물의 연해주 주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음. 신년축하 축제를 비롯하여 전승기념일에는 퍼레이드 및 불꽃놀이가 펼쳐지며 그밖의 각종 행사가 열리는 이곳 중앙광장은 시민들이 함께 즐길수 있는 대형 야외공연장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음.
다. 아르세니예프 박물관
구시베리아 상업은행 건물로 1906년에 건립되었음. 블라디보스톡의 역사를 넘어 동·식물 자연을 통해 도시의 기원을 더듬을수 있을 만큼 광대한 시각으로 제작되어진 듯함.100년 이상된 고고학, 지리학, 민속학의 수집품들과 희귀한 서류와 책 등이 소장되어 있어 블라디보스톡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됨. 흉기들의 전시도 볼만한 관람거리로 다양한 모습으로 솔직하게 역사의 진실을 풀어놓은 블라디보스톡 시민들의 열린 마음을 볼수 있음.
라. 블라디보스톡역(驛)
블라디보스톡역은 1907년-1912년에 Kovalov에 의해 설계, 건설되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의 시발점으로, 블라디보스톡의 대표적 건물임.러시아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이행하여 설립된 이 역사(驛舍)가 극동에서 느끼는 수도로부터의 엄청난 거리감을 극복하게 하는 동시에 대강국 러시아의 옛 자존심을 대륙으로부터 쉬지않고 나르고 있는 것처럼 보임.
마. 잠수함 C-56 박물관
제2차 세계대전시 첫 출정하여 승리를 거둔 실전 잠수함을 1975년, 그대로 옮겨 보전,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음. 선실과 기관실 및 조타실 등 잠수함 내부를 세심하게 직접 볼수 있는 것이 정형화된 일반관람에서 벗어나 매우 흥미로움. 잠수함 옆 광장에는 꺼지지 않는 불과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담은 기념비가 그들의 넋을 위로하며 승리를 기념하고 있음.
■블라디보스토크-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어: Владивосто́к 중국조선말: 블라지보스또크, 문화어: 울라지보스또크)는 러시아의 도시이며, 러시아 극동의 군사기지이며 연해지방의 행정중심지이다. 외국인들은 러시아 지역에서 "블라디"라고 줄여서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며 욕설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구한말부터 한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한촌을 이루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시발점이다.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문호이다. 인구는 2002년 594,701명이다. 블라디보스톡은 개인사업과 국제 무역, 관광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국제 심포지움과 학술회의가 자주 열리고 태평양 함대의 모함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해군함들이 친선 사절로 온다. 한국에서도 1994년부터 매년 군함을 보내고 있다. 현재 30여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있다. 주된 산업은 조선업과 포경·게 등 어업, 어류·해산물 가공업, 군항 관련 산업이다. 선박수리, 목재가공, 식료품 공업도 있다. 남동쪽의 나호드카는 제2차대전 후에 열린 상·어항으로 러시아의 극동을 향하는 제2의 문호이다.
▶주민
이 도시의 인구는 2002년에 594,701명이다(1989년 633,838명에 비해 인구가 감소함).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주요 민족이다.
1958년에서 1991년까지, 소련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폐쇄된 도시가 되기 이전에 이 도시에는 고려인[2]과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3]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동부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위치해 있다.
▶행정 구역
레닌스키 구 (Ленинский) 페르보마이스키 구 (Первомайский) 페르보레첸스키 구 (Первореченский) 소베츠키 구 (Советский) 프룬젠스키 구 (Фрунзенский)
▶역사
1856년 러시아인이 발견하였으며, 그 후 항구와 도시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872년 군항도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1890년대부터는 무역항으로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1903년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와도 이어지게 되었다. 1918년 봄부터 1922년까지 이 지방은 외국의 간섭군대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군의 원조물자를 이곳에 양륙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군항일 뿐만 아니라 무역항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무역항의 기능이 시의 동쪽 약 90 km 지점에 신설된 나홋카항으로 옮겨졌다.
▶교통
도청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헤이룽장 성 하얼빈을 묶는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은 도시 한복판에서 북쪽으로 50 킬로미터 쯤에 있는 (아르툠)에 위치한다. 또한 공항까지 가는 대중 교통은 없다. 항구는 쇄빙선(碎氷船)의 원조로 사용이 가능하다.[1]
▶교육
블라디보스토크는 6개의 대학교를 포함하여 수많은 교육 시설이 있다.
극동 국립 대학교 (북조선에서는 "원동 국립 대학교"라고 일컬음) - (줄여서 데베게우,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ДВГУ) 극동 주립 기술 대학교 (줄여서 데베게떼우,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техниче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имени Куйбышева, ДВГТУ) 해양 주립대학교 (Морско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имени адмирала Г.И. Невельского) 블라디보스토크 경제학 서비스학 주립대학교 (Владивосток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экономики и сервиса, ВГУЭС) 블라디보스토크 주립 의과 대학교 (Владивосток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едицин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태평양 경제학 주립대학교 (Тихоокеан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кономиче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즐거운 저녁시간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