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 – 성 바오로의 사도 회심 축일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사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시는 사도이신 바오로 사도께서 유대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알려주듯이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그 때도 지금도 큰 도시이고 한 나라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순간에 하셨던 그분의 이 신비 체험은 어떤 것인지를 그분 내면의 변화를 우리는 그분께서 이후에 하신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외적 변화는 그분께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혼자만의 길고 긴 시간을 가지면서 내적으로 깊이 성찰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의 이런 회심은 그분을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도 그러하셨지만, 바오로 사도는 당신께서 가지신 여러 가지 능력과 로마 제국 내에서는 최고였던 신분 조건을 통해 보다 더 이방 지역에 가셔서 선교를 하실 수 있었고,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공동체를 세우셨고, 편지 등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해 감성적으로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가르치셨고, 더 나아가 교회의 조직과 전례, 윤리적인 가르침 등 교회의 초석에 모든 분야에서 큰 가르침을 남기셨던 분입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글로 많이 남기셨기에 큰 지침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삶의 시작이 오늘 기념하는 그분의 회심입니다.
저는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하신 회심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는 외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내면의 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데,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준수합니다. 율법은 “무엇을 해라” 혹은 “무엇을 하지 말아라” 하는 행동을 규정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깨끗하지만, 무엇은 더럽다”고 하여 구별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로마 3,20) 율법은 행위에 관한 판단 기능만이 있을 뿐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으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지금까지 율법을 지킴으로 의인으로 대접을 받았겠지만, 그것이 정말 하느님 뜻에 완전히 맞는지를 확신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확신을 주지 못하는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람은 행위라고 하는 외적인 모습이 그 사람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생각과 확신, 판단과 가치관, 이상으로 여기는 것과 추구하는 내일 등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을 가진 존재입니다. 신앙인이 아니어도 그렇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규정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던 것이지요.
다른 한 가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를 놀랍게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셔서 희생하게 만드신 사랑을 묵상하다 보니 그분은 그것이 정말 하느님다운 길이라고 알게 됩니다.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2-24) 하느님의 지혜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넓은 바다와 같습니다. 그 바다는 사랑의 바다로, 반대하는 이들도, 배반하는 이들도, 다른 길을 가는 이들도, 돌아오지 않는 이들도, 움직이지 않는 이들도, 고집스럽게 자기만을 주장하는 이들도, 상습적으로 악에 기울어지고 죄를 행하는 이들도 그 바다 위에 아름다운 배로 항해하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의 사랑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3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키도 작고 몸도 굽었고 머리도 까지고 신경질적인 표정에다가 누가 봐도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혼자 잘나서 배타적으로 세상과 맞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선택된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지요. 하지만 그분이 예수님을 알고 우리에게 남기신 이 위대한 노래를 오늘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주님, 저희의 우정이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2024년 일치주간 제8일 기도)
(비전동성당 주임신부 정연혁 베드로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