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족의 연원
여주이씨(驪州李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받드는 교위공파(校尉公派)가 있고,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하고 이규보(李奎報)를 중조(中祖)로 모시는 문순공파(文順公派)가 있으며 이세정 (李世貞)을 시조로 받드는 경주파(慶州派)가 있다.
이 3파의 여주이씨 선조들은 다 같이 고려 중기에 경기도 여주고을에 자리 잡아 대대로 호장중윤(戶長中尹), 향공진사(鄕貢進士) 등 향직(鄕職)을 세습하면서 세력을 떨치던 호족(豪族)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상계(上系)의 연원(淵源)을 명백하게 가리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예전부터 서로 뿌리가 같은 동족으로 알아 조선조 때는 대동보를 함께 간행하기도 하였다. 3파의 여주이씨는 관향(貫鄕)의 이름을 각기 조금씩 달리 써오고 있는데 교위공파에서는 문중에 전래하는 <개성호적>에 따라 고려때는 <황여>라 하였고, 조선조 때는 주로 <여흥> 또는 <여주>라 하였으며 간혹 <영의>라는 관향을 쓴 지파도 있었다.
문순공파는 고려조 이래 대체로 ‘여주’라는 단일관향을 썼으나 이규보의 후손가운데 그 습봉(襲封)의 지명에 따라 하음(지금의 강화)으로 관향을 삼은 종파가 있었고, 경주파는 ‘을축대동보’부터 ‘여강’이란 관향을 정하였다. 그러다가 근년에 이르러 ‘여흥’‘영의’‘하회’등의 관향 이름을 여주로 단일화 했으며 경주파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한 ‘여강’이란 관향도 갑자보로부터는 ‘여주’라는 관향과 함께 쓰기로 하였다. |
본관지 연혁
여주는 경기도 동남부에 위치한다.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內斤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호현으로 고쳐 기천군의 영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초에는 黃驪縣으로 개칭, 원주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고종때에는 영의현으로 개칭하였고, 충렬왕 31년 경순왕후의 친향이라 하여 여흥군으로 승격하였으며, 우왕14년에 다시 흥여부로 승격되었다가 공양왕때 군이 되었다. 조선조 태종은 원경왕후의 친향이라 하여 부로승격,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그 후 도호부가 되었고 세종대왕의 영능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여주로 개칭되었다. 1895년 충주부의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군으로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
주요집성촌
교위공파는 시조 이인덕에서 3세 이효온까지는 여주에서 향직에 종사했으나 4세 이교에 이르러 중앙관인으로 진출하여 개성 북부 흥국리에 정거하였다. 그 아들 3형제 가운데 장자 이수산은 유배지인 평부 선천에 눌러 살았고 6세 이상은 중화군 상원에 살았다. 3자인 이수용은 개성 오관리로 분가하여 자손들이 수대를 살았으나 8세 이천배는 함북 북청으로 옮겼고 고려가 망한 후 9세 이행이 강음(지금의 김천군)에 주거를 정하였다. 그 아들 이적은 한양 남촌에 살았고, 이몽가는 평산,봉산,백천 등지에 자손들이 세거했으며 12세 이증약의 후손은 홍성, 영광,춘천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문현공파는 3세 이태수가 관인으로 일찍이 중앙에 진출하여 개성,서교에 주거를 정한 후 그 아들 문순공 이규보가 다시 개성 동부 봉향리로 옮겨 오랫동안 거주했으며 만년에는 몽고의 침략으로 피란 정부를 따라 하음(지금의 강화)객사의 서랑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러므로 자손들도 문손공의 유택을 지키며 오랫동안 강화에서 살았으나 고려가 망하자 각각 신분을 드러 내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산거하였다. 9세 이증의 후손들은 고양군 송포를 비롯, 파주, 논산.영동.옥천 등지에 세거의 뿌리를 내렸으며 이번의 자손들은 주로 군위군 우보를 중심으로 상주 영천.청송 등지에서 큰 문중을 이루었다.
경주파는 시조 이세정이 향공진사로 입신한 점으로 미루어, 당시에 이미 개경에 진출하여 일문을 이루었다. 고려가 망할때까지 개성에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변혁기를 맞아 자손들은 경상도 동남해안으로 낙향한듯한데 8세 이근의 자손은 울주.언양에서 이상도, 이극랑의 자손은 흥해에서, 이숭예의 자손은 경주와 영일 등지에 각각 정착하였다. 특히 양동과 옥산마을은 이가문이 남긴 양반마을로서의 전통과 유습이 보존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마을로 지정되었으며 옥산서원의 사적을 비롯하여 많은 지정문화재와 민속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 |
월성 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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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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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는 손소. 신라초 득성조(得姓祖)인 구례마(俱禮馬)의 후손으로 효행이 알려진 흥덕왕 10년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월성은 경주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관향을 경주 혹은 월성이라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뒤의 세계가 실전되어 후손인 손경원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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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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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본래 신라의 옛수도이나,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경주라 칭하였다. 성종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치고 영동도에 예속시켰고 현종조에는 강등시켜 경주 방어사로 하였으며 신라복귀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관내의 주.부.군.현을 빼았아 안동.상주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때에 경주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에 군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으로 되었다가 다시 행적구역 개편으로 경주시로 통합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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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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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경주손씨 대종가가 5백년 동안 종통을 잇는 유서 깊은 민속 마을로 고색창연한 고옥마다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다. 대향조는 손소이다. 원래 양동리는 풍덕류씨가 살던 곳이었다. 손소가 25세때 류씨 집안의 복하란 분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 부락에 터를 잡게 되었다. 큰 아들은 백돈. 그러나 그에게는 후사가 없어 둘째 아들 중돈이 종통을 이었다. 그가 바로 조선 명현의 한 분으로 청백리에 오른 愚齊선생이다. 이로써 경주손씨는 양동에 토착기반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여기에 우재선생의 여동생 손씨부인이 여주이씨 이번과 결혼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이 동방오현의 한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이다.
이래서 양동은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전통적인 토성마을이 됐다. 대종가는 마을 동쪽 산등성이에 지붕을 드리우고 있다. 조선조 5백년 동안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 우뚝 선 가옥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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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左海琴書 흥선대원군의 글씨지요.
마루에 앉아 한참 바라보았지요.
한번 더 가서 이를 잡고 와얄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