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장씨
인동장씨는 서로 다른 두 계열이 있다. 따라서 시조도 두 명이다. < 장금용 > 계의 장금용과 < 장계 > 계의 장계 가 인동장씨의 시조인 셈이다.
장금용 계의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고려 때 상장군을 지냈다. 후손들이 인동에 살면서 본관을 인동으로 삼았다. 인동은 경북 구미시 인동동의 지명이다. 인동장씨는 후손이 번창하면서 결성, 울진 등 여러 본관으로 갈라진다.
인동장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은 인동장씨“천년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경북 구미시 인동동을 꼽는다. 시조 장금용이 고려 초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8대를 내려오면서 한 때는 인근에 2천여호가 살았다.
학문에서“인장”을 대표하는 인물은 조선조 중엽의 성리학자 장두광이다. 그는 선조 28년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이 됐으나 곧 물러났다. 그 뒤 이조판서, 대사헌 등 벼슬로 20여 차례나 조정에서 부르는데도 나아가지 않고 인동 향리에 묻혀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율곡과 퇴계와는 또 다른 독자적 성리학설로 최근 국내 학계는 물론 일본, 중국에서도 연구되고 있다.
한말에 우뚝 선 인물은“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명사설로 잘 알려진 위암 장지연이다. 위암은 고종 31년(1894년) 진사시에 합격한다. 다음해 을미사변 때 민비가 살해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보냈다. 위암이 언론에 투신한 것은 비교적 늦은 36세가 되던 1899년으로 격일간지 시사총보가 시발점이다.
이어 황성신문사의 주필로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두르다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에 취임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그 유명한 사설을 써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일로 위암은 일본 관헌에 체포돼 3개월간 투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