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열왕 4,8-11.14-16ㄴ, 로마 6,3-4.8-11, 마태 10,37-42): 주님 자녀의 품격와 품위를 지니십시오
삶의 시간이 더해져 가면서, 우리가 어느 즈음에 이르렀나 돌아보게 될 때가 되면, 늘 저는 스스로 설정한 얼마만큼의 모습에 다다랐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여느 시대를 산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주어진 100년 전후의 시간을 인생으로 채워갈 때, 어쩌면 그때 그즈음엔 어느 정도의 성숙함을 지닐 것이라는 예상을 품고 사람을 대하게 되지요. 물론 그것이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작용하기보다, 누구나 저마다의 삶에서 지녔으면 하는,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자신의 일상을 통해 영혼과 소통하는 어떤 마음과 생각을 지녀왔고, 또 세상을 바라보는 관을 통해 어떤 영향을 주어왔는가를 가늠해 보게 되는 바탕이 되지요. 분명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나, 결국 어느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한순간의 단편적인 점수가 아니라, 오래도록 몸과 마음에 배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만큼 그 사람과 일체가 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감히 사람을 바라본다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한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이 서로 모여 이룬 공동체의 성숙함 역시 그 안에 머물 사람, 그중에서도 가장 미약해 보이고 영향력이 부족해 보이는 한 사람에게 얼마나 또 어떻게 귀를 기울이는가를 주목합니다. 그때의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이나 공동체의 품격(品格)과 품위(品位)를 드러내는 것이라 믿는 연유이지요. 그 태도에는 감추려 해도 감추어질 수 없는 세월의 무게와 함께, 가치관의 중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지표를 자연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게 마련이니까요.
오늘 열왕기 하권 4장 9절에서 “여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하고 엘리사를 대접하고자 하는 여자의 말 가운데 그녀의 영혼에 담긴 사랑의 온기와 품위가 드러납니다. 외려 부유한 그녀였음에도, 그리 도드라지지 않을 나그네 차림의 예언자를 겸손하게 맞아들이는 모습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지요. 이미 가식적인 편견을 거두고, 다가오는 사람을 기꺼운 친절과 연민으로 동행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느껴지니까요. 신앙을 찾아오는 이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 실수하는 이들을 감싸안는 한마디의 위로, 힙겹게 찾아오는 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친절이 그와 닮아있는 태도겠지요.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을 빛나게 하는 것은, 겉으로 꾸민 치장이나 외력(外力)이 아닙니다. 오래전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평범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진심을 담은 노랫말과 가창력으로 청중을 휘어잡을 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을 입을 열러 노래를 부르는 순간, 그가 얼마나 잘 생겨 보였는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외모를 우선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가치가 발휘되는 순간 아름다움이 더해진다는 표현이겠지요. 소위 명품(名品)을 걸치거나 사람들 가운데 뛰어나 보여서 그가 가치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애써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이미 충만한 인격이 드러내는 말 없는 품위가 세상을 물들이는 귀한 것으로 여겨질 때, 그가 행하는 작은 것부터 모든 선택에 이르기까지도 새롭고 더욱 빛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게 묵묵하게 빛을 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죽음’처럼 보이는 어리석은 삶일지라도, 정성을 다해 일상을 채워가는 이들 말입니다. 자녀를 위해 수많은 두려움과 세파의 무게를 어깨로 견뎌내는 부모가 그러합니다. 더욱 가난한 이를 위해 시간과 땀을 아까워하지 않고 자기 삶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살아가는 봉헌된 이들이 그러합니다. 자기를 드러내기보다 누군가의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 자기 삶을 성실히 일구어가는 이들의 노력이 그러합니다. 그들의 삶이 보석처럼 빛나서 누군가에게 영혼을 비추어줄 거울이 됩니다.
로마서 6장 4절, 8장 11절에서,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라는 말씀을 들었지요.
아픈 이를 돌보는 이의 밤새우는 희생과 눈물이 그의 육신과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치환의 고통, 사랑의 십자가’가 되듯이, 죽음을 닮아가도록 자신을 버리는 묵묵한 삶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본당에 찾아오는 가난한 이들의 발걸음, 묵묵히 홀로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어른들의 외로움을 덜어드리는 일, 이 사회의 불의와 무너져 내리는 인권의 아픔을 겪는 이들을 껴안는 일 등, 그것이 비록 작은 일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매 순간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대할 때, 이미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서 이루어가는 빼놓을 수 없는 한 조각이 됩니다. 수천, 수만 개의 조각으로 퍼즐을 만든다 해도, 그 한 조각이 비워지면 어떻게 완성된 작품이라 하겠습니까?! 그 한 조각을 모두와 같이 여길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연민이며 자비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마태오복음 10장 42절에서,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함께 걸어가고 있는 이의 작음을 ‘작음’으로 보지 않는 성숙함, 가난한 이의 슬픔을 ‘그의 것’일 뿐이라고 치부하지 않는 열린 마음, ‘너를 위해 존재하는 나’로서의 응답을 끊임없이 찾는 정성이 바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도록 우리가 찾아가야 할 성숙함, 참된 주님 자녀로서 지녀야 할 품격이며 품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해 보편적으로 찾아가야 할 하느님 백성이며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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