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소추 중에 있는 대통령 노무현이 『칼의 노래』를 읽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착잡한 심경 속에 여러 생각들이 번다하게 가지를 뻗고 있을 게 분명한 노무현 대통령은 왜 굳이 『칼의 노래』를 붙들고 있는 것일까 ?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칼의 노래』를 읽는다. 돌이켜 보면 박정희 대통령도 이순신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 나라 수도의 한복판에 이순신의 동상을 세우고 현충사를 성대하게 중건한다. 박정희는 그렇게 저의 존재 위에 구국 영웅의 이미지를 덧씌운 정체성을 훔치려는 욕망을 드러냈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순신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그러나, 박정희의 이순신과 노무현의 이순신은 한 인물이되 다르다. 전자의 이순신이 구국 영웅으로 성화(聖化)된 이순신이라면, 후자의 이순신은 생사와 존망의 위기 속에서 모멸과 치욕으로 살이 저며지는 저의 처지를 차갑게 관조하는 인간 이순신이다. 『칼의 노래』 속에서 이순신은 말한다 ; "알 수 없었고 벨 수 없었고 조준할 수 없었다. 벨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나는 다만 적의 종자를 박멸하려 했다." 이건 영웅의 입에서 발음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제 운명에 버거움을 느끼는 범부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여기에는 무(武)를 천하에 펼쳐 난세를 치세로 바꾸려는 따위의 대의는 없고, 제 운명의 버거움을 힘겹게 헤쳐나가는 자의 버거움만 강조되어 있다. 대타적 세계와의 되먹임의 고리가 끊긴 곳에 실존의 자리를 세운 자는 필경 허무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만인 대 일인의 전쟁에서 만인을 상대하는 일인은 고립감과 고립감으로 체화하는 실존적 허무를 피할 수 없다. 허무주의는 생존상의 가치가 결여된 선택과 행동으로 나아간다. 왜 상대를 베야 하는지 모른 채 적을 베는 자의 도덕은 무도덕이다. 이순신이 허무주의자라는 물증은 이 소설 속에서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이순신은 저의 무도덕 위에 히데요시의 칼끝과 조선 조정의 칼끝 사이에서 제 한줌 생존이 겨우 숨쉬고 있다는 투명한 자각을 세울 뿐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이전의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나 영화와는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김훈의 이순신은 인간 이상으로 비범하게 부풀려진 "성웅(聖雄)"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실물대의 "인간"이다. 이순신의 인간 됨은 몸을 고되게 부린 뒤에 나타나는 식은 땀과 저절로 흘러내리는 코피에서 풍부한 실감을 얻는다. 그것의 절정은 감각의 생생한 현존 속에서 보다 선명하게 나타난다. 전장에서 너무나 많은 시체들이 썩는 냄새에 멀미를 느낀 이순신은 포유류의 누린내를 감당하기 버거워하며 한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다. 세상에는 생을 버겁게 만드는 얼마나 많은 누린내들이 범람하는가 ! 이순신은 그 누린내들 속에 고립무원으로 내동댕이쳐 있다. 타자와 세계는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맡는 시각 청각 촉각 후각 기관에 밀려와 저의 있음을 증명해낸다. 감각 기관들에 비벼지는 그 물성에 의해 생물의 감각은 환하게 열린다 ; "내가 바다에 당도했을 때, 연안의 바람은 끈끈했고, 간고등어 썩는 냄새가 자욱했다." 특히 후각 기관을 자극하는 온갖 냄새들은 이 소설 전편을 덮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 점은 두드러진다 ; "전선들이 다가오자 연기 냄새는 더욱 짙었다. 죽은 여진의 가랑이 사이에서 물컹거리던 젓국 냄새와 죽은 면이 어렸을 때 쌌던 푸른 똥의 덜 삭은 젖냄새와 죽은 어머니의, 오래된 아궁이 같던 몸냄새가 내 마음속에서 화약 냄새와 비벼졌다." 오감에서 감각적 질료의 지각이 탄생한다. 아무것도 믿을 게 없고 의지할 게 없이 고립에 처한 인간에게 저의 오감은 인식의 세계에 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이자 의지처다. 그 감각의 매개에 의해 지각이 열리고, 그 지각 속에서 "나"와 세계의 있음과 있어야 함의 상호적 관련은 추상과 관념의 껍질을 벗고 드러난다.
이순신은 저의 바깥에서 출렁이며 밀려오는 죽음의 물결을 향해 칼을 겨누지만, 그것은 벨 수 없는 적이다. 또한 그 적의 적의의 근본은 모호하다. 더 무서운 것은 적의는 모호하되 피아(彼我) 간에 맡은 바 소임은 자명하다는 사실이다. 그 자명함의 전면에서 이순신은 삶이 그 근본으로 가진 모호한 관념과 추상 때문에 진저리를 친다 ; "임진년의 바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몸을 조여오는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이순신이 느끼는 혼돈과 모호함은 저를 둘러싸고 있는 힘들의 예측불가성과 맹목성에서 비롯된다. 이순신의 실존은 그것들 속에 포박되어 있다. 그 포박 속에서 이순신은 알 수 없는 바깥의 힘과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압력 속에서 저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의지대로 움직인다.
젊은 왜군 포로를 앞에 두고 심문하며 갈등할 때 이순신의 인간 됨은 또다시 섬광처럼 드러난다 : "내 속에서 나 아닌 내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베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아베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이 내 몸 속에서 양쪽 다 울어지지 않았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징징징 칼이 울었다." 갈등은 사유하는 자의 몫이고 사유는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칼은 인간의 사유에 따르지 않고 저의 숙명대로 움직인다. 칼의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고 칼의 숙명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 칼은 적이 되어 나를 벤다. 먼저 베지 않으면 제가 베이는 게 칼의 숭고한 순명이다. 칼이 그 순명의 내면에 새긴 강령은 무도덕이다. 칼은 피아와 선악을 분별하지 않고 다만 베는 것으로 저의 소임을 다한다. 분별하는 것은 칼의 몫이 아니고 사유하는 인간의 몫이다. 칼을 든 자는 존망의 기로에서 사유를 가로질러 나아가는 칼의 숙명을 비극으로 체화한다. 그 순간 사유는 잉여적인 것일 따름이며, 감정의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순신의 비극은 두 겹이다. 그 하나는 전쟁에 함몰된 자가 칼의 원리에 따르지 않고 사유의 원리에 제 삶을 비끄러매려는 헛된 시도를 한다는 것이고, 그 두 번째는 봉건 왕조제의 어둠 속에서 너무 일찍 근대적 자아의 횃불을 들고 나아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순신의 곤경은 자업자득이다. 제 생의 경영을 오로지 저의 책임 아래 두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순신은 명약관화한 그 곤경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순신은 제가 선택한 곤경이 칼로 베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죽음을 선뜻 받음으로써 그 책임의 전부를 제 실존으로 수납한다.
『칼의 노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이순신의 모습은 사유하는 인간이다. 칼에 제 운명을 기대면서 그 칼과 길항하는 사유에 너무 깊이 빠짐으로써 파국에 필연의 중력을 부여한 게 이순신의 비극이다.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에 따르되 맹목적인 종속은 거부한다 ;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은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그것은 주체의 선택과 행동의 원리를 타자에게서 구하지 않고 자율성이라는 규범의 확대를 통해 실현하려는 근대인의 자아에 합당한 자의식의 발현이다. 전근대의 세계에서 근대인의 자의식으로 살려는 자는 당대 권력의 반동으로 튕겨나간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수군통제사를 맡기면서도 끝까지 신임하지는 않는다. 조선 조정도 이순신이 충(忠)의 이데올로기에 무조건적으로 복무하지 못하는 사람, 다시 말해 봉건 왕정제 시대의 신하로서는 불충한 사람이라는 걸 꿰뚫어 본 것이다. 이런 이순신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소통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저의 실존적 의미를 저의 사유의 힘만으로 일구어내려는 근대적 이성의 탄생을 엿본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너무 일찍 근대적 자의식을 품은 자가 부르는 절망과 환멸의 노래다. 아니다. 바로크적 과잉을 지양하는 김훈의 비장식적인 문체 속에서 절망과 환멸은 날줄과 씨줄로 얽힌다. 그렇게 짠 문장의 피륙 속에서 울려나오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다. 실존적 갱신의 한계에 부닥쳐 절망과 환멸로서 성대를 울리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라는 게 논리적으로도 맞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칼의 노래"가 아니라 "칼의 울음"으로 읽혀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