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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빚 진자 - 한국유리회장 최태섭 한국유리회장이었던 최태섭 회장은 평안북도 정주군 염호동에서 1910년 8월 26일 출생하여 오산학교을 들어가서 공부하던 중 친구들과 독립운동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집안에 홀어머니와 장남인 자신이 집안을 사정 때문에 포기하면서 학교도 포기하였지만 그가 기독정신을 오산학교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변호사가 되려고 헌법을 보다가 일본천왕을 신성으로 받들어야한다는 헌법조문을 보고 포기하고 정미소사업을 하였으나 잘 안되어 다시 화공계통의 동창공장을 만들어 비누 등을 만들어 팔고 그다음 무역에 진출하기위하여 삼흥상회를 설립하여 무역업을 하였다. 그때 그가 취급하던 콩값이 폭등하여 위약금을 물더라도 쌀 천가마나 살 수 있는 약 20만원의 이익을 무시하고 본래 계약대로 진행하여 주변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었다. 그 후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그가 있던 곳에서 기업주들을 악덕상인으로 간주하여 체포하여 죽이려 인민재판을 하였으나 그와 같이 근무했던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그곳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군납업무를 하면서 일사후퇴를 맞이하여 피난 가는 중에서도 거액의 은행빛을 갚아 그것이 신용확보에 큰도움이 되어 원양어업주식회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던중 국가적으로 뜻있고 사회에 보탬이 되며 우리민족에게 기여할 수 있는 사업을 하고 싶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국가 재건사업에 기여할 업종을 생각하다 판유리를 선택했다. 그는 기독교정신을 근간으로 사랑, 정직, 신용을 경영의 기본으로 생각하면서 일하고 돈을 잘 쓰는 것이 많이 버는 것보다 중요하며 항상 겸손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그러기에 보통사람들이 사업을 하면 골프정도는 기본으로 할 줄 알 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거부하고 나름대로 열심이 살고 있다. 집에 있는 부인도 마찬가지이다. 61년도 박정희 대통령시절 재벌 기업인들 부정조사를 위하여 재벌인과 그들의 집을 가택수사를 하였는데 그의 집의 생활이 너무 검소해서 수사관들도 감동되어 붙잡혀간 최태원도 특별히 조속이 석방되었다한다. 그는 기업으로 얻어진 수익을 의미 있게 사용하고저 정신장애자교육, 학교교육지원사업, 국제기아대책본부, 크리스찬 아카데미등에 사용되고 있으며 그중 학교에 투자되는 곳은 경희대학, 한신대학, 상명여대 , 오산중고등학교. 신일중고등학교, 숭의여전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와 한평생을 같이한 부인 김성윤여사는 남편덕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여자(김성은 :한국유리 최태섭회장부인이본 남편최 태섭)
스물 한살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서 함께 살아 온지 60년, 이제는 남편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제껏 한 번도 부부 싸움을 해보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조용하고 생각이 깊은 남편에 비해 나는 본시 활달하고 목소리도 큰 편입니다. 또한 남편은 머리가 좋아서 잘 잊어버리지도 않고 자기가 한 말은 꼭 지키는데 비하여 나는 잊어버리기도 잘하고 실수도 잘합니다. 그래서 가끔 씩 나는 남편에게 나를 변명합니다. 『사람이 기계요? 지금 못해도 언제인가는 할 건 데 잊지 않고 어떻게 꼭꼭 합니까?』 이것이 우리부부가 할 수 있는 부부싸움의 전부입니다.
몇 년 전 미국에 있는 딸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사귄 친구들이 지금도 나를 황재부인이라고 불러주는 이유도 극진한 남편의 사랑에 있겠지요. 한번은 내가 실수를 해서 우리 집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닥쳐왔던 때가 있습니다. 나는 나 때문에 우리가족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그 어떠한 손해나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나를 감싸 주었습니다. 그리고서 사업적 출혈을 감당하면서까지 그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몇 십 년 , 남편은 한번도 장난으로라도 그 일에 대한 눈치를 주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남편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런 남편의 행동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이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우리 집이 너무 검소하게 살아서 잡혀갔던 남편도 경찰서에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남편은 그 일에 대하여 아내 덕이라며 나 에게 고마워했습니다. 박에서 큰소리치는 법이 없다지만 집에서도 또한 큰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는 남편은, 회사일 하느라 바쁘고 힘들던 시절에도 집에 와서는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밖에서의 고충은 어느 정도 알 수 있기에,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마음편이 있게 해주려고 우스운 이야기도 들었다가 기억해서 들려주고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합니다.
“둘이 시작했는데 언제 이렇게 많아졌지? 하하하. 우리한번 꼽아봅시다 . 몇이나 되나? 그러니까 큰아들네가 세훈이하고 수찬이하고 ...“ 우리 부부는 3남2녀의 자식을 낳았는데 지금은 증손자까지 생겼습니다. 전부 아무 탈 없이 무난하게 살아 주는 것이 기쁨니다. 이제 결혼 60주년이라고 기념식을 한다기에 그 조건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잘못된 자손이 하나도 없어야 한답니다. 한 명 한 명 꼽아보니 다들 아무 문제없이 가정을 꾸리고 잘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밖에서 아랫사람들이 잘못을 해도 큰소리안내고 타이른다고 하는 데 자식들에게 평생 매한대 안 들었습니다. 매 맞지 않고 자란 자식들이라 버릇도 없고 제멋대로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평생자식을 위해 기도하며 키운 덕택인지,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키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셋 딸 둘 중 부모를 마음 아프게 한자식이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절대 돈 봉투 들고 학교에 드나들지 못하게 한 남편이었습니다. 비싸고 예쁜 옷 보다는 검소하고 편한 옷을 입히게 하고 용돈을 적게 주 고 아껴 쓰게 했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한 번도 불평 안하고 다들 말 잘 듣는 것 이 기뜩했습니다. 다만 너희들이 공부하겠다고 하면 힘 닫는데 까지 밀어 주겠다고 한 아버지의 말을 잘 알아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열심이 공부하여, 자기들 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을 모두들 들어갔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끼리 서로 사돈을 맺으면 좋다던데, 남편은 아이들 결혼문제에 있어서도 스스로 좋다고 선택 한 배우자를 이쁘게 맞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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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아멘 대단하십니다. 존경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폭염특보 30일째 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샬롬
아멘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