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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부호 아들이었던 국군 포로의 슬픈 최후[4]
동고동락 ・ 6시간 전
두 박소위는 몇 주 후에 북 10 사단장 전문섭의 배려로 석방되어 귀대하였다. 돌아오는 길도 순탄치는 않았었다.
두 사람은 횡성 쪽으로 공격해온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어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다행히 중공군이 별로 포로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탈출할 수가 있었다 .
이때가 중공군이 4차 전역이라고 부르는 남진 작전을 전개해서 국군 8사단을 섬멸적으로 대파시킨 횡성 전투가 있던 무렵이다. 작전 기간이 1951년 2월 11일 ~ 18일이니까 이 무렵에 박소위는 석방되어 귀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1년 2월, 중공군이 발령한 4차 전역 - 국군 8사단이 거의 붕괴해버린
횡성 전투에 - 참가한 중공군 사진이라는데 그 사실 여부는 분명치는 않지만 동계 작전을 하는 중공군의 모습이다.
그러나 다시 중공군을 따라온 북한 내무서원[경찰]들에게 체포되어 홍천으로 끌려갔다. 이들 내무서원들은 낙오 포로들을 가차없이 학살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었다. 내무서원들은 감금하는 동안 밥도 주지 않고 박준승 소위를 피투성이가되도록 마구 구타했다. 두 소위들은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했다.
두 박소위들은 미군의 야간 폭격과 학살의 공포를 겨우 견디어 내며 기회를 보다가 또 탈출했다. 세 번이나 포로가 되어 탈출한 진기한 기록을 세운 두 소위들은 북진하는 미 해병들을 만나 네 번째로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미 해병들은 두 소위들을 의심해서 간이 포로 수용소에 감금했다가신원이 확인되자 석방했다.
박 소위가 돌아와보니 수류탄 부상에 정신을 잃고 전장에 유기되었던 박소위는 죽었다는 소속 부대 보고에 전사 처리가 되어있었다. 박소위의 시신 대신 누구의 유해인지는 몰라도 현재 동작동 현충원에 고 소위 박경석의 묘가 설치되어 있다.
생존한 사람의 묘를 쓴 동작동 현충원 – 박장군 부부가 자기의 묘소를 방문해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박소위에게는 채명신 장군과 동기인 육사 5기생이며 형인 박영석 소령이 있었다. 나중에 준장으로서 1사단장을 지냈고 퇴역 후 광업 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분인데 전사한 것으로 알고 포기했던 동생이 돌아오자 뛸 듯이 기뻐했다.
형은 동생을 더이상 전선에 놔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근무하던동래 종합학교 구대장으로 발령되도록 힘을 써서 형제가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동래 종합학교에서 형과 아우가 자주 만나자 현영직 중위에 대한 이야기도화제에 올랐다. 그때까지 박경석 소위는 현중위의 아버지인 현준호씨가 누구인지 몰랐었다. 그 북한군 중위가 비록 친일파니 악질 지주니 했지만 하여튼상당한 부자고 지방의 유지라는 것만 감지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현영직의 아버지 현준호라는 인물이 동생의 입에서 나오자 형인 박영석 소령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현영직의 아버지가 그 유명한 현준호 선생이었단 말이냐?"
“어? 형, 그 분 알아?"
"알다마다! 호남 지방에서 유명하신 분이다. 존경받는 분인데 아깝게 공산군에게 학살 당하셨어!"
현준호 씨
박소위도 비로소 현영직 중위의 가문이 호남의 명문임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이 분에 대한 지식을 많이 접한 박경석 장군은 현준호 씨가 민족 의식이 투철한 분으로 비록 사업가로서 일본에 협조해서 괴뢰 기관인 중추원 참의도 했고 강압에 의해서 학병 입대 권유 연설도 했었지만 한편 뒤로는 같은 민족을 챙기는 사업과 선행을 많이해서 존경받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현준호씨는 그 현중위를 모욕하던 머슴 출신 북한군 중위가 말하던대로 악질 지주는 아니었다. 작은 면만한 넓은 농장을 운영했지만 소작료도 다른 지주들 보다 휠씬 낮게 받았으며 리스크 큰 간첩 사업도 성공해내 땅이 없어 만주로 떠나려고 했던 5,000명의 농민들에게 경작할 땅을 마련해 주었다고 했다. 호남 은행이라는 최초 민족은행을 창립한 분으로도 유명하다.
현준호 씨가 간척해서 일군 학파 농장
해방 후에 친일분자를 반민특위가 조사에 착수했는데 현준호씨는 불려갔다가 일단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었고 학교 창설이나 민족은행 설립등의 민족운동을 많이 한점으로 보아 그 친일 혐의가 가볍다고 보고 석방되었다.
그런 명문 집안이 북한군에 의해서 풍지박산이 되었는데 둘째 아들까지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정의파인 형 박영석 소령은충격을 받았던 것 같았다.
"공산군에 절단 난 이런 집안을 모르는 체 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현중위의 유해를 찾아서 가족들에게 보내주자."
형 박영석 소령은 당시 대구에 있던 육본까지 찾아가서 현중위의 유해를 귀가시키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이를 이해한 육본 고위층의 명령으로 현중위의 유해를 찾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유해를 찾으려 가야 한다면 그 묘소의 위치를 알고 있는 박경석 소위나박준승 소위가 동행해야 했으나 박경석 소위는 종합 학교 구대장이라서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박준승 소위는 수송병과로 전과를 해서 부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보병학교 구대장인 박경석 소위보다는 시간 여유가 많았었다.
박준승 소위가 호출되어서 유가족과 함께 평창의 다수리 지역을방문했다. 차량들은 군에서 준비한 듯하다. 박준승 소위는 몇 주간 고생한그곳 지형을 생생하게 기억했던터라 현중위의 매장지는 쉽게 찾아냈다.
땅속의 현중위 유해가 너무 변해서 유족들이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아주 큰 키에 또 소년 시절에 치과 치료로서 금니를 했던 흔적이 들어나 현중위임이 확인되었다. 유해는 일단 고향 선산으로 운구되었다.
동래 종합학교는 조금 뒤에 광주로 이동하여 보병학교가 되었다.나중에 상무대가 된 보병학교는 콘셋 몇 동과 대부분 천막들뿐인황량한 곳이었다.
자리를 잡은 박소위는 현영직 중위의 집이 광주 호남동에 있고 그 집에 현영직 중위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탄에 빠진 현중위 어머니에게 현중위의 마지막 순간을 전해주고 위로해주는 것이 전우로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소위는 어느 쉬는 날 버스 노선같은 교통편도 없는데도 지나가는트럭 등을 얻어 타고 힘들게 호남동 18번지의 집을 찾아갔다. 보병 학교에서 찾아가기가 힘든 먼 길이었다.
오후 늦게 도착한 그 집은 정말 큰 집이었다. 이 집은 현준호씨가 1,500평의 대지에 3년이나 걸려서 건축한 200평의대형이고 방만 15개나 되는 문자 그대로 대궐같은 집이었다.
박소위는 현중위는 어머니나 형제나 자매들이 현중위의 최후를 지켜본 전우라면 울며불며 슬퍼하면서도 반가워 할 줄 알았었다. 박소위가 군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전사자 가족들은, 특히 어머니들은 아들의 전우를 만나면 몸을 가누지 못하도록 슬퍼하며 애통해 했었다.
그런데 현영직 중위의 어머니나 형제가 정중하게 맞이하면서도 별로 감정을 들어 내지 않고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어색해진 박중위는 돌아가려고 했지만 너무 늦었었다. 마침 그 큰집에는 방문객들이 재우는 행랑채의 방들이 너덧 개가 있었고 빈방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현중위 가족들은 방이 다 찼다고 하룻밤 숙박을 거절했다.
불쌍하게 간 아들과 마지막까지 있었던 전우에게 조금은 야박한 대접이었다.
할 수 없이 먼 길을 또다시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부대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참 그 기분은 묘했고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
“엄마가 자식의 최후를 지켜보고 매장해준 전우에게 왜 그토록 무표정할까?”
호남의 명문 부호 집에서 경험한 이상했던 접대는 박소위의 머리에 오랜 세월 남아있었다.
현준호 선생 자택은 1963년 팔리고 그 자리에 광주시 호남동 성당이 섰다.
세월은 흐르고 박소위는 직업 군인의 길을 걸어 중대장이 되고 참모가 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와 월남전의 재구 대대장을 했고 연대장이 되고 장군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 현영직 중위의 바로 아래 동생이며, 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인 현영원씨가 경제계에서 거물로 성장해서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 딸인 현정은씨가 현대가의 정몽헌씨와 결혼하고 자주 매스컴에 소식이 올라 현씨 집안 소식을 듣게 될 기회가 있었다.
현영직 중위의 바로 아래 동생이며 현대 며느리 현정은씨 아버지 현영원씨.
그때마다 박장군은 평창 산골에서 같이 포로생활을 불행하게 먼저 가버린 현영직 중위가 생각나서 현씨 가문이 잘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2003년 현영직 중위의 조카인 현정은씨의 남편이며 현대그룹 회장인 정몽헌 회장이 대북송금 사건과 정부가 얽힌 복잡한 일로 검찰에 불려 다니다가 스트레스를 받고 현대 그룹 빌딩에서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박경석 장군은 현준호 씨, 1남 현영익씨, 2남 현영직 중위의 뒤를 이어 발생한 현씨 집안 죽음의 불행에 북한이라는 존재가 끼어든다는 우연같은 현실에 혀끝을 차며 탄식을 했었다.
현대 정주영씨의 아들 정몽헌씨와 현정은씨-젊은 시절
현씨 가문에 응원의 관심을 놓지 않던 박경석 장군은 보병학교 시절그 집을 찾아갔다가 좀 예상 밖의 낮은 관심에 무안을 당했던 일화를듣고 필자가 자료를 찾아 알려드렸다.
10명의 자녀를 둔 부친 현준호씨가 1932년, 인텔리였던 첫 부인 김희정씨와 사별하였다. 김희정씨는 현영직 중위의 친모이기도 하다. 많은 자식들을 돌보며 홀로 살던 현준호씨는 한참 후에 신모씨를 후처를 맞았다. 그 독신의 세월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열명의 자녀가 대부분 김희정씨라는 기록으로 보아 상당기간 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후처가 전실 자식들에게 진한 사랑을 베푼다해도 열달간 배에 품은 핏덩어리를 아프게 세상에 내놓아 기른 친어머니의 사랑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전해드리자 박경석 장군은 "어쩐지---" 하며 이해를 했다.
박수근 화백 작품--어머니의 존재를 알고 사랑으로 이어지던 이 시기에 어머니와 헤어지면 어머니는 아기의 가슴에 평생 아스라한 아지랑이 같은 구원[久遠]의 존재로 남아있게 된다.
포로 생활 때 현영직 중위의 나이가 20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엄마를 알아 볼 너덧 살의 나이에 이별을 했고 엄마의 추억을 담고 성장했었다.
그가 포로 생활 중에 침묵 속에 멍하고 허공을 보고 있던 것은 그것은 어머니가 떠난 어렸을 때부터 무섭거나 어려움을 부닥쳤을 때 본능적으로 생각하던 버릇의 연장선상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박경석장군에게 이런 추리를 설명드리고 조금 주제에 벗어난 질문을 해보았다.
"혹시 현중위가 멍하고 있으면서 찾았던 것은 어머니가 아닐까요?"
내가 주제 넘는 질문을 한 것은 박경석 장군 역시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모성 갈구의 목마름을 항상 느꼈던 것을 어림짐작했었기 때문이다.
17세부터 전쟁터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무수히 걸었던 박경석 장군은 다감한 등단 시인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의 돌비에 새긴 서시도 박경석 장군이 썼던 것이다.
시비 서시[序詩]
그 분이 1959년 등단할 때 ‘한사랑’이라는 야전 지휘관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필명을 썼던 것도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에 있어서일 것이다.
나의 생뚱맞은 질문에 나이 80이 넘은 지금에도 날카롭고 빠른 야전군 지휘관의 말투를 쓰던 박경석 장군은 갑자기 어조가 낮게 변했다.
"----- 그렇네!------------ 그럴 법도 해----------!"
아버지, 형님도 잃고 자신도 내일을 알 수 없던 절망적인 포로 생활에서 전쟁 공포증이라는 고통이 덮친 중에 과거 머슴으로부터 버티기 힘든 모욕을 당하던 현영직 중위는 어려우면 본능적으로 찾아 기대던 어머니가 있는 저 아지랑이 같은 먼세상으로 떠났던 것이라는 추리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출처] 명문 부호 아들이었던 국군 포로의 슬픈 최후 -4-|작성자 동고동락
첫댓글 당시의 상황 정리가 기가막히게 실제처럼 묘사 되었습니다.
나 박경석의 심리 추리도 내 심리 그대로 동감입니다.
오류 한 곳.
부산 동래 육군종합학교는 내가 1951년 4월 27일.부임할 당시 이미 육군보병학교로 학교명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육군보병학교 사관후보생 갑종5기와 이어서 갑종9기 구대장 근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