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사람의 됨됨이를 잴 수 있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할 수 있다면 사람에게 속지도 않을 것이고, 구인을 할 때 면접이란 성가신 절차도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많아지면 사람 보는 눈도 더 나아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나의 눈이나 육감만을 가지고 어떤 사람인가를 판단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게는 한 지인이 있습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 미국에서 만난 분입니다. 미국의 굴지의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신데, 은퇴 후에 한국에 나가 모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다가 미국으로 돌아오신 분입니다. 이 분이 나에게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얘기를 하신 중에 한 가지 내 머리에 진하게 남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분은 정신의학을 전공하신 분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관찰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들려주는 한국에서의 이야기는 아주 정확하고 예리합니다.
한국에서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다 대접받는 것은 아닙니다. 출신 국가와는 상관없이 북미와 유럽계통의 백인들은 꽤 대접을 받지만, 피부의 색깔이나 신체적 특성이 눈에 띠게 나타나는 아시아인들이나, 흑인들은 상당히 푸대접을 받습니다. 이 사실은 얼마 전에 한국의 교육방송인 EBS-TV의 실험으로 확인된 바 있습니다. 아무튼 이 분은 백인계 미국인이니 한국에서는 운신하기가 좋은 편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분은 한국에 있는 명문대학의 교수로 온 분이니, 늘 한국사회의 소위 엘리트들과 주로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상당히 겸손하고 점잖은 이 분 스스로가 그런 차별된 대접을 받는 생활을 원해서는 아니고, 그저 자기의 위치가 그러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분은 한국에 사시면서 누구라면 알만한 상당한 위치에 있는 분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 한국사회를 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과 한국 사람에 대해 관찰한 내용을 나와는 비교적 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때로는 간접적인 영향을 통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편견과 고정관념에 지배되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어느 누구와 만나 사귈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름 하는 이 분 대로의 판단기준에 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분은 정신의학계의 세계적인 권위자이시고, 은퇴 후에 초빙교수로 한국에 오신 분이라 여러 분야에 지도자가 되시는 분들을 주로 만났다고 합니다. 한국생활에 조금 아쉬웠던 것에 하나가, 평범한 서민들과 가까이 접촉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라는 것도 얘기 중에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이 분은 평등이란 것이 나보다 못한 위치에 있는 사람보고 내 자리에 함께 와서 앉으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 곁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신 분입니다.
긴 얘기는 줄이고, 이 분이 사람을 보는 기준을 내게 얘기하신 것을 옮겨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위치에 있거나 자기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다 잘합니다. 게다가 자기보다 높은 지위나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잘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백인계 외국인이고 학계의 유명인인 자기 자신은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지나친 환대를 받는다고 늘 생각했답니다. 한국에서 있었던 몇 년 동안에 자기가 식당에서 밥값 한 번 제대로 내 보지를 못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한국의 상류층에 있는 분들 중에 아주 많은 분들에게서 아주 다른 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고 하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한국에서 잘 나간다는 분들이 자기에게 대하는 극진한 모습과는 달리, 식당 종업원과 같은 서비스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이 분을 너무 놀라게 했다는 겁니다. 아주 거만하고, 무례하게 이런 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상대방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마치 자기는 이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우월한 계급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 이 분의 설명이었습니다.
이분은, 상대방이 아무리 훌륭한 석학이고, 기업가이고, 정치가, 종교인이라 해도 자기보다 열악한 환경에 있는 이들을 이처럼 막 대하는 이들과는 지속적인 친분을 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분이 말하는 이런 분들은 이 한국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 하려하는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게“도가니”나 “변호인”과 같은 영화가 말하는 미성숙한 사회의 어두운 단면입니다.
사랑, 자비, 배려, 친절, 행복과 같은 단어는 모두 추상명사입니다. 숫자로 셀 수 있는 가수(可數)명사가 아닙니다. ‘사랑을 준다’나 ‘자비를 행한다’와 같은 어찌 보면 구름 잡는 듯이 보이는 행위동사가 ‘배려한다’나, ‘친절하게 대한다‘와 같은 좀 더 구체적인 행위동사로 만나 보다 실천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이 험한 세상을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배려와 친절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최근에 영화배우인 박중훈의 인터뷰 기사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문구가 있어 여기에 올립니다.
-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 박중훈(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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