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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차르. 예카테리나 2세
영국의 실험적인 산문 작가, 토마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는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현대사에서, 아마도 좀 더 넒게 보면 역사 전체에서, 그 옛날의 기록들을 통틀어서 보더라도, 지난 세기 후반 타타르 제후국이 경계가 없는 아시아의 초원을 건너 동쪽으로 건너간 것보다 더 대단한 사건, 일반적으로 좀 덜 알려졌지만 그토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건은 없었다……그 시작의 갑작스러움과 그 실행의 엄청난 속도에서, 우리는 그런 이동을 감행한 이들의 거칠고 야만적인 특성을 읽는다. 이 무모한 의지들을 연결하는 목적의 단일성 속에는, 그렇게 먼 목적지에 대한 맹목적이지만 정확한 목표 속에는, 제비나 나그네쥐의 이동을 추동하는, 혹은 삶을 소진하면서 진행되는 메뚜기 때의 행진을 추동하는 본능을 상기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준가르의 종말. 하나의 이야기에서 이는 결말에 이르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이야기에는 에필로그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마지막 일의 마지막 결말은 토구트의 귀환입니다.
과거 오이라트의 토구트 인들은, 준가르를 비롯한 무리들의 격변을 피해 자신들이 평화롭고, 또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을 찾아나서 중국의 멀고 먼 서쪽으로 이주했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 국가들은 볼가 강 하류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토구트 인들은 독립적인 위치에서 차르에게 충성 맹세를 함으로서, 자신들만의 삶을 영위해 나갔습니다.
준가르가 청나라와 겨루는 시기동안, 토구트의 무리는 때때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체왕 랍탄 - 갈단 체링의 시기 동안 준가르는 옹정제의 군단을 대패시킬 만큼 강력했고, 그 이후 준가르의 대혼란기에는 청나라와의 전쟁이 너무 격렬하여 초원의 상황이란 너무 불안정했습니다.
평화를 위해 고향까지 버리고 서쪽으로 떠났던 그들이, 이제와 다시 한번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것은, 제국 러시아 때문입니다. 18세기 되면서 러시아는 점점 더 거대한 힘으로 토구트를 짓눌렀고, 자신들의 전쟁에 수많은 토구트 기병이 참전하길 원했습니다. 러시아와 토구트의 관계는 따지자면 중국 왕조와 이에 신종하는 이민족들의 기미 지배체제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보다도 좀 더 토구트는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과도한 군역의 요구는 매우 부담스러웠습니다.
러시아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래에서 위풍당당한 시기를 보일 당시, 제국의 한 귀퉁이에서는 그 압력에 신음을 흘리고 있는 토구트가 있었습니다. 1762년, 여제는 토구트의 칸이 자유롭게 자문 위원을 선정할 수 없게 하여 목줄을 죄었고, 1768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칼무크 기병을 더 많이 요구하자, 더 이상 토구트도 참지 못했습니다. 러시아는 토구트를 그저 자신들의 사냥개 이상으로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제가 무책임하게 요구한 병력은 41,523개의 천막으로 이루어진 2만여 기병. 이는 토구트 무리의 숫자를 고려해볼때 엄청난 비율이었으며, 만일 이에 응할시, 탐욕스러운 눈으로 토구트를 바라보고 이쓴 카자흐나 쿠반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단에 대해, 러시아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토구트의 우바시는 살기 위해, 탈주를 계획했습니다. 칼무크의 유력 귀족 체벡 도르지는 다른 칼무크 귀족들을 소집하여, 이러한 의사를 전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여러분의 권리는 러시아인들에 의해 제한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관리들이 칼무크를 학대할 뿐만 아니라, 정부 자신도 이 독립적인 초원 민족을 농민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야이크 강둑은 코사크 요새들로 덮였고, 북쪽 경계에는 이주해온 독일인들이 정착 했습니다. 이제 곧 여러분들은 돈(Don)과 테렉, 쿠마와 볼가 및 다른 거주지들에서 강제로 분리될 것이고, 여러분의 유목 생활은 물도 없는 지역에 한정되어 가축들은 죽을 것입니다. 미래에, 여러분은 노예의 굴레 아래 굴복하거나, 러시아 차르가 여러분을 죽이기 전에 재빨리 떠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결정이 여러분의 운명을 좌우할 것입니다."
기회가 보였습니다. 1771년, 제국은 오스만 원정에 투입되었던 군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이에 우바시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했습니다. 당초에, 그는 볼가 강 서쪽의 남은 칼무크 인들이 모두 이 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조금 기다리려고 했지만, 러시아 지사가 그 계획을 눈치해버렸고, 일정을 본래보다 앞 당겨 출발했습니다. 1771년의 1월 5일, 3만이 넘는 천막에 최대 17만이나 되는 토구트 인들이 준가르 땅으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몇몇은 이동에 참여하지 않고 남았습니다.
그 이후의 일대기는, 아마도 역사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장렬한 오디세이의 순간이었습니다. 분노한 여제는 이 탈주자들에 대해 잔인한 운명을 선사했고,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러시아 군의 공격에 저항할 방법이 없는 여자들과 어린이들이 죽어 나갔고, 지친 몸을 기울여 잠시 쉴 틈을 찾으면, 늑대같은 카자흐 족이 습격해왔습니다. 초원의 겨울은 몸서리 칠만큼 무시무시했으며, 혹한속에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이름조차 없는 차가운 들판에서 쓰러져갔으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어나갔습니다.
잠시 멈추어 휴식을 취하고 세력을 정비하는 동안, 카자흐 족은 무리를 포위했고, 지칠대로 지친 토구트 인들은 무기를 제대로 들지 조차 못한채 일방적으로 학살되었습니다. 그 모든 시련과 재앙을 견뎌내고, 이리 지역으로 접어든 일행은 이제 1만 5천개의 천막에 7만명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최대 10만여명의 사람들이 끔찍한 여정을 견뎌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저 자유롭고 싶었던 일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잔혹한 요구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초에 토구트는 중국에 항복할 생각 따윈 없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단지 준가르의 땅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친 눈꺼풀을 들어 바라본 고향의 대지에는 방랑자들을 위한 땅은 없었습니다. 준가르는 절명 당했고, 그들에게 있어 가증스러울 카자흐인들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러시아의 요새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국경을 이루고 버텼고, 초원과 멀지 않은 오아시스에선 무슬림들이 곱지 않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토구트는 10만의 희생을 내고 러시아라는 가공할 촉수를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것은 그저 중국의 수렁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당초 청나라 역시 이 방랑자들에 대해 극도의 의삼과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많은 대신들이, 이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러시아와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캬흐타 조약에 의거하자면, 양대제국은 국경을 넘은 '범죄자' 들을 본래의 영역으로 돌려 보내야 했으며, 러시아는 군역을 팽개친 '부랑자이자 반역자'인 '러시아의 백성'들을 청이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청나라에 백마를 바치는 카자흐
카자흐의 아블라이 역시 청을 부추기면서, 그들이 사악한 이빨을 들이대기 전에 청이 먼저 그들을 응징해야 한다고 은근히 바람을 넣었습니다. 많은 관리들이 러시아와의 문제 외에 수만명을 받아들일 경우 소모될 재물, 또 그들이 진심으로 항복하는 지에 대한 회의때문에 이들을 받아들이기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눈도 깜짝하지 말고, "왜 더 죽이지 않는가?" 라고 일갈하며 수십만명의 준가르인을 학살했던 건륭은, 이제는 상당하 완고하게 그들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습니다. 이 오만스러운 사나이가 서로간의 자존심이 부딫히는 문제에서, 러시아의 여제 따위를 안중에 두었을리 만무합니다. 건륭은 카자흐의 아블라이에게 "혼산 중에 한몫 건지려는 낚시질" 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는,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무렵의 건륭제는 스스로 문수보살로 까지 묘사되고 있었고, 살아서 신이 되려고 하는 사나이가 자비를 베풀겠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감히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즉시 안시, 바르콜, 우루무치에서 20만 냥이 보내어져 지칠대로 지친 토구트인들을 구호하는데 쓰여졌으며, 1만 마리의 소, 말 , 양, 그리고 2만여 봉의 차, 4만 석의 쌀과 보리, 5만여 벌의 양털, 10만여 근에 가까운 면포 등이 지원되었습니다. 베이징의 황궁에서는 그들을 환영하는 거창한 잔치가 벌어졌고, 제국의 여러 고셍서 황제의 자비심을 찬미하고, '완전히 자발적' 이었던 토구트의 귀환이 자비롭고 위대한 황제를 지지하는, 하늘의 명백한 징후라고 찬양 하였습니다.
'사악한' 한 민족이 말살되었고, '순박하고 자비를 갈구하는' 다른 민족이 소생하여, 보금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말살 후에 재생이 왔고, 이는 제국의 기획으로서는 만족스러운 결말이었습니다. 현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칼무크의 이주를 거대한 중화가 잃어버린 민족들이, 러시아의 압제를 피해 다시 자비로운 청의 품으로 돌아온 필연적인 '귀환'으로 파악했습니다.
비단 중국의 이야기만은 아니겠지만, 사실의 역사에 '역사 관념의 이데올로기' 라는 이념의 첨가물을 쓸모없을 정도로 덧붙이길 즐겨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이 일에 대해 '돌아왔다' 는 표현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민족 국가 아래서의 통합을 묘사하는 수사로 간주했습니다. 최근 '통합' 과 '화합' 을 기치로 중국에서는 강 - 옹 - 건 시대의 번영과 다민족적 경향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이에 따라 나오는 수많은 책들에서는 '통합' '통일' '화합' 이라는 단어를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강조하며 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의 이야기에서는, 이 왁자지껄한 에필로그의 마지막 그림자까지는 언급하지 않는것이 일반적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 민족,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청. 아름다울것 같은 뒷 이야기에는, 장기적으로 번영하지 못한 토구트의 실체가 가려져 있습니다. 물론 토구트를 이끈 우바시에 대해, 이를 축복하는 요란스러운 잔치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많은 선물이 주어졌지만, 그는 더 이상 자기 백성들의 책임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토구트는 자유를 찾아 왔지만, 청은 몽골이 더 이상 제국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신장 북부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분산된 내 개의 연맹 아래서 10기로 분할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강제로 농사를 강요당했습니다.
1777년에 이를무렵, 청나라의 관료 치스이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토구트의 많은 이들이, 장정들은 도적으로, 여자들은 몸을 파는 창부가 된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떠난 이들이 옳은 선택을 한 것인가? 남은 이들이 옳은 선택을 할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이 마지막 자유 유목민들이 거대한 농업 제국들의 치하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키메르 인들을 쫒아낸 스키타이의 일부가 BC 678년 앗시리아 제국과 격돌한 뒤로 벌어진 세상의 두가지 큰 흐름, 문명과 야만, 정주와 유목, 성벽과 대지, 붓과 칼, 거대한 수로와 끝없는 초원의 대결에서, 전자가 승리하고 후자의 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림을 의미했습니다. 세계는 좁아지고 있었고, 하나의 가치로 통합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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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으헝.. 유목민족의 끝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