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국민배우 고 김수미님의 부음에 부쳐
아침에 뜬금없는 일용엄니의 부음을 듣고 적이 놀랐다. 아직 가실 연세가 아닌데 말이다. 고인은 늘 우리들 곁에 계신 엄마와도 같은 분이셔서 더욱 허탈하다. 존재감은 어느 스타 못지않았지만 화려한 조명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는, 그래서 별이 졌다는 느낌보다는 가까운 가족어른 중에 한분이 우리 곁을 떠나셔서 밀려드는 허전함과 같은 기분이다. 달리 ‘국민 엄마’이겠는가.
나는 언제부터인지 문상을 하면 버릇처럼 고인의 향년을 따져보는 습관이 생겼는데, 호상(好喪)인지 아닌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일용 엄니 김수미씨는 향년 75세로 안타까운 나이에 속한다. 85세에 가셨어도 상주에게 천수(天壽-타고난 수명)를 누리셨다고 인사하기가 어색한데, 고인은 그보다 10년이나 일찍 뜨셨으니 더욱 슬프다.
고인께서 고정배역으로 출연한 전원일기는 1980년 10월에 첫 방영이후 22년간이나 장수한, 농촌의 훈훈한 인정을 바탕으로 최불암-김혜자 부부의 김회장댁과 홀어머니 일용엄니(김수미분)댁 복길네를 주된 무대로 펼쳐진다. 대한민국 역대 TV 드라마 최장수 방영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광복 70주년인 2015년에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광복이후 최고의 TV프로그램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한 걸작으로 국민 드라마였다. 일용엄니 김수미님의 감칠맛 나는 연기 덕분에 드라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농촌 마을 느낌으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에 마을마다 한분쯤은 계셨던, 동네의 누구네 집 기일까지도 기억하시던 감초 할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셨으니, 2위를 차지하는데 일용엄니의 공이 크다 할 것이다
전원일기는 6,70년대에 너도나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던 이촌향도(離村向都) 대열에 합류하여 고달픈 도시생활로 지쳐갈 무렵, 고향에 대한 향수는 물론 농촌마을의 훈훈한 인정과 가족애 등을 담아내는 휴먼 드라마를 지향하였다. 당시에 사극을 제외한 대부분의 극들이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사랑타령이 주제인데,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는 이 드라마는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복길이 할머니요 일용엄니였던 고 김수미님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치던 연기는 흑백TV시절에 처음으로 전파를 타서 컬러TV시대를 거쳐 인터넷시대까지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남을 기간 동안 이어졌다.
나도 가끔 즐기던 드라마로, 고인을 추억할 만한 몇 장면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1981년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홀트아동복지회]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때만 해도 입양에 대한 인식이 그리 너그럽지 못했던 시기로, [버려진 아이]라는 제목으로 김회장 댁에서 금동이를 입양하는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몇 년이 지나서 금동이가 8살 정도 되었을 때, 홀연히 낳은 엄마가 나타나 기르는 엄마(김혜자)와 방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일용엄니가 중간에 끼어들어 생모를 몰아 부치듯 친자식을 데리고 갈 생각인지 아닌지를 묻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극작가가 일용엄니에게 시청자들의 속마음을 분출시키는 대사를 많이 써주는 듯,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릴 때도 있었다. 극중에 늘 천연덕스러운 행동이나 웃음을 머금은 장난끼 가득한 말투, 하지만 이웃에게 속 깊은 정을 나눠주는 모습은 온 국민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전원일기를 시청하면서 각인된 고인을 추억할 만한 몇 장면이 더 있다. 아들 일용이 장가가는 날에는 며느리가 올리는 술 한 잔 드시고, “가난한 집에 시집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모습(나는 그 대사가 솔직한 표현이지만, 일용엄니답지 않은 저자세로 너무나 의외였기에 기억한다.)과 밤 대추를 며느리 치마에 던지는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또한 동네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차려준 당신의 회갑잔치에서는 아들 일용이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청상과부가 되어 홀몸으로 행상하면서 외아들을 키우느라 고통스러웠던 지난날들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시청할 때는, 나 역시 4촌 동생 몰래 눈물을 훔쳤던 생각이 난다.
동네 사람들이 서울 나들이 하면서 저녁에 모두 뿔뿔이 자식들 집으로 가서 1박하는 프로그램에서는, 갈 곳이 없는 일용 엄니를 김회장 최불암이 모셔가서 포장마차에서 한잔 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도 생각나고(어른 말괄양이였던 일용엄니가 동네 유지이자 식자인 김회장 최불암 앞에서 다소곳한 모습을 그려내는 그 연기력에 감탄해서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라디오를 머리맡에 두고 다리 구부려 누워있는 모습은 그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아들인 일용이(박은수분)가 실제는 2살이 더 많다는데, 31세에 마을청년 일용이 어머니 역할을 그리도 자연스럽게 소화하셨으니 ‘국민 엄마’ 칭호를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다. 여자 출연진 중에 누구보다도 몸빼 바지가 잘 어울렸다.
전원일기는 항상 까치 짖는 소리나 수탉 울음소리로 이른 아침임을 알리고, 소울음 소리로 나른한 오후임을 묘사하고, 때로는 워낭소리로 농촌의 고즈넉함을 그려낸다. 그리고 일용 엄니가 회장님 댁에 가서 용식엄마(김혜자분)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날의 주제를 슬쩍 던지는 말을 자주 하셨다. 약방의 감초 그 이상이며 주연 옆에 조연이 아니라, 조연인 듯 주연을 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우연히 코믹영화 [가문의 영광] 시리즈를 감상한 적도 있었는데, 김수미님은 아들 3형제가 모두 조폭인 어머니 역할로 어쩌다 검사 며느리를 맞이하는 내용도 있었으며, 세 아들 중 한명이었던 배우 신현준과는 [맨발의 기봉이]라는 영화에 나란히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구수한 충남 서산 사투리로 장애아 엄마의 가슴 뭉클한 자식사랑을 그려냈다. 이 영화는 관객 260만 명을 동원한 흥행작이다.
나는 뮤지컬 [친정엄마]로 고인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다. 중심인물인 봉란역으로 등장하는데, 스토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친정엄마, 언제나 당신 딸인 내편이 되어주는 친정엄마, 내가 죽을병이 걸려서도 제일 먼저 찾는 그 친정엄마의 속 깊은 사랑을 온몸으로 토해내는, 말괄량이 딸이 엄마가 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엄마의 마음을 알아가는, 나이가 들면서는 누구나 공감하는, 신파극과 같이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한 슬픈 내용으로 눈물을 빼는 구성이다.
노래는 기존의 대중가요를 편곡해서 관객들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게 했다는 점도 특이했고, 무대세트에 메주와 옥수수를 매달아 강원도 산촌 풍경으로 그렸는데, 왼편에 요강이 보여서 극중 양념으로 친정엄마 김수미님이 [쉬]하는 장면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보았다. 김수미님의 연기와 노래에 수많은 여성관객이 눈물을 흘린다. 암으로 죽어가는 딸 봉란(김수미분) 앞에 하얀 소복을 입은 친정엄마가 등장하여 “이제 가자!”라는 말을 던지는 장면에서는 모든 관객이 눈물과 함께 숙연해진다.
고인은 전원일기에서 일용엄니로 고착화된 이미지를 얼마나 깨고 싶었을까. 나 역시 영화와 뮤지컬을 보면서 일용엄니가 아닌 배우 김수미의 연기 폭을 가늠할 수 있었다. 동료와 후배들이 평한 고인의 인품이나 연기 평을 보면 그분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배우 최불암님은 “김수미 씨가 어린 나이에 미모가 뛰어났다. 근데 그 나이에, 그 얼굴로 노인네를 묘사해 낼 줄 알았던 창의적인 연기력을 가진 배우였다. 김수미씨는 어린 나이에 자기 외모를 내려놓고 성격적인 연기를 해냈다. 연기자로서 상당히 우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들 일용이 박은수씨는 “아주 훌륭한 배우였다. 연기력과 순발력이 정말 뛰어났다. 앞으로 그런 배우 나오기 힘들다.” 나는 TV를 15년째 보지 않으니 [수미네 반찬], [회장님네 사람들] 등 수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고인의 최근 행적은 전혀 모르지만, 분명 이 시대의 극판에 한 획을 그은 대배우임에는 틀림없다.
님께서는 이제 한줌의 재로 남겨집니다만,
대한민국 모든 이의 가슴에 사랑을 심었습니다.
연기자로서의 일생을 훌륭하게 마쳤습니다.
여러 인물을 창조해낸 님께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일용 엄니! 복길이 할머니! 기봉이 어머니! 김수미님! 김영옥님!
당신께서 보여주신 삶에 대한 열정은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또한 그 푸근한 모습은 저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겁니다.
♥사랑합니다.!♥ 이제 가시렵니까,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202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