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둘 걸 그랬나봐 외 4편
아무리 조물러도 예쁘질 안아
아무리 빚어봐도 어색해 보여
아무리 만져 봐도 맘에 안들어
손을 타면 탈수록 버스러지는 마음
생긴 대로 그대로 그냥 둘 걸 그랬나봐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 맞히며
시간이 가면 가는대로 본래 있던 그대로
놔 둘 걸 그랬나봐
손 탄만큼 꼭 그만큼
망가진 모습 보며
차라리
돼가는 대로 그대로
놔둘 걸 그랬나봐.
동충하초冬蟲夏草
1.
내 몸 홀씨 되어 하늘에 뜨리
드넓은 바다에 섬처럼 내려
가없는 이 세상 머물 수만 있다면
장승처럼 굳게 뿌리 내리리
2.
바람에 맡긴 육신
밀리고 밀려 출렁 넘은 날짜변경선
지금 지나온 곳은 이미, 어제
눈앞에 펼쳐진 대지는 미래
그 땅에 길게 그늘진 내 그림자
내 갈 길 앞서 간다
3.
지금 너의 현실은 나의 과거다
매일 반복되는 저녁
무성했던 나뭇잎 땅으로 떨어지고
바람 불 때마다 들춰지는 낙엽들
일렁이는 가슴 부활한 미망
그 바람결에 영그는 홀씨
4.
고개를 숙이면
다가오는 서늘한 눈빛
붙잡을 것 하나 없는 검푸른 공간
창공으로 튀어 오른 홀씨 하나
두 손 꼭 쥐고
죽을 수는 있어도 잊을 수는 없어
5.
햇살 눈부시게 달려든 날
태양을 보고 마주 섰지
아무리 달려간들 미래는 황무지
살아있어도 죽었다면
욕망으로 아롱진 편린 모두
슬픔의 파라다이스
6.
오늘이 오늘, 소멸한다 해도
뿌리내릴 대지 단 한곳 없어도
꿈 너와 나 내일
살아 있음의 의미, 단 한 올 굳게 품고
투신한다
검푸른 감옥 시공간 속으로
내 몸 다시 홀씨 되어.
〈2024.08.01.교정본〉
바람 불어와
들판 저쪽
산기슭에서 일어난 큰 바람이
벼이삭 누렇게 펼쳐진
들판에 달려들어
비질하듯 어느 날 벼이삭을 쓸고 가는데
벼이삭들 그저
가지런히 고개 숙여 받아들인다
하늘 바람 불어올 때마다
골 성긴 비질에도 번번이 수그리는 벼이삭들
그때마다 그 바람 다 지나도록
눈빛 착한 벼이삭들 또 볼 수 있을까
바람은 왜 불어와.
점순이
-달 항아리
봄날 아침
신 새벽 찬 기운 가신 바로 그때 태어났대
산山 울타리 막 넘어 온 햇살이
활짝 기지개를 켤 때래
밤이 다하도록 달을 품었다고
이름이 전부 ‘달항아리’ 래
어릴 땐 잘 몰랐어
그냥 먹고 놀고 자고
누가 특별히 챙긴 것도 아니고
둥글둥글 그렇게 자랐어
근심걱정
그런 거 몰랐어, 근데
중신아비 들락거린 그 날
비로소
알게 됐어
까만 점 있는 애가 나래
내 생전
볼 일도 없고 본적도 없는
내 뒤 태
그 때부터
날 보고 ‘점순이’래
그날 밤
점 하나 빼겠다고
열락의 숨결 가쁘게
목울대 쓰다듬던 바로 그 때
바람 한 줄기 너울너울
달빛 머금고 다가와
‘새 세상이 있어’ 그랬어
그랬지
그가 왔대, 오늘
출렁이며 두둥실 물 위에 내린 달
새 세상에 둥지 틀
점순이를 맞이하러, 그래
그가 왔대.
《프린키피아(Principia)》
우주는 만유인력이란다
달을 끌고 죽자 살자 태양에 따라붙는 지구는
거침없이 나선형 트랙을 그려가며
무한 공간을 헤집는데
그 시종始終은 가히 신적 영역이다
남극과 북극이 있고
낮과 밤이 교차하며
계절이 바뀌는 지구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신적 오지랖이다
그 물체에 얹혀사는 생명체들
살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대수로울 것 하나 없는 인간은
한도 끝도 없이 겸허해야 한다
문명은 독毒으로
문화는 해악害惡이 된
인간의 욕망이
어느 날
《프린키피아(Principia)》에
신적 의도를 다 까발려 놨다
인류의 위대한 샤먼(Shaman)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 -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를 출간했다(1687년). 일명 《프린키피아
(Principia)》로 불리는 책이다. 이 책에는 ‘만유인력’과 뉴턴의 3대 법
칙으로 불리는 ‘운동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관성의 법칙’이
담겨 있 었다.
권녕하權寧河, 호 용강龍江, 저동苧童, 갯벌, 한강韓江
한강문학회 회장, 《한강문학》발행인겸편집주간. 《교단문학》詩부문 등단(박화목 추천, 91년),《해동문학》천료(성기조, 정광수). 저서:詩集《숨어 흐르는 江》, 劇詩集《살다 살다 힘들면》,산문집《겨울밤, 그 따뜻한 이야기들》 외, 역서:《세일즈맨의 죽음》(A.밀러), 《파리떼》(J.P.싸르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