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여인들 열하고 여섯번째 인물은 마리 퀴리를 소개합니다..
요즘 엘양... 개인적인 일때문에 너무나도 책을 멀리한 죄...정말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 퀴리 누구나 알만한 여인이지만..그녀를 안올리면...엘양이 넘 속상한 관계로
여기 그녀 20세기를 연 천재 과학자로 그녀를 당당히 올립니다..

마리 퀴리(1867~1934) 결혼전 이름은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다
그녀는 폴란드 사람이다. 지적이고 강직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했던 교사 부부의 많은
자식중 하나로 태어난 마리는 어릴때부터 비범한 소녀였다.
그녀는 또래보다 2~3년 정도 빨리 정규 학업과정을 마쳤고 월반을 거듭했다. 그 결과 마리는
열여섯 살에 고등학교과정을 모두 마쳤으며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러나 천재적이며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렬하던 그녀 앞에 경제적인 문제가 벽으로 다가왔다
저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에서 여자의 입학을 허가하는 대학은 없었다.
더 공부를 하려면 유학을 가야만 했지만 마리의 집에서 마리를 뒷바라지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마리는 좌절하지 않았다.
마리는 언니 브로냐와 재미있는 약속을 한다 마리의 언닌 브로냐도 뛰어났지만
경제적 조건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였다. 마리는 당분간 가정교사로 돈을 벌어 브로냐의
유학자금을 대겠으니 대신 언니가 대학을 졸업하고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학비를 조달하라고
제안을 하것이다.
언니 브로냐는 파리 소르본대학에 입학을하고 4년뒤 의사가 된다. 그리고 마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녀를 파리로 부른다. 마리는 꿈에도 그리던 공부를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녀의 사랑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고 오랫동안 갈망하던 공부다 보니 마리의 관심을 끈것은 오로지 학문뿐이었다.
파리 빈민가의 춥고 좁은 방에서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배움의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마리는 결국 물리학과 수학과정을 모두 수석으로 조업한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연구였고 이 독특하고 천재적인 그녀에게 많은 남성들이 구애하였다.
오로지 공부에만 정열을 쏟고 있는 쌀쌀한 그녀 땜문에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한 감상적인 청년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때도 그녀는 그 청년에게 냉담하게 '당신이 우선 될 차례가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마리의 연구소에서 여덟 살 연상의 한 남자를 만났다.
피에르 퀴리였다. 그는 그녀에게 값싼 연애감정을 구걸하기보다는 연구와 학문의
동지로서 다가왔다. 함께 실험을 하면서 마리는 피에르 퀴리에게 따뜻한 실뢰와 동지애를
넘어선 사랑을 느끼게 된다.. 강렬한 연구욕과 단출한 일상생활까지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한다.
마리와 피에르의 결혼은 이상적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실험실은 지붕이 뚫려 비가 샜고 겨울에는 난방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나날이 새로 배우고 발견하는 기쁨이 퀴리 부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최초의 여성 노벨상
퀴리 부부 사이에서 두명의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이류 문명의 새로운 변화를 신호탄을 올리는 두가지 광물. 즉
풀로늄과 라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퀴리 부부는 우라늄으로부터 더 강력한 방사능을 가진 라듐을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 상태의 원자력을 컨트룰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이 거대한 발견으로 쿠리 부부는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탄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불행
그러나 두사람에게 불행은 피에르 퀴리의 죽음이었다
1906년 봄 피에르 퀴리는 마차에 치여 즉사하고 만다.
그것은 마리 퀴리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연구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대학의 교수가 된 그녀는 실험을 계속 이어나갔다.
1908년 소르본의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 방사능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간했고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한 공로로 화학 분야에서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다..
소르본 최초의 여교수였던 마리의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언제나 남편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한다.
마리 퀴리는 피어르 퀴리와 자신의 연구를 자기들의 것으로만 돌리지 않았다..그녀가
연구 행한 모든 실험과 결과는 아무런 조건 없이 개방되었다.. 열악한 환경의 실험실에서
방사능에 노출되며 고생스럽게 이루어낸 모든 업적을 인류에게 돌린것이다..
그녀는 뢴트겐이 발견한 X선과 자신이 발견한 방사선을 이용해 전쟁에서 부상당한 많은
병사들을 직접 병원에서 치료하였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오로지 연구 속에서 기쁨을 찾으며 그 결과 또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돌리지 않았던 마리 퀴리는 1934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한다..
인생은 그 어떤 것도 두려워 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다만 이해되어야 할뿐이다 -마리 퀴리-
꼭 종교에서 순교가 있는건 아닌것 같다...한분야 한가지에 이렇게 맹목적으로 열정을
보여줄수 있다는 것에 대단한 찬사를 안보낼수가 없다...
그녀..마리 퀴리 그녀 인생에 처음이라는것을 발견하는 기뿜을 알고 그것을 부로 생각하지 않고
연구 결과에 순수한 기쁨으로 표현했기에 소유욕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순수한 열정에 엘양~~ 또한번 가슴깊이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