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와 배구는 국내 겨울철 스포츠를 대표하는 종목이다. 1990년대를 앞뒤로 농구는 농구대잔치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허재(43,전주 KCC 감독), 강동희(42,원주 동부 코치), 문경은(37,서울 SK), 이상민(36,서울 삼성), 우지원(35,울산 모비스) 등 당시 실업과 대학에서 뛰던 선수들은 구름 관중을 몰고 다녔다.
그 무렵 농구대잔치 못지 않게 팬들의 인기를 모은 게 1984년 시작된 대통령배배구대회다. 남자배구가 절정의 인기를 끌던 시절 최고의 스타는 호쾌한 백어택과 돌고래 서브를 터뜨리는 장윤창(48)이었다.
“체육관에 꽉 찬 관중을 보고 ‘어떻게 하면 좋은 볼거리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윤창의 기억이다. 이제는 유니폼과 배구화를 벗고 교수가 됐지만 아직도 장윤창하면 많은 이들이 돌고래 서브와 백어택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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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창은 1993년 10월 광주에서 열린 제74회 전국체육대회를 끝으로 정든 유니폼을 벗었다.
사진 김수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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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소년 11살 까까머리 소년 장윤창은 운동에 소질이 많았다. 그 무렵 어떤 운동을 해도 또래보다 잘했다.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던 안양초등학교를 다닌 장윤창은 교내 체육대회에서 다른 아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달리기 실력을 보였다.
체육선생님은 장윤창에게 육상을 권했다. 운동을 좋아했던 장윤창은 거부감 없이 선생님의 뜻에 따랐다.
그때 학교에 핸드볼부가 생겼다. 장윤창은 육상부 친구들과 함께 핸드볼공을 잡았다. 장윤창이 뛰는 안양초등학교 핸드볼팀은 곧 도내 최강으로 자리 잡았다.
1972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1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 준우승했다. 핸드볼 꿈나무 장윤창은 안양중학교로 진학했다. 안양중은 핸드볼팀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장윤창과 동기들은 안양중 핸드볼팀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학교에서 핸드볼부를 없애고 축구부를 만들었다. 핸드볼선수였던 장윤창은 갑자기 축구화를 신고 공을 찼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까지 축구선수로 뛰었다.
“그때 집에서 운동하는 것을 반대했다.” 3남1녀 가운데 막내인 장윤창은 운동이 끝나면 온 몸에 흙을 뒤집어 쓰고 집으로 갔다. 공을 차고 태클을 하느라 양쪽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다.
“매일 상처가 나고 피를 흘리며 집에 가니 어머니가 ‘당장 운동을 그만두라’고 하셨다.” 고민 끝에 축구화를 벗었다.
배구공과 만남 그리고 태극마크 책상에 앉아 있는 장윤창을 주위에서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장윤창의 운동 소질을 눈여겨본 체육선생님이 전학을 권유했다. 핸드볼도 축구도 아닌 “배구를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장윤창은 송산중학교로 전학가 배구부에 들었다. “핸드볼을 할 때 슛을 쏘기 위해 점프를 해야 하는데 배구도 점프가 기본인 종목이 아닌가. 내게 잘 맞았다.” 핸드볼을 하면서 익힌 균형감각과 육상부에서 배운 멀리뛰기와 높이뛰기 기술이 배구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배구를 하면서 처음 맡은 자리는 세터였다. 3학년 선배 가운데 세터가 없어 유일한 2학년이던 장윤창이 세터 자리에 섰다. 세터가 주 포지션이긴 했지만 센터와 라이트에서도 뛰었다.
배구공을 잡자 키가 부쩍 크기 시작했다. 기량도 늘었다. “그때 1년에 10cm 이상 키가 컸다. 어릴 때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크지도 않았다. 그런데 중3 때 186cm가 됐다.”
구력은 짧았지만 중3 때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1977년 브라질에서 열린 제1회 세계남자청소년배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그 대회에서 한국은 옛 소련, 중국, 브라질 등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인창고에 입학하면서 장윤창의 키는 190cm를 넘었다.
이때 장윤창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당시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고 있던 박진관 감독이다. 박감독은 1978년 9월 이탈리아 안코나에서 열린 제9회 세계남자배구선수권대회 출전 대표팀에 장윤창을 뽑았다.
고교 2학년인 장윤창의 대표팀 선발 소식은 배구계에 충격이었다. “나도 믿지 못했다. 주변에서 내가 대표명단에 포함된 걸 놓고 말들이 많았다. ‘경험이 없는 선수를 왜 데려가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박감독은 안정 대신 ‘모험’을 택했다. 대표팀 막내 장윤창을 선발 멤버에 넣었다. 이인, 강만수, 정강섭, 강두태(1991년 작고), 김호철(현대캐피탈 감독) 등과 함께 뛰었다.
“주장 이인 선배가 나를 가장 많이 챙겼다. 다른 선배들도 막내인 나를 무척 귀여워 했다.” 장윤창을 비롯한 한국선수들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펄펄 날았다. 빠른 공격과 몸을 날리는 수비,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조직력으로 상대팀의 혼을 뺐다.
한국은 그 대회에서 역대 최고 성적인 4위를 기록했다. “고교생으로 국가대표팀에 뽑힌 건 내가 처음은 아니다. (강)만수 선배도 고등학교 때 대표팀에 선발됐다. 선발 멤버 6명에 들어간 건 실력보다는 운이었다. 박감독님이 기회를 줬고 나는 그 기회를 잘 살렸다. 대표팀에서는 센터를 봤다. 그때 내 키가 193cm였다. 그런데 당시 남자대표팀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여자대표팀이 우리보다 몇 걸음 더 앞서 갔고 인기도 많았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기 때문에 더 그랬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위를 기록한 멤버들은 1년 뒤 다시 팀을 꾸려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10회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했다. 한국은 쿠바와 일본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67년 도쿄에서 열린 제5회 대회에서 여자농구가 금메달을 획득한 지 12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장윤창과 태극마크의 인연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까지 계속됐다.
그 사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한국은 메달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결승에서 한국과 만나는 걸 꺼린 미국이 조별리그에서 브라질에게 0-3 져주기 경기를 하는 바람에 조3위가 돼 준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5위에 그쳤다.
“그때가 가장 아쉽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안방에서 열린 대회라 좋은 성적을 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 대표팀은 역대 최강이다. 그때 멤버로 현재 대표팀과 맞대결을 하면 이길 자신이 있다(웃음). 기억에 가장 생생한 경기는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예선전이다.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예선전이 있었는데 주최국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3-2로 역전승했다. 경기의 세세한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신생팀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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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창은 신생팀과 인연이 깊다. 송산중과 고려증권 창단 멤버였다.
사진 김수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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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창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유니폼이 있다. 흰색과 파란색, 빨간색이 섞인, 이제는 없어진 고려증권 유니폼이다. 장윤창이 대학 졸업을 앞둔 1983년 창단한 고려증권은 팀을 만들 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고려증권 이강학 회장은 오관영 단장에게 ‘장윤창을 데리고 오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대학배구 최대어로 평가받은 장윤창을 잡기 위해 실업팀들은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금성통신(현 LIG 손해보험), 대한항공, 한국전력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장윤창 잡기에 열을 올렸다.
이보다 4년 전 장윤창은 비슷한 경험을 이미 했다. 인창고 졸업을 앞둔 장윤창은 ‘세계 4위’라는 대표팀 성적에 실력까지 검증됐기 때문에 주가가 하늘을 찔렀다. 장윤창을 놓고 실업팀과 대학팀의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다.
장윤창을 포함한 인창고 선수들은 서울대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일이 틀어졌다. 인하대, 경기대 등 대학팀들이 장윤창의 서울대행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틈을 타 실업팀들은 장윤창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장윤창에게 형의 취직 문제 해결과 집을 사고도 남을 만큼의 돈을 제시했다. ‘아파트를 주겠다’는 팀도 있었다. 그러나 장윤창은 결단을 내렸다.
“서울대로 갈 수 없게 되자 실업팀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갈등을 했다. 그때 ‘떨어진 대학배구의 인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경기대로 진로를 결정했다.”
경기대는 인창고와 같은 재단이라 선수 영입에 유리했지만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인창고도 배구부를 창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뛰어난 실력을 지닌 선수가 적었다. 경기대 배구부는 1966년 창단했지만 얼마 못가 해체된 뒤 1972년 재창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장윤창은 돈 대신 주변 사람들과의 신의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4년 뒤 장윤창은 신생팀 고려증권에 입단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신생팀 현대자동차서비스(현 현대캐피탈) 창단에 관련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독립군도 아니고(웃음). 이상하게 고교 때부터 신생팀과 인연이 많았다. 고려증권에는 중고등학교 동기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배구협회에서 ‘한 팀을 더 만들겠다’고 했다. 그 팀이 현대자동차서비스였다.”
고려증권에 이어 창단을 결정한 현대자동차서비스는 ‘장윤창을 데려 올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난감해진 쪽은 협회였다. 협회는 장윤창을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협회는 장윤창에게 “실업팀에 입단하지 못한 선수들과 함께 현대자동차서비스로 가라”고 말했다.
장윤창을 데려가기로 한 고려증권에 대해선 협회와 현대자동차서비스가 설득에 나서기로 했다. 장윤창을 두고 스카우트 파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협회와 현대자동차서비스가 해결한 건 없었다. 현대자동차서비스가 내게 준 계약서는 집에 있었다. 나는 ‘고려증권을 떠나 현대자동차서비스에 입단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의사를 밝혔다.”
장윤창을 잡기 위해 백지 계약서를 건넨 현대자동차서비스는 속이 탈 노릇이었다. 선수단을 다 꾸려 놓은 상태라 장윤창이 오지 않는다고 창단 계획을 뒤집을 수도 없었다. 결국 강만수가 현대자동차서비스 유니폼을 입는 것으로 결정됐다. 장윤창의 영입 전쟁은 그렇게 정리됐다.
원조 오빠부대 고려증권에 입단한 장윤창은 남자배구의 인기를 높이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84년 시작한 대통령배 배구대회 첫 대회에서 베스트6, 최우수선수상, 인기상 등 3개 부문 수상자가 됐다.
제1회 대통령배 대회에는 남녀 실업 16개 팀과 대학 4개 팀 등 20개 팀이 출전해 3개월 동안 경기를 치렀다. 장윤창은 팬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된 인기상에 의미를 둔다. 그가 시도하는 돌고래 서브와 백 어택은 자신을 응원을 하는 팬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장윤창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돌고래 서브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대표팀 주력 선수들은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아 해외 클럽의 영입 제의를 받았다.
박기원, 이인, 김호철, 강만수 등이 이탈리아와 일본 등 해외로 진출했다. 대표팀 막내로 국제대회에서 뛰어난 블로킹 능력과 공격력을 보인 장윤창에게도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그러나 장윤창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1981년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알리 안클럽은 장윤창이 3개월만 뛰는 조건으로 20만 달러(약 2억 원)를 제시했다. 그러나 아랍에미리트연합 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 대한배구협회로 전해진 문서는 장윤창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다. 실망이 컸다. (외국으로)나갈 기회는 쉽게 오는게 아닌데. 3개월만 뛰고 다시 한국에 오면 됐었는데 아쉽다.”
일본에서도 장윤창의 영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장윤창을 둘러싼 상황이 좋지 않았다. 협회는 ‘장윤창마저 외국으로 나가면 대표팀과 국내배구의 구심점이 될 선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해외 진출을 반대했다.
의욕을 잃은 장윤창은 방황했다. 당시 대표팀의 쿠웨이트 전지훈련이 예정돼 있었지만 장윤창은 합류를 거부했다. 지인들의 충고에 마음을 고쳐먹은 장윤창은 대표팀과 함께 비행기를 탔다.
그때 현지에서 치른 연습경기에서 장윤창은 돌고래 서브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았다. 다른 서브보다 힘이 실렸고 속도가 빨라 위력적이었지만 성공률을 높이는 게 숙제였다. 그래서 귀국한 뒤 팀 연습이 끝나면 체육관에 남아 서브 연습을 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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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창(3번)이 1987년 11월 7일 한양대체육관에서 열린 국제배구연맹(FIVB) 주최 제3회 서울국제남자배구대회 캐나다전에서 강스파이크를 터뜨리고 있다.
연합포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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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력과 근력을 키우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차고 훈련을 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성공률이 높아졌다. 1980년 12월 17일부터 다음해 1월 7일까지 네덜란드에서 열린 라보디나모 국제배구대회 때부터 돌고래 서브를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이 서브를 누가 가장 먼저 시도했는지 잘 모르겠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유럽쪽 일부 선수가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시아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84년 대통령배배구대회는 돌고래 서브가 팬들의 기억에 뚜렷하게 남게 된 계기가 됐다. 장윤창은 1987년까지 4년 연속 최고 인기선수가 됐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더 많은 주목을 받은 것 같다. 얼굴이 잘 생기지 않았는데도 팬들이 좋아했다. 마른 편이었던 내가 불쌍하게 보여서 그랬나보다(웃음).”
그 무렵 배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경기가 열리는 장충체육관과 잠실체육관은 만원 관중이었다. 원조 ‘오빠부대’가 이때 등장했다. 창단 2년째를 맞는 고려증권은 대통령배 원년대회에서 막강 전력을 과시했다.
A, B조로 나눠 치러진 조별리그를 거쳐 4강에 오른 팀은 고려증권, 현대자동차서비스, 금성통신, 경기대였다. 현대자동차서비스는 강만수, 김호철, 이인, 문용관(대한항공 감독)을 앞세워 대회 초대 우승을 노렸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서비스는 4강전에서 이종경, 신영철 등이 뛴 경기대에 덜미를 잡혀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장윤창, 류중탁, 정의탁이 활약한 고려증권은 결승에서 경기대를 꺾고 우승컵을 안았다.
“고려증권은 이제 없어졌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일년에 한두 번씩 당시 팀 동료와 후배들을 만난다. 고려증권 때 이야기를 하면 날이 새는 줄 모를 정도다.”
장윤창은 1988년부터 1995년까지 플레잉코치로 뛰었다. 1994년 마지막 우승을 했다. 그때 나이 34살이었다. 성실한 자세와 철저한 자기관리가 없었다면 그 나이까지 뛰기 어려웠다. 장윤창은 청소년대표를 포함해 17년 동안 태극마크를 달았다. 선수 시절 술과 담배, 커피를 멀리했다.
인생 제2막, 그 이후를 위해 “은퇴를 결정하고 난 뒤 한참 동안 ‘앞으로 무엇을 할까’하고 고민했다. 배구를 떠나면 죽는줄 알았다.” 장윤창은 1995년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소속팀에서 플레잉코치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한 도전을 선택했다.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어떻게든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도자보다는 스포츠와 관련된 분야를 공부해 보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장윤창은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했다. 낯설고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랭귀지 스쿨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공부했다. 이후 3년 동안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미국생활을 하면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동네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기부 문화를 알게 됐다. 주변 재미동포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특별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만 했고 그걸 돌려주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했고 2003년 경기대 체육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그리고 장윤창은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과 함께 비영리 봉사단체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배구공을 손에서 놓은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경기대학교 체육대학 4층에 있는 교수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서브와 스파이크, 블로킹을 하던 그의 손가락에는 공 대신 펜이 있었다. 개강 준비에 바빠 보였지만 이제라도 곧 돌고래 서브를 날릴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만약 지금 내가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면 40살이 넘어서도 거뜬히 현역으로 뛸 수 있을 것 같다. 후배 선수들은 자기 관리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한다”
장 윤 창
생년월일ㅣ1960년 9월 10일
신체조건ㅣ194cm/80kg
경력ㅣ경기 안양초-안양중-송산중-서울 인창고-경기대학교- 고려증권-미국 조지워싱턴대-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경기대학교 교수 SPORTS2.0 제 94호(발행일 3월 10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