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산책하는 밤
박정경
어둠이 도시의 소란을 뉘엿뉘엿 삼키고 나면,
밤은 비로소 자신만의 우묵한 숨을 내쉬기 시작한다.
시계바늘 소리가 유난히 선명해지는 늦은 시각,
나는 가벼운 외투를 걸쳐 입고 골목으로 나선다.
밤을 걷는 일은 온전히 혼자만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의식과도 같다.
낮 동안의 거리는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과 자동차가 토해내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번잡함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어딘가로 흩어지고 마모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면 세상은 순식간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화려하던 간판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길가의 가로등만이 둥근 은화처럼 길 위에 온기를 떨굴 때,
비로소 세상은 침묵이라는 옷을 입는다.
나는 이 아늑한 적막 속을 여유롭게 거닌다.
발자국 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고요하게 울려 퍼진다.
저벅, 저벅.
내 발걸음은 마치 세상이 잠든 사이에 몰래 써 내려가는 비공개 다이어리의 첫 문장 같다.
낮의 소음 속에서는 결코 들리지 않던 내 안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이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조용히 고개를 든다.
길가의 스산한 나뭇가지가 밤바람에 흔들리며 스치는 소리,
멀리서 아주 드물게 지나가는 차의 낮게 깔린 엔진음.
이 모든 것은 소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요를 완성하는 섬세한 악장처럼 느껴진다.
적막이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니라,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세상의 나지막한 숨소리로 채워진 공간이다.
걷다 보면 문득 가슴 한구석을 채우고 있던 조바심과 타인의 시선들이 밤공기 속으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너무 많은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를 소모하며 살아간다.
세상의 속도에 맞추느라 정작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조차 잊고 지낼 때가 많다.
밤의 산책은 그 미친 듯한 속도전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작고 정갈한 일탈이다.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차가우면서도 맑은 기운이 가슴 깊은 곳까지 닿아, 낮 동안 엉켜 있던 복잡한 생각의 타래를 차분히 풀어낸다.
고요를 걷는다는 것은 단지 길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무성한 소음 아래 묻혀 있던 내면의 가장 진실한 나와 조용히 눈을 맞추는 시간이다.
골목길 귀퉁이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짙은 묵빛의 하늘 아래서 나는 그저 흘러가는 한 자루의 바람일 뿐이고, 거대한 침묵의 일부일 뿐이다.
그 깨달음이 가져다주는 평온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밤의 선물이다.
어느덧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걸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다.
내 안의 소란스러웠던 방들도 이제야 조용히 불을 끄고 잠에 들 준비를 마친 듯하다.
고요를 맘껏 산책하고 온 밤,
비로소 나는 완벽하게 충만해진 나를 안고 깊고 평화로운 꿈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첫댓글 문학소녀였던 나는 이 글을 다시 접해보니 너무 성숙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