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자신을 말한다는 것은 늘 조심스러운 일이다.
특히 현대사의 중요 사건을 혼자서 언급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오래 전의 일일수록 내 편에서 본 모습과 나만의 생각을
말하기 쉽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고, 이런 것들이 뒷날 정확한 역사 기술을 그르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혼자 겪은 일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관련된 전쟁이나
작전에 관한 일일수록 더 객관적이고 보편적 기술이 필요
하다.
특정인 한 사람의 생각과 기억과 자료에 의존하면 사건의 본질이 달라지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국방일보의 요청을 여러 번 고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선 “육군과 공군 측 얘기가 소개됐으니 이번에는 해군 차례”라는 권유에 고사의 변이 궁해졌다.
60만 장병과 수많은 재향군인이 애독하는 신문에 해군 얘기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다.
그래도 꼭 내가 나설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했더니 경력으로 보나 연령으로 보나 ‘당신이 적임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느새 대한민국 해군 창설요원들은 다 고인이 됐고, 참모총장 경험자 가운데 내가 선임자
중 한 사람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못해 수락했다.
내키지 않는 일을 수용하고 보니 걱정이 한 둘이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누를 끼칠 수도 있고 명예를 훼손하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또 망설여졌다.
나를 너무 내세운 나머지 내 자랑이 되지 않을까, 그것도 걱정이었다.
그래서 해군 출신의 여러 동료들에게 자문을 구해 묘안을 얻었다.
군인으로서, 특히 초창기 해군 요원으로서 국가 방위에 몸 바친 일들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회고해 보자는 것이었다.
되도록 많은 동료 선후배들의 경험담과 증언을 들어 객관적으로 기술하면 해군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겠고, 정확한 사료(史料)가 될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는 그 주인공의 일원인 내가 보기에도 너무 부실하다. 특히 해군에 관한 부분은 너무 부족하고 미흡하다.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기록만 해도 해군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기록과 평가가 거의 생략되다
시피 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우리 해군 결사대가 인천 앞바다 영흥도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1950년 6월25일 부산에 600여 명의 특공대를 상륙시키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오던 인민군
수송선을 우리 해군이 적발해 격침하지 않았다면 한국전의 양상이 어떻게 됐겠는가.
이런 공적이 한국전쟁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파묻혀 버린 진실의 파편을 캐내어 한국전쟁사 해군 편과 대한민국 해군사 초창기 편을 보완한다는 각오로 이 난을 활용할 생각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 6월25일 아침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날 이른 아침 해군본부 당직사관에게서 받은 다급한 전화 한 통으로부터 시작된 48시간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긴박한 순간의 집적(集積)이었다.
참모총장 부재 중에 발생한 국가 초비상 사태를 맞아 작전지휘권을 예하 부대에 넘겨 주지
않을 수 없었던 속사정이 말해 주듯, 그때 우리 군은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해 벽두부터 귀중한 지면을 내 주신 국방일보에 감사하며 독자 여러분께도 아낌없는 지도와 편달을 바란다.
함명수 제독(위 사진)
주요 경력
1928년 평양 출생 해사1기 졸업(1946. 1~1947. 2) 제7대 해군참모총장(1964. 9~1966. 9) 한국수산개발공사 사장 한영공업주식회사 사장 제9·10대 국회위원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03
가장 길었던 48시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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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시간이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느긋한 여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휴식이다.
더구나 주말 기분에 휩쓸려 늦도록 토요일 밤을 즐긴 사람들에게는 꿀맛보다 달콤한 순간이기도 하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귀청을 뚫을 것 같은 전화 벨 소리에 잠을 깬 시간은 새벽 5시45분이었다.
“이 시간에 웬 전화람.” 볼멘 소리로 수화기를 집어 든 내 귀에 울리는 첫 음성은 해군본부
정보감실 당직사관 장소위였다.
“조금 전 강원도 옥계 방면 해안으로 인민군이 상륙 중이라는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어 전군 장병의 외박·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던가.
밤새 아무 상황이 없었는데 인민군이 상륙을 하다니….
보고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아 “무슨 소리냐”고 다그쳐 물어도 장소위 대답은 똑같았다.
그렇다면 위급 상황이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LST 함정이 지금 어디 있는지 빨리 확인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
그리고 인천 경비사령관에게 연락할 수 있게 수배해 놓도록!”
당시 해군본부 정보감 보직에 있던 나는 응급조치를 취해 놓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인민군 병력이 동해안에 상륙하고 있다는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지만 즉각 대응 태세를 서둘러야 한다는 막연한 긴박감이 들었다.
출근을 서두르는데 중화 군이 방문 앞에 나타나 “인천 조개구이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채근했다.
총각 해군소령이었던 내가 기거하고 있는 주인집 둘째 아들은 벌써 몇 주일 전부터 “노는 날 일 없으면 인천에 데려가 조개구이를 사 주겠다”던 약속을 또 펑크낼까 봐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지금 급한 상황이 생긴 것 같으니 다음주에 가자”고 달랬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중화 군은 실망의 빛이 역력한 얼굴로 “오후라도 시간이 나면 데려 갈 수
없겠느냐”며 아쉬워했다.
그때 내가 기숙하던 친지의 집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 이화여대 입구 노고산동에 있었다.
중구 명동 입구에 있던 해군본부까지 직선으로 2㎞ 남짓한 거리였다.
아침 6시가 조금 지나 본부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맞닥뜨린 사람은 정보감실 제1과장
문기섭 소령이었다.
“이건 전쟁이야!”
나와 해군사관학교 제1기 동기생으로 뒤에 백령도 도서부대장과 해군본부 정보부장을 역임한 그는 무슨 일이냐는 내 물음에 대뜸 이렇게 단정했다.
그러면서 7시에 해군본부 긴급 작전 회의가 소집됐으니 정보감실 일은 자신에게 맡기고 어서 가 보라고 독촉했다.
일제 시대 미나카이 백화점이었던 본부 건물 회의실로 달려가면서 나는 참모총장도 없는 때에 이 비상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마음이 무거웠다.
손원일(孫元一) 참모총장뿐만 아니라 이럴 때 가장 중요한 보직인 박옥규(朴沃圭) 작전참모도 총장을 수행한 터여서 해군본부는 주인이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총장님 일행이 진주만에 도착했을 시간 아닌가.
외무부에 의뢰해 하와이와 즉각 연락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연락 여부를 시시각각 확인하라.”
나는 제일 시급한 조치부터 해 놓고 회의장으로 달려 갔다.
<정리=문창재 (언론인)>
2006.01.04 |
가장 길었던 48시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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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명운이 바람 앞의 등불 같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해군참모총장과 작전참모가 자리를 비운 것은 공교로운
일이었다.
해군의 숙원이었던 PC(Patrol Craft:고속 초계정) 3척을
도입하기 위해 미국에 출장 간 사이 상황이 벌어졌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당시만 해도 우리 해군이 보유한 PC는 701함 한 척뿐이
었다.
뒤에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이 함정의 도입이 조금만 빨랐
던들 그렇게 마음 졸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최고 책임자는 없어도 긴급 상황 대처는 시급했다.
오전 7시를 앞두고 회의실은 나처럼 급히 달려온 본부 참모들로 속속 자리가 메워졌다.
참모총장 직무대리는 김영철 대령이 수행 중이었고, 인사국장 김일병 대령, 작전국장 대리
김용호 소령, 함정국장 이종오 중령, 감찰감 정동호 소령, 법무감 오응선 소령, 정훈감 송흥국 소령, 정보감 본인, 통신감 한득순 소령, 헌병감 김태숙 소령, 의무감 박양원 중령 등이 작전회의 멤버였다.
“오늘 새벽 4시30분 강원도 동해안 옥계 방면에 인민군이 상륙해 내륙으로 이동 중입니다.
해안 지역에서는 이들 말고도 다른 적군이 계속 상륙을 시도하고 있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인근 해역에 509정을 급파했습니다.
같은 시간 38선 상의 모든 전선에서 지상군도 적과 교전 중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작전국장 대리 김소령의 상황 보고에 접한 우리는 전면전이 벌어졌다고 판단, 오전 9시를
기해 전 해군에 비상사태를 선포키로 결정했다.
그 뒤로는 구체적인 정보에 목말라 암중 모색하듯 우리끼리 의견을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통신감 한소령은 인민군 공군력에 많은 관심을 표했다.
과연 그들의 공군이 즉각 서울을 공격할 능력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대처가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인민군은 서울을 공습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군은 지상에 대공포도 없고 공군의 요격 능력도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공군력에 대한 판단은 정보부서의 일이기에 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해군본부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해군본부가 적의 공습을 받으면 제일 먼저 본부 옥상에 있는 통신 시설이 파괴될 텐데,
그러면 작전 지휘를 어떻게 합니까.”
내 보고에 통신감 한소령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랬다.
전신 전화 통신망이 훼손되면 작전 지휘는 불가능해진다.
진해 통제부의 통신 시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본부가 작전지휘권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예하부대에 넘길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육군이 과연 언제까지 서울을 지켜 줄 것인가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부 발표와 달리 전선은 갈수록 밀리기만 하는 것 같았다.
각 참모들이 작전참모실의 견해를 궁금해 하자 김소령은 꽉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국군이 수도 서울을 몇 시간이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10개 사단 병력이 물밀듯 쏟아져 내려오는데 국군의 애국심과 충성심
이 아무리 드높다 하지만, 글쎄요….”
비관적인 전망이었다.
회의 참석 전 육군본부에 전령을 보내 파악한 상황을 근거로 한 보고 한 마디로 회의 분위기는 침통해지기 시작했다.
분노,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교차되는 공기 속에서도 결론은 있어야 했다.
<정리=문창재 (언론인)>
2006.01.09 |
가장 길었던 48시간-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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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5일 아침부터 27일 아침까지의 48시간은
어느 한 순간 나라의 안위와 직결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이틀 동안 나는 해군본부 상황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전화통에 매달렸다.
시시각각 발생하는 상황 대처에 먹고 자고 배설하고픈
생리적 욕구를 느낄 새가 없었다.
그 시간에 일어난 문제는 동해상에서 발생한 괴선박 대처, 해군 작전지휘권 이양, 옹진반도에 고립된 육군17연대
구출, 한전 지금(地金) 처리 등 모두가 긴박한 일이었다.
제일 먼저 발생한 문제가 한국은행 지금 문제였다.
국방부 제3국장(관리담당) 김일환 대령 보좌관으로 나가 있던 정규섭 소령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한국은행 지하실에 보관돼 있는 금괴 1.5톤과 은괴 2.5톤을 피난시켜야 하는데 남쪽으로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는 곳은 해군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정소령은 나와 사관학교 동기생이어서 나를 믿고 한 전화였지만 정보참모인 내 직권으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이 문제는 김일환 대령이 당시 한국은행 구용서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할 셈이냐고
물어 생긴 일이었다.
구총재는 즉시 국무총리를 겸하고 있던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협조를 요청, 김대령을 통해 해군본부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동해 상황도 있고 육군17연대 구출 문제까지 해군이 떠맡아 정신 없는 판에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쓸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결국 최종 결정권자가 부재 중이라는 사정도 있어 그 문제는 일단 육군에 맡겨져 대전까지
수송됐고, 거기서 해군이 인수해 진해까지 안전하게 수송됐다.
육군17연대 구출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일요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황해도 옹진반도에 주둔 중이던 17연대는 순식간에 적진에 떨어져 고립무원 상태가 됐다.
38선 서단(西端) 접경 지역이었던 옹진반도가 금세 적 치하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연대 병력이 몰살하느냐 구출되느냐 하는 중대사가 걸린 과제여서 해군으로서는 모든 지혜와 기동력을 총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동해상의 괴선박 대처 문제까지 발생했으니 잠자고 밥먹을 생각이 나겠는가.
이 문제는 국적 불명의 검문 불응 선박을 공격해 침몰시킬 것인가, 그냥 모른 척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으로 뒷날 우리 해군의 단독 작전 제1호를 기록한 중대 상황
이었다.
인민군의 동해안 상륙에 대처하기 위해 진해를 떠나 현장으로 항진하던 701함의 괴선박 발견 보고에서부터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무려 4시간이 소요됐다.
현장에서 701함은 빨리 결단을 내려 달라고 독촉해 왔지만 해군본부 단독으로 결정을 내릴
문제가 아니라는 게 모든 참모들의 의견이었다.
국방부에 보고하고 하회를 요청해도 대답은 “정체를 확인해 보라”는 것뿐이었다.
애매모호한 국방부의 태도와 빗발치는 현장의 공격 명령 독촉 사이에서 곤욕을 치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전 지휘권 문제는 인민군 공군의 공습으로 본부의 통신 시설이 훼손될 가능성 때문에 결정이 쉬웠다.
게다가 정부와 육군본부까지 서울을 포기하고 피란을 가는 판이어서 더 이상 서울에 남아
지휘권을 행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10 |
한은 금괴 수송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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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한 순간은 많았지만 지금 돌이켜 봐도 손에 땀을 쥐게 한 일이 한국은행 지금(地金) 수송 작전이다.
해군사관학교 동기 정규섭 소령 전화를 받고 북새통 속에서도 함께 걱정한 일이어서 더욱 기억에 새롭다.
만일 그 일을 등한히 해 4톤에 달하는 금괴·은괴가 인민군
손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말할 것도 없이 전시 한국 경제는 상상하지 못할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북한은 앉은 채 횡재, 전쟁 비용을 불렸을 것 아닌가.
그 일에는 국방부 제3국장이던 김일환 대령의 공로가 컸다. 당시 한국은행 총재였던 구용서 씨 회고에 따르면 6월27일 아침 9시 무렵 김대령이 전화를
걸어 대뜸 “금괴 문제는 어떻게 할 거요”하고 물었다고 한다.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반문했더니 “가지고 나가야지요”하고는 전화가 끊겼다.
그 뒤 구총재는 최순주 재무부장관과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찾아가 방법을 의논했고 김대령은 나름대로 철수 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의 보좌관 정규섭 소령은 “6월26일 아침(구총재 증언과 하루 차이가 있음) 김국장이 아무 말 없이 같이 가자고 해 따라가 보니 한국은행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곳에는 구총재와 최재무부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소령은 비서실에서 대기하고, 세 사람이 지금과 현찰이 보관돼 있는 지하실에 내려갔다
총재실로 돌아왔다.
잠시 후 소총으로 경무장한 헌병 1개 소대가 GMC(군용트럭)를 타고 도착했다.
이때 구총재는 “국가 재산을 그냥 내줄 수 없다”면서 지금과 직원 둘을 붙여 호송에 참여케
했다.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직원들이 직무를 이탈하려 하거든 군에서 징발해 달라고 김대령에게
부탁했다.
김국장은 뒷날 회고록에 “국방부 회의에서 군수물자 통제 업무를 맡게 돼 한국은행 소장 귀중품을 소개하기로 됐는데, 가장 어려운 일이 금·은의 무사 반출이었다.
헌병사령관 송요찬 대령이 헌병 1개 소대를 차출해 줘 정규섭 해군소령과 함께 가서 자동차 두 대에 실어 냈다”고 썼다.
금괴·은괴가 든 상자는 무려 89개나 됐다.
이렇게 실려 나간 금괴는 한국은행 대전지점에 보관됐다가 해군에 인계됐다.
당시 진해보급창장 김익성 소령이 인수, 무사히 진해 보급창으로 이송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이 위험해지자 해군의 건의를 받은 정부 지시로 금괴는 다시 부산으로
피난했다.
뒷날 알게 된 일이지만 이 금괴는 미국 권고로 8월1일 샌프란시스코 행 선박에 실렸다.
부산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조치였다.
그러나 금덩이는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55년 국제통화기금(IMF)이 창설될 때 한국은 이 금괴를 처분해 기금 출자금으로 전용한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우리나라가 IMF 구제 금융을 받게 됐다.
우리는 그 일화가 떠올라 착잡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이 얘기와 관련해 정규섭 소령이 잊지 못하는 일은 대전 철수 때 미곡 반송 일화다.
한국전쟁에 막 참전한 미 지상군 병력을 태우고 온 화차 편에 쌀 수천 석을 부산으로 실어
보내려는데 기관사가 도망쳐 버렸다.
알고 보니 미군이 후퇴하는 한국 경찰 중대를 적군으로 오인해 벌어진 총격전에 놀란
것이었다.
경주 철수 때는 김일환 대령과 함께 폭우 속을 달려가 경주박물관 국보급 문화재를 밤새도록 포장해 부산으로 피난시킨 일도 잊지 못할 일이라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정리=문창재 언론인>
2006.01.16 |
대한해협 해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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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그날 아침부터 시작된 긴박한 48시간 가운데 어느 한 순간 중요하지 않은 시간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대한해협 해전과 관련한 상황은 정말 피를 말리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25일 해 질 무렵 동해상에서 남쪽으로 항진하는 괴선박을 발견한 701함(백두산함)의 첫 보고가 들어온 이후 다음날 새벽 상황이 끝날 때까지
하룻밤은 숨을 크게 쉬기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백두산함은 수시로 “빨리 지침을 내려 달라”고 독촉하는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의무가 있는 본부로서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이 상황은 즉시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보고됐다.
본부 작전 회의에서는 공해상이라도 검문에 불응하는 선박이라면 나포하거나 강제 정선시킬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해전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본부 참모들은 선박의 정체에 신경이 쓰여 최종
판단은 함장에게 맡기자는 신중론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함장의 보고를 분석하던 중 결정적인 정보가 입수됐다.
백두산함이 괴선박을 100m 거리까지 접근해 탐조등으로 확인해 보니 선명도 국기도 없이
병력이 가득 실려 있다고 보고해 온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괴선박을 격침하라. 성공을 빈다.”
참모총장 직무대행 김영철 대령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비장하게 명령했다.
26일 0시10분,
괴선박 발견 보고로부터 꼭 4시간이 지나서였다.
이 명령은 즉시 국방장관에게도 보고됐다.
마침 경무대에 가 있던 신장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상황실 책임자인 내가 받았다.
해군본부의 격침 명령을 확인하려는 전화였다.
“격침 명령을 내렸다고 괴선박이 침몰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전 회의 멤버 가운데 최연장자인 김일병 대령의 이 말 한 마디로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배의 크기로 보나 병력 수로 보나, 낙관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함소령, 백두산함 부장이 송석호 소령이지요?”
김대령의 질문은 그가 나와 해군사관학교 동기생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기관장 신만균 소령도 동기생이라고 대답하자, 김대령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졸업 당시 해사 교장이었던 그는 1기생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새삼 따뜻한 스승의 정이 느껴졌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전황을 분석·처리하면서 나는 비로소 전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적선 좌현 3마일 거리에 접근해 3인치 포 20발을 발사했음. 그중 5발 명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상황실에 함성이 터졌다.
뒤 이어 “적선도 57㎜, 37㎜ 포와 중기관총으로 응사함. 피아 치열하게 교전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와 다시 마음을 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시간쯤 지나 백두산함이 적선 우현 쪽에서 주포로 공격, 기관실에 명중시켰다는
내용과 적선 마스트 2개가 파괴돼 좌현 쪽으로 20도 정도 기울어 침몰 중이라는 보고가
잇따라 들어왔다.
또 한번 함성이 터졌다.
그 많은 병력을 태운 적함을 격침시켰다니 이런 승전보가 또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해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첫 전투에서 거둔 이 엄청난 전과는 단순히 부산을 지킨 것이 아니었다.
부산을 잃었다면 미군과 유엔의 지원군 상륙, 그리고 군수 물자 수송은 어떻게 됐을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이 승전보의 의미는 자명해진다.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17 |
대한해협 해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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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함의 승전보는 철저한 충무정신의 결실이었다.
다른 임무를 부여받고 출동하던 백두산함이 공해상을 지나가는 수상한 함정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괴선박에 다가가지 않아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검문을 하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전공은 더 빛난다.
공해상을 지나가는 배라고 무심히 지나쳤더라면 한국전쟁의 양상이 사뭇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많은 전사 연구가들의 견해다.
전쟁을 도발한 북한은 육상의 38선 돌파 작전과 함께 동해 연안과 부산 지역에 특공대를 상륙시키는 협공 작전을 꾀했는데 부산으로 가던 특공대 수송선이 격침당해 적화 통일 작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도 느긋한 일요일 아침의 여유를 즐기다가 6·25라는 국가 비상 사태를 맞았다.
1950년 6월25일 아침 진해 통제부사령부에서 출항 명령을 받은 백두산함이 진해항을 출항한 것은 오후 3시였다.
당시의 백두산함 승조원들 증언을 종합하면 지금 세상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동력이
약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승조원들에게 늦잠을 재웠습니다.
그동안 격무도 있고 해서 한 시간쯤 더 재워 7시에 승조원들을 기상시켰습니다.
밀린 빨래를 시키고 8시에 조식을 마쳤는데 통제부 사령장관 김성삼 대령이 달려와 출동을
서두르라고 명령하는 겁니다.
동해안 묵호 부근에 정체 불명의 군대가 상륙하고 있으니 이놈들을 때려 부숴야 한다는
거예요.”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 겸 포술사였던 최영섭(77) 예비역 해군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비상 출동에 한나절이 더 걸렸다.
비상소집령이 떨어졌으나 통신망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시절이었다.
헌병들을 시켜 진해시내를 돌며 승조 장교들을 끌어모으는 방법밖에 없었다.
식량과 연료·식수·탄약·군수품 등 출동에 필요한 것들을 선적하고 있는데, 김사령장관으로
부터 “백두산함은 단독 출항하지 말고 진해항에 정박 중인 YMS(미 소해정) 518정과 512정을 대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518정의 출동 준비가 너무 늦어 백두산함은 오후 3시 512정만 데리고 먼저 출항했다.
함장 최용남 중령, 부장 송석호 소령, 기관장 신만균 소령, 포술장 유용빈 중위, 기관사
강명혁 중위와 김종식 소위,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 군의관 김인형 중위를 포함해 승조원은
총 60명이었다.
목적지는 묵호 해안, 임무는 상륙을 기도하는 ‘정체 불명의 군대’를 쳐부수는 것이었다.
그 사이 정체 불명의 군대가 북한 인민군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첫 전투 출동에 임하는 장병들은 눈빛으로 임전무퇴의 각오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말없이 근무에 임했다.
최고 속력 18노트인 백두산함은 오후 6시30분을 지나 부산 오륙도 등대를 통과하면서 침로를 북으로 잡아 곧장 항진했다.
하지가 지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 어둠이 깃들기 전의 저녁 바다는 흐렸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 그런대로 쾌적한 기상이었다.
인민군과 해상에서 조우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지난 주말까지 백두산함을 몰고 동서남해의 각 경비사령부를 순항한 승조원들은 누구나
첫 경험에 긴장했다.
브리지에서 견시(見視·관측병) 두 사람이 쌍안경으로 좌우 해상을 훑어보는 가운데 당직사관 최소위는 나침반 옆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오른쪽 해상을 살피던 조병호 일등수병의 눈에 수평선 저쪽
에서 어렴풋이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한 줄기가 포착됐다.
그의 표정에 긴장의 빛이 어렸다.
<정리=문창재 (언론인)>
2006.01.18 |
대한해협 해전-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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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시(見視) 보고. 우현 45도 수평선 검은 연기 보임.”
쌍안경으로 뱃길 오른쪽을 살피던 조병호 일등
수병이 당직사관 최소위에게 큰 소리로 보고
했다.
시각은 오후 8시12분, 북위 35도 15분 동경 129도 31분 해역이었다.
최소위는 즉각 조수병에게서 쌍안경을 넘겨받아 황혼이 물드는 동쪽 지평선을 살펴보았다.
사실이었다.
연기의 굵기로 보아 어선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처음 생각이었다.
어선이 아니라면 화물선이나 상선일 텐데, 동해 공해상으로 남하하는 화물선이나 상선이 있을 수 없는 시대였다.
최소위는 즉시 최용남 함장에게 수상한 선박 발견 사실을 보고하고, 연기 나는 괴선박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말했다.
최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두산의 침로를 수상한 선박이 항해하는 동쪽으로 돌리도록 지시했다.
12km 뒤에서 힘겹게 따라오는 512정에는 “본함은 작전상 잠시 항로를 이탈하니 귀선은 예정대로 북상하라”고 지시했다.
금세 상황이 끝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첫눈에 그 배는 수상했다.
가까이 가 보니 어선도 상선도 화물선도 아닌 해군 수송선(FS급)이었다.
선체에는 온통 시커먼 페인트가 칠해져 있고 배 이름도 표지도 없는 데다,
국기도 달지 않아 어느 나라 배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백두산은 국기를 달지 않은 것에 의심을 품고 그 배를 따라 남하하면서 국제 기준에 따라 검문을 시작했다.
첫 단계는 손으로 깃발을 흔들어 검문의 뜻을 전하는 수기 신호였다.
5km 거리를 두고 따라가면서 함교 뒤편에서 김세현 삼조(현재 계급 하사)와 최도기 삼조가
열심히 깃발을 흔들었으나 응답이 없었다.
날이 어두워져 혹시 깃발을 보지 못한 것인가 싶어 이번에는 탐조등을 이용한 국제 신호를
보냈다.
박순서 삼조는 JF(귀선의 국기를 내보이라), NHIJPO(다시 귀선의 국기를 보여 줄 것을 요구한다), IJG(언제 어느 항구를 출항했는가), LDO(목적지는 어디인가) 신호를 30여분 간 발신했다.
그러나 괴선박은 아무 응답 없이 계속 남하했다.
“부산 동북방 약 50km 해역에서 정체불명의 괴선박 발견. 크기는 1,000톤급, 형태는 수송선, 정남향으로 시속 12노트로 항진 중. 계속되는 검문에 일절 응답 없음.”
해군본부에 처음 들어온 상황 보고였다.
선박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즉시 하달됐다.
백두산은 다시 발광 신호를 이용해 K(정지하라), OL(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다.
그래도 괴선박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시간은 벌써 2시간이 흘렀다.
빨리 정체를 확인하라는 본부 지시에 따라 백두산은 속도를 높여 괴선박을 100m 거리까지
접근해 탐조등을 비춰 보았다.
모두 깜짝 놀랐다.
갑판 앞쪽에 대포로 보이는 커다란 물체가 포장으로 가려져 있고, 중갑판 양쪽에는 중기관총이 장착돼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갑판 위에 누런 국방색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갑판 위에 빽빽이 줄지어 앉아 아무 동요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백두산 승조원들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
무장선에 접근해 조명등을 비춘 것은 나를 향해 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가 아닌가.
그러나 등화관제 후 기습적으로 과감히 접근해 적선임을 확인하게 됐으니 행운은 우리
편이었다.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23 |
대한해협 해전-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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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40분 백두산 함상회의가 소집됐다.
8명의 장교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주로 괴선박 병력의 정체에 관해 의견이 교환됐다.
“얼굴 모습과 몸집으로 보아 동양인이 분명하다. 동양인이라면 일본군일 수는 없는 일이고, 중공군도 이 항로로 지나갈 일은 없다.
그렇다면 인민군 아니고는 답이 없다.” 최함장은 장교들의 의견을 모아 이런 결론을
내리고, 확인을 위해 주포 한 발을 발사토록
명령했다.
“적이면 응사할 것이고, 아니면 의사 표시가 있을 것이다.
본부에 사격하겠다고 보고하라.”
최함장의 지시로 그 상황이 보고됐고, 그것이 해군본부 격침 명령의 근거가 됐다.
당연히 신성모 장관에게도 보고됐다.
“자 이제부터 전쟁이다.
김일성 공산당은 우리 민족의 적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군 포병 소위까지 올랐던 최함장은 짧은 훈화에 이어 전원 전투 배치를 명했다.
그러고는 결의를 다지는 건배를 제의했다.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 보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우리 건배로 이 순간을 기념하자.
야, 당번병 냉수라도 가져 와!”
배에 술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냉수로라도 건배하자는 제의에 좌중은 일순 숙연한 분위기가 됐다.
당번병이 물컵을 돌리고 주전자로 냉수를 가득 부었다.
말없이 냉수 한 잔을 들이켜고 제 위치로 돌아간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는 항해부 포술부
수병 25명을 집합시키고 짧은 지시를 하달했다.
“전원 신속히 새 내복과 작업복으로 갈아입도록!
죽더라도 깨끗한 몸으로 죽어야 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시작한 전투였다.
등화관제 명령이 내려져 캄캄한 갑판 위에서 사격 준비를 마쳤다.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적선의 좌현쪽으로 항로를 바꾸어 유효 사거리 안으로 적선에 접근했을 때, 포술부 책임자 최소위는 정말 포탄이 발사될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됐다.
왜냐하면 백두산함 도입 이후 단 한 번도 실탄 사격 훈련을 해 본 일이 없던 것이다.
돈이 없어 실탄을 100발밖에 사오지 못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사격 연습에 쓸 수 있었겠는가.
“사격 명령을 내리니까 정말 포탄이 날아가대요. 참 신기합디다.”
그렇게 첫 발이 발사되자 적선에서 즉각 반응이 일어났다.
우두두두, 마치 나뭇잎에 굵은 빗방울 쏟아지는 소리처럼 기관총탄이 날아왔다.
어두워서 거리 측정을 잘못했는지 총탄은 모두 바다에 떨어졌다.
가랑비가 내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적선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그들도 등화관제를 했으나 좌현쪽의 등 하나가 꺼지지 않았다.
그것은 백두산에 좋은 표적이 돼 주었다.
사격 거리를 측정하는 척도수 최갑식 삼조는 한 쪽 눈을 감고 적선의 불빛을 향해 거리를
가늠했고, 전병익 삼조는 3인치 포탄을 포신에 장전하기 바빴다.
적탄을 피하기 위해 속력을 최대한으로 높이면서 적선의 항해 방향에 따라 수시로 주포의
위치를 맞추었다.
두 배 사이에 날아다니는 포탄과 기관총탄의 탄적은 마치 불꽃놀이 같았다.
촛불처럼 밝은 곡선을 그리며 거친 바다의 어둠을 수놓았다.
그렇지만 포술부원들은 감상에 젖을 틈이 없었다.
탄환이 적선 주위 바다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포탄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포탄에 제발 명중해 다오. 다들 그렇게 애원하는 심정이었다.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24 |
대한해협 해전-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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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 위에서 갑자기 함성이 터졌다.
만세소리가 요란했다.
적선 앞 갑판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주포 한 발이 적선에 명중한 것이다.
또 함성이 터졌다.
또 명중이었다.
이번에는 기관실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자신감을 얻은 수병들은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없는 듯 기계적으로 같은 동작을 되풀이
했다.
기관총 사수들도 정신없이 쏘았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이 쏜 탓이었으리라.
약협이 눌어붙어 격발이 되지 않자 사수들은 탄우 속에서 몸을 숨기지도 않고 약실을 청소해 다시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래도 적선은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듯 응사가 멈추지 않았다.
포탄을 다섯 발 이상 맞고도 끄떡 없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안 되겠다.
수평선을 때려라.
상체는 아무리 맞아도 소용 없으니 흘수 아래에 구멍을 내야 격침된다.”
최함장은 비상 대책을 내놓았다.
조준점을 변경해 홀수 아래를 쏘려면 더 근접해야 한다.
1.7㎞까지 접근하면서 10여 발을 더 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명중률은 높았다.
동시에 상체도 공격했다.
900m까지 접근했을 때 적선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선체가 기우뚱거리며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주포가 마스트에 명중해 30㎝ 굵기의 마스트가 부러져 균형을 잃은 것이다.
해전에서 마스트를 명중시키는 것은 흔하지 않은 포격 기술이다.
“만세, 만세, 만세!”
어지러운 만세소리와 함성으로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했다.
이때 백두산함에서도 동요가 일어났다.
너무 접근한 탓에 적탄을 맞은 것이다.
85㎜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 조타실을 관통하며 나침반(자이로 컴퍼스)을 부수고 3명의
승조원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종식 소위는 왼쪽 발꿈치가 날아갔고 김창학 삼등병조와 전병익 이등병조는 복부와 다리
관통상을 입었다.
그래도 그들은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전병익 이등병조는 피가 콸콸
쏟아지는 상처를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있었고, 김삼등병조는
조타간을 움켜잡고 있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부상자들은 즉시 병사 식당으로 옮겨져 응급치료가 시작됐다.
군의관 김이현 중위는 응급처치를 하면서 먹은 것을 토하기 시작했다.
배멀미로 고생하다가 창자가 터져 나온 부상병을 목격하자 비위가 상했던 모양이었다.
이를 바라보던 최소위는 빈 깡통을 가져오라고 해 김중위 목에 그것을 걸어 줬다.
“갑판사관님, 적선은 어떻게 됐습니까?” 출혈이 심해 정신이 혼미해져 가면서도 부상자들은 전황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걱정마라. 적선은 침몰 중이다.”
그제서야 그들은 안심이라는 듯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물, 물”을 외쳤다.
피를 너무 흘려 수분이 빠져나가면 목이 타는 법이다.
최소위에게서 물컵을 받아든 그들은 희미한 목소리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김창학 삼등병조는 “끝까지 같이 싸우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 끝에 스르르 눈이 감기고
고개가 밑으로 꺾였다.
“전수병! 정신 차려, 김창학 눈을 떠 봐.” 전우들이 큰 소리로 외쳐도 그들은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정리=문창재 (언론인)>
2006.01.25 |
대한해협 해전-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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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지는 한 잎 꽃잎처럼, 거친 바다에서
새파란 목숨을 떨군 김창학·전병익 두 수병의
죽음 앞에서 전우들은 맹세했다. 반드시 이겨 이 원수를 갚으리라.
한식구 같은 유대감으로 엉켰던 전우들은 제대를 한 달 앞둔 전 이등병조의 죽음을 더 가슴 아파했다.
그는 애인의 사진을 품은 채 죽었다.
제대하면 결혼할 사람이라면서 가까운 전우들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사진 속의 여인은 수수하지만 청초한 미인이었다.
김 삼등병조는 2003년 5월15일 전쟁기념관이 제정한 ‘이달의 전쟁 영웅’으로 뽑혀 공식 현창됐다.
그 행사 때 경기도 평택 출신인 그의 누이동생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오빠가 전쟁에 나가 죽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는데
그렇게 훌륭한 군인이었다니 자랑스럽습니다.”
그녀는 옛 전우들 앞에서 그동안 쌓인 한을 토해 내듯 오빠의 전사를 큰 소리로 자랑스러워
했다.
직속 상관이었던 최소위가 소장했던 얼굴 사진을 복사해 전해 주자 사진을 쓰다듬으며 한동안 울음을 참았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호국영령에 대한 처우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병익 이등병조는 아직 전쟁 영웅으로 선정되지도 않았다.
같은 전투 같은 배에서 전사한 두 사람의 처우가 이렇게 다르니 이상한 일이다.
부산항 지척에서 벌어진 대한해협 해전 상황이 종료되자 해군본부는 승리의 증거를 수집토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백두산함은 전투 해역으로 되돌아가 적선 침몰의 증거를 찾는 수색 작전에 임했다.
그러나 적병들의 옷가지들과 기름띠 같은 간접 증거물은 몇 점 떠다녔으나 적선 침몰을 증거할 결정적 물증은 찾을 수 없었다.
600여 명의 병력을 태운 함선이 침몰하면 구명 보트나 라이프 재킷을 이용해 해상에 떠다니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다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떠다니는 적병 군복과 기름띠로 보아 침몰로 인정한 백두산함은 본 임무인 묵호해안 상황
대처를 위해 함수를 돌렸다.
전사자와 부상자 처리 문제에 대해 본부에서는 “가까운 포항 기지에 내려놓고 서둘러 묵호로 떠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백두산함은 포항 외항까지 마중 나온 어선에 전사자 시체와 부상자를 인계하고 북상을 계속
했다.
26일 오후 묵호 해안에 도착했을 때는 평소와 다름없이 해안 마을은 평온해 보였다.
해안에는 인민군이 쓰고 버린 것으로 보이는 목선 몇 척이 떠 있을 뿐이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인민군은 벌써 상륙해 산악 지방에서 본격적인 침투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시각이었다.
본부 지시로 진해에 되돌아간 백두산함은 기지 내 공창에서 전투 중 부서진 조타실 등의 시설을 수리하고 즉시 인천으로 다시 출동, 그때까지 철수하지 못하고 있던 인천 해군경비사령부 요원 30명을 태우고 진해로 귀환했다.
그 뒤에도 동·서·남해를 누비며 백두산함은 수많은 작전과 전투 선봉에 섰다.
1951년 2월3일의 제2차 인천상륙작전 때는 승조원들이 특공대로 상륙, 인민군 전차를 노획
하는 해군 역사상 보기 드문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대한해협 전투 전사자 두 사람의 유해는 포항에서 진해로 옮겨져 경남 진해시내 평지봉 기슭에 안장했다.
전투 1년 뒤인 51년 6월25일에는 당시 백두산함 승조원 전원이 두 영웅의 묘를 찾아 참배
하는 기념 행사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 길이 역사에 남게 됐다.
<정리=문창재(언론인)>
2006.01.31 |
대한해협 대첩의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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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된 1950년 6월28일,
미국은 한국군에게 응급 수혈했다.
가장 시급한 탄약 공급을 위해 일본 사세보(佐世保)에 기항 중이던 수송선 서전 키스레이 호와 카디널 오코넬 호에 105㎜ 박격포탄 10만5,000발, 60㎜ 박격포탄 8만9,000발,
총탄 248만 발을 실어 부산으로 보냈다.
사흘 뒤에는 미육군21사단 제1대대 병력 406명을 수송기 편
으로 부산공항에 급파했고, 뒤이어 미육군34연대와 21연대, 포병대대를 상륙시켰다.
한국전쟁 첫해 부산항을 통해 전선에 투입된 미군·유엔군 병력은 연인원 60만 명, 군수품은
100만 톤이 넘었다.
만일 괴선박이 격침되지 않았다면 한국은 38선과 동해안·남해안 3면으로부터 협공당하는
최악의 형국이 됐을 것이다.
당시 도쿄 맥아더사령부 정보 요원으로 근무했던 노만 존스는 뒷날 자신의 저서 ‘한국작전’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대한해협 해전의 승리는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됐다”고 평가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전 사상 처음으로 백두산함장 최용남 중령에게 은성무공훈장, 기관장 신만균 소령에게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한 사실은 이 해전 승전보에 대한 무언의 평가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뒷마무리를 기다려 함장 최중령을 부산 해군본부로 불렀다.
훌륭한 판단과 효과적인 지휘, 용감한 작전으로 해군의 체면을 세워 줘 고맙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최함장은 부하들에게 공을 돌렸다.
“백두산함 장병들의 목숨을 건 감투 정신 덕분이었습니다.
비오듯 쏟아지는 적탄 속에서 전 장병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워 주지 않았다면 함장이
아무리 애를 쓴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특히 전속력으로 기동해 준 기관장 신만균 소령의 공이 큽니다.”
최함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기관장의 공로를 알아 준 것만 보아도 얼마나 훌륭한 해군 지휘관인지 알 수 있다.
기관장이란 수면 아래 있는 기관실만 책임지는 자리가 아니다.
전기·전화·수도·연료 등 배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모든 배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함정의
신경과 혈관 조직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배는 생명력을 지닐 수 없다.
최고 속력을 내 적선을 제압할 수 있게 해 준 공로를 알아 준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한국 정부는 최함장에게 태극무공훈장, 신기관장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신소령이 두 번째 공훈을 차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최함장의 배려였다.
역시 해군이 받은 제1호 훈장이었다.
나머지 장병들에게도 충무무공훈장 등 기타 훈장과 기장이 수여됐음은 물론이다.
최용남 중령은 1923년 평안남도 구성군에서 무골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연희전문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된 그는 일본군 하사관들의 차별과 멸시에 대항하기 위해
장교 시험을 통해 육군 포병소위가 됐다.
광복 후 귀향했으나 공산 세력의 횡포에 실망해 월남,
47년 해군소위로 임관됐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던 그는 백두산함장 시절 장병들에게 반공 사상과 책임감을
유달리 강조했다.
그것이 대한해협 전투 승전보의 밑거름이 됐음은 물론이다.
한국전쟁 중 해병대로 전과한 그(최용남)는 해병 제1연대장 시절 서부전선에서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공적 등을 인정받아 해병대 장성으로 진급, 요직을 두루 거치며 해병대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정리=문창재 (언론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