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태 [郭泰(太) : 128~169]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자 임종(林宗).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출생.
높은 학문과 덕으로 일세의 숭앙을 받았다.
굴백언(屈伯彦)에게 사사하여 전적(典籍)에 통달하고 뤄양[洛陽]에 가서 당시 하남윤(河南尹:낙양 지방 장관) 이응(李膺)과 깊이 교제하며 명성을 떨쳤다.
향리에 은거하여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 수가 수 천명에 달하였다.
외척과 환관이 전횡(專橫)하는 세상에서도 절조를 굽히지 않았으나 언행이 신중하여 당고(黨錮)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문선(文選)에 곽옹(郭邕)이 만든 곽태의 묘지명(墓誌銘) 《곽유도비문(郭有道碑文)》이 나와 있다.
후한시대 때 곽임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높은 학문과 덕으로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당시는 외척과 환관이 득세했다. 아무리 관직이 높은 관리라도 외척과 환관의 눈 밖에 나면 화를 당하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던 곽임종은 향리에 은거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그는 절조를 지키던 선비였지만 늘 언행을 신중하게 했다. 때문에 난세 속에서도 그는 여러 가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곽임종(郭林宗) : 곽태(郭泰)
곽 임종(郭林宗) : 이름은 태(泰)이다. 《분전(墳典)》에 해박하여 제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귀향을 전송하는 1000여 수레의 선비 가운데 오직 이응(李膺)과 같이 배를 타고 가므로, 전송하던 사람들이 ‘신선’이라고 했었다. 인물 품평을 잘했으나 말을 조심했기에 당고(黨錮)의 화를 면했다.[신선의 짝 곽 임종이요 / 仙侶郭林宗]
후한(後漢) 말엽의 고사(高士)인 곽태(郭太)로 임종은 그의 자(字)임. 평소 위언 격론(危言激論)을 하지 않았으므로 당고(黨錮)의 화를 면했음.《後漢書 卷98》
곽임종(郭林宗)은 후한(後漢)의 선비 곽태(郭太)를 말한다. 임종은 그의 자이다. 태부(太傅) 진번(陳蕃)과 대장군(大將軍) 두무(竇武)가 환관에게 죽임을 당하자, 곽태는, “이 사람들이 죽었으니 나라가 피폐해지겠구나.[人之云亡 邦國殄瘁]”라는 《시경》 〈첨앙(瞻卬)〉의 시구를 외우며 탄식하였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훌훌 떨치고 날아간 곽임종이여 / 翩然郭林宗 : 임종은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곽태(郭泰)의 자(字)이다. 환제(桓帝) 때 당고(黨錮)의 사건이 일어나 천하의 명현(名賢)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구당(鉤黨)으로 지목받고 남김없이 멸절당하는 상황에서 몸을 깨끗이 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말을 겸손히 하여 환관(宦官)들의 중상을 면함으로써 끝까지 화를 당하지 않았다. 그의 인품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 범방(范滂)이 “그는 세상을 피해 숨어도 개지추(介之推)처럼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고, 절조가 곧아도 유하혜(柳下惠)처럼 속세와 단절하지 않으며, 천자도 신하로 삼을 수 없고, 제후도 벗으로 삼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隱不違親 貞不絶俗 天子不得臣 諸侯不得友 吾不知其它〕”라고 대답한 말이 《후한서(後漢書)》 권68 〈곽태열전(郭泰列傳)〉에 나온다. 위소(魏昭)가 곽태에게 시중들겠다고 간청하면서 “경서를 배울 수 있는 스승〔經師〕을 만나기는 쉬워도, 타인의 모범이 되는 스승〔人師〕을 만나기는 어렵다.”라고 찬미한 말이 《자치통감(資治通鑑)》 권55 〈후한기(後漢紀)〉 환제(桓帝) 연희(延熹) 7년 조에 나온다.
冒雨翦韭(모우전구)
【뜻】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부추를 솎아 손님을 대접한다. → 우정의 두터움.
【출전】<후한서(後漢書)> ‘곽임종별전(郭林宗別傳)’
【고사】
『이 성어는 후한(後漢)시대 곽태(郭泰: 128-169)라는 사람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곽태(郭泰)는 자를 임종(林宗)이라하며,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출신이다. 높은 학문과 덕으로 일세의 숭앙을 받았다. 굴백언(屈伯彦)에게 사사하여 전적(典籍)에 통달하고 뤄양(洛陽)에 가서 당시 하남윤(河南尹: 낙양 지방 장관) 이응(李膺)과 깊이 교제하며 명성을 떨쳤다. 향리에 은거하여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 수가 수 천 명에 달하였다. 외척과 환관이 전횡(專橫)하는 세상에서도 절조를 지키던 선비였지만 늘 언행을 신중하게 했다. 때문에 난세 속에서도 그는 여러 가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 친구가 밤에 비를 맞으며 찾아 왔다. 그는 아내에게 술상을 차리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비를 맞으며 밭으로 나가 부추를 베어다가, 부침개를 만들어 친구에게 대접했다고 한다(林宗有友人, 夜冒雨至, 翦韭作炊餠食之).
그는 진수성찬은 아니었지만 친구를 대접함에 있어 정성을 다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었다. 이때부터 모우전구는 '우정이 두텁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첫댓글 正人君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