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팔자 길들이기 달렸다더니, 시골 농사꾼의 아이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소년의 꿈을 찾아 늘~상
시간을 나누어 바쁘게 살든 버릇이 환갑 진갑 지난 지금도 바쁜 일정을 보내며 시간을 나누어 쓴다.
1971년 중3 때 겨울철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려고 갔는데 정식 중학교가 아니라 시험 고사장을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선생님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우리들을 챙겨 집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뒷날 알고 보니 우리가 입학 후에 정식 중학교 인가가 나서 우리 기수는 검정고시 시험을 거처야 고등학교 시험을 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지난여름 대모 사건 때문이다. 시골 중학생들이 대모를 하며 수업 거부 와 영어 선생님의 억압적인 수업 방법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며 지방 신문에도 나고 라디오 뉴스까지 났다 물론 속내는 잘 모르고 부화뇌동한 학생들이 많은 걸로 안다. 학교 내의 사정으로 선생님들 간의 불화에 그중 한 분이 교육청에 정식 중학인가 전의 학생이라, 고발함으로 들통이 났다. 나와 다른 학교 지원한 학생을 모아 선생님 2명과 학생들 4명 그리고 아버지와 7명이 점심시간이 되어 국밥을 먹고 아버지가 계산하고 돌아왔다. 뒷날 나는 선생님도 계시는데 왜 아버지가 점심값을 지불하였냐고 물었다. 경황없는 선생님과 아이들을 보니 자신이 식대 계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아버지는 사람이 살다 보면 알돈도 쓰고 헛돈도 쓸 때가 있다고 하였다. 졸업 후 선생님께서 한 해 더 복학하기를 권했다. 아버지께 학교에서 한해 더 하길 권한다며 학교를 하고 싶다고 하였더니 자식의 애절한 갈망이 안타까웠든지 임시 달래므로 위로하는 마음인지 허락하였다. 한해 후배들과 3학년 과정을 다시 하며 오직 고등학교 가고 싶은 마음에 창피함도 잊고 나와 몇 명은 새로 1년 더 다니기로 하며 복학을 하였다
1972년 복학 때 담임은 주석영 선생님이었다.
3학년 학생들에게 먼저 오는 순서대로 자기가 앉고 싶은 자리 골라 앉을 수 있게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부 못하고 관심 없으면서 앞에 앉아서 장난이나 치고 하면 뒤에 앉은 학생에 방해가 됨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소년은 말이 한해 더 하는 학생이지 농사짓는 아버지가 바쁠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집안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1년 중 반은 학교 출석하고 반은 결석했다. 아니 오히려 바쁜 농사를 돕다가 틈나면 학교에 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농사일과 공부 사이에서 오직 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신념에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결석이 많은 소년을 보고 담임 선생님은 상권이는 졸업장이 문제인가 고등학교 입학하는 게 문제냐고 안타까워했다. 교실에 자리도, 농번기 바쁠 땐 결석이 심해 책상이 이쪽에 있다가 어느 날은 저쪽에 있기도 하였으며 한 번은 들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 반에 친구가 들논 까지 찾아와서 내일부터 중간고사를 치는데 시험 안 치면 퇴학시킨다고 하여 학교에 갔더니 책상이 없어 창고에서 가져와 앉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모내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 때 대구에 사는 8촌 종수 형님 집에서 대구학원에 다니며 부족한 기초 공부를 하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철 벼농사를 지으며 학교에 다니다, 겨울 방학 땐 또다시 학원에 다니고 소년에겐 눈물겨운 한 해였다. 그리고 그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1차, 2차 모두 시험에 떨어졌다. 기초가 없는 소년은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의 벽이 높음을 실감했다 소년의 마음은 너무 아팠다.
누가 뭐라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가슴에 큰 구멍으로 모진 겨울바람이 저미며 지나는 것 같았고,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아리고, 이유 없이 몇 날을 눈물이 하염없이 두 볼을 타고 내렸다. 할머니가 손주의 모습을 보고 안 서러웠던지 아버지한테 고함을 치며, 애비야 자 봐라 저러다 아 잡겠다. 아버지 또한 내 모습을 보더니 어찌할 줄을 몰라 말없이 답답해할 뿐이었다.
삼수 시절 1973년
나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면서도 늘 가슴속엔 공부가 하고 싶었다. 여름철 토요일 오후에 꼴망태를 메고 낙동강 강변에 있을 때 강 건너 달성군 하빈면 묘동에 지나는 버스에서 하얀 교복을 입은 또래의 아이들이 우르르 내려 고향을 찾아 배를 타고 건너올 때는 한없이 부러워하며 넋을 잃고 보다가 가까이 오면 못 본 체 풀을 베고 피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을철 논에서 벼를 베다 아픈 허리를 펴 주위를 둘러보다 까만 교복과 모자 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내 또래의 아이를 보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공부시켜 달라 부탁하려면 일을 열심히 해서 아버지 마음에 들어야 한다 생각하여 열심히 일했다. 봄철 들에 걸음을 낼 때 나, 소 외양간에 두엄을 칠 때 나, 여름날 모내기할 때, 보리타작할 때도, 가을철 벼 베기 할 때, 벼 타작할 때도, 씨앗을 뿌리기 위한 논밭을 장만하는 밭갈이, 논갈이, 쟁기질, 쓰래질, 가리지 않고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른 내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마냥 즐거워했다.
여름철 모내기가 끝나 한가할 때는 잽싸게 꼴 한 망태를 베어놓고 버스비가 없어 자전거로 하루는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어 준비하고, 하루는 중학교에 가서 졸업 증명서와 서류 준비를 하였으며, 하루는 성주 읍내 교육청에 체력장 시험 원서 신청을 하였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되어 우여곡절 끝에 체력장 시험을 치르러 가야 하는 날 아버지는 나한테 벼 베러 가자고 할 때는 말도 못 하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왜 우냐 물었다. 그래서 “엄마 나 공부하고 싶다”라 하며 오늘 성주 읍내 체력장 시험 치르러 가야 한다 하였더니, 엄마, 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 놀라며 할 말을 잇고 있었다. 엄마의 응원으로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다녀오라는 허락을 하여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은 아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갈 수 있다는 기분에 나는 마냥 좋았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시험을 치르도록 허락은 했지만 내가 멀리 아버지를 떠나는 것을 싫어했다.
가을걷이가 끝나가고 시험은 다가오는데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 친구 약국 하시는 분을 찾아가 아버지한테 나 공부시켜 주라고 권해달라 부탁하였다. 아저씨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관아 너 공부하고 싶나”라며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어느 토요일 날은 대구에서 자취하는 먼 중 집안 동생 순기한테 같이 자취하면 도와줄 수 있다며 학원 갈 수 있게 아버지에게 얘기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뒷날 성 약국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자식 공부시키면 나중에 아리랑 신탄진 담배 얻어 피우지만, 공부 안 시키고 농사짓게 하면 풍년 초 나 마구 초 밖에 못 얻어 피운다 하였단다. 두 사람에 도움으로 시험 기간까지 학원에 다닐 수 있었으며 순기와 자취하는 동안 공부 도움은 물론, 내 인생에 처음 큰 도움을 준 두 사람이라 인생에 큰 은인이라 생각한다. 그해 겨울 1차 시험은 떨어져도 2차 시험엔 합격할 수 있었다.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순기도 합격하고 나도 합격했다. 1974년 우리는 학교는 다르지만, 함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자치하든 집주인도 반가워했으며, 순기네 집과 우리 집 양 집에서 한집 형제가 합격한 것처럼 반겼다. 이때부터 나는 세상일이란, 다 될 것 같으면서 하나도 안 되고, 하나도 안 될 것 같으면서, 다 되는 것이 세상일이라 생각한다. 내 인생에 꿈을 키우기 위하여 시간이 따로 있고 때가 따로 없었다. 꿈을 향해 달리든 그 소년은 환갑 진갑 지난 지금도 바쁜 일정을 위해 오늘도 시간을 나누어 쓴다. 세상일은 마음먹게 달렸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첫댓글 태전동 사진관 하시는 지인의 글이네요.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