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 세조
9반 전명수
단종이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의 정국은 수양대군파와 고명대신파로 나누어졌다. 왕족세력 속에는 수양대군과 그를 견제하는 안평대군의 세력이었고, 대신들 속에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김종서, 황보인 세력과 이를 비판하는 집현전 학사 출신들의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김종서와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은 수양대군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하여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이에 기세가 약화된 수양대군은 집현전 교리 권람, 한명회, 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삼고 힘을 확대해 나갔다.
단종이 1452.5월에 즉위하였고 명나라에서는 그해 9월에 단종즉위를 인정해옴에 따라 조정에서는 감사의 사은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 때 수양은 이 일은 종친의 임무임을 내세워 자신이 가야한다고 주장하며 수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이렇게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상대측의 경계를 늦추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온 것이었다. 명나라에 다녀온 수양은 1453.4월부터 거사계획은 급진전 되었다. 수하에 문신 신숙주와 무신 홍달손, 양정 등을 끌어들인 후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쳐 죽였으며 황보인 등 조정 대신들을 차례로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날이 1453.10.10밤이었고 피비린내를 낸 ‘계유정난’이다. 김종서는 16세의 어린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문인이자 육진을 개척하는 등 무인적인 역량까지 갖춘 비상한 인물이며 세종과 문종의 신뢰를 쌓았고 단종을 잘 보위하라는 고명을 받은 신하였다. 수양은 가장 어려운 정적 김종서를 살해한 다음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을 궁중으로 불러 들였다. 미리 작성된 ‘생살부(生殺符)’에 따라 정적들을 살해하였다. 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친동생인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보내 죽이고 여러 중직을 겸직하여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계유정난 거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 등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하였다. 수양이 정난을 일으켰을 때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 정인지, 최항, 신숙주, 하위지 등은 중립을 지키거나 수양대군에 동조하였다. 이들은 김종서, 황보인 등의 권력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양이 왕위를 찬탈한 후에는 단종 복위운동을 기도하게 되었다. 당대의 최고 문인이자 학자인 김시습과 원호, 이맹선 등은 관직을 버리고 관직에 나오지 않는 등 왕위 찬탈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아니하였다. 단종 복위사건을 주도한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사람에 대하여 중종 때의 사림파들은 ‘사육신’으로 추앙하였고 세조 밑에서 한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은 등을 ‘생육신’으로 높여 불렀다.
계유정난을 거쳐 왕권과 신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노골적으로 왕위를 넘보기 시작하였다. 왕위 등극에 반대한 친동생 금성대군과 왕족들을 유배시키고 눈에 거슬리는 신하들을 모조리 제거함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단종을 밀어내고 1455년 윤유월, 39세에 왕으로 등극하니 제7대왕 세조임금이다. 그는 제5대왕 문종보다 세 살 아래인 친동생이며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고 영민하여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 능하고 성격이 대담하였다.
세조는 등극 후에 왕권강화에 주력하여 내각제 성격인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를 단행하였다. 학자 배출소 역할을 하였던 집현전을 단종복위의 산실로 보고 이를 폐지 시켰으며 정치문제 토론장인 경연을 없애고 서적은 예문관으로 옮겨 버렸다. 따라서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대간은 약화되고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실시하다가 그만두었던 호패법을 복원시키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경제육전,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형량을 규정한 형전(刑典)을 개편 완성하였고 누에 농업을 위해 잠사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였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 오륙록을 보급하여 기강을 바로 잡았다. 명나라와 왜(倭)와는 유화정책을 통해 안정을 꽤하였으며 문화 사업으로 역학계몽, 주역구결, 대명률강해, 금강경언해, 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하고 역대 왕들의 시를 모은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하였다.
세조의 무단정치를 수행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은 그의 좌장격인 권람과 최고의 보좌역인 장량격의 한명회, 문화통치를 이룩하였던 신숙주를 들 수 있다. 세조는 정희왕후와 근빈 박 씨 두 명의 부인과 4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희왕후는 수양이 계유정난 당시 거사계획의 정보누설로 행동을 주춤하자 손수 갑옷을 입혀 용병을 결행하도록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인이었다. 예종 임금이 19세에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예종이 요절하자 어린 아들 제안대군과 맏아들이 낳은 장손 을산군을 제치고 그녀의 개인적인 결단으로 둘째손자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려놓고 7년 동안 정사를 이끌어 나갔다. 과단성 있는 섭정으로 조정을 안정시켜놓고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물러나게 되었다.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소혜왕후 한 씨를 맞아 성종을 낳았으나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성종이 그의 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하였다. 세조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1468년 9월에 13년3개월간의 재위를 끝으로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정읍 부평리에 소재한 광릉이다. 그의 능 동편 언덕에 정희왕후 윤 씨가 잠들어 있다.
첫댓글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 앞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나 봅니다.
단종이 너무 불쌍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계유정난을 거쳐 왕권과 신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권력을 잡기위해 친인척밎 측근들조차 척살하은
모습이 현대사회의 권력사움과 같이 비유대은 좋은 역사기록 이내요 좋은역사 자료 좋은글애 마음 젓고 머물다 갑니다 행복하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