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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닦음의 의미
노영찬/조오지 메이슨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본지에 특별기획으로 연재되고 있는 <돈오돈 수, 돈오점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불교계 뿐만 아니라 타종교계에서도 큰 관심과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종교학자 노영찬 교수는 본지의 기고문을 통해 (돈오돈수, 돈오점수>에
내포된 문제는 불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종교 와 철학의 근본 문제라 가정하고 <돈오돈수, 돈 오점수〉가 지니는 함축성 을 철학, 기독교, 유교 등의 사상을 연결시켜 조명 하고 있다.
최근 「미주현대불교, 지를 통해 여러 번 논의가 된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 (頓悟漸修)에 관해 읽으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박성배 교수를 비롯한 여러분들의 글은 불교계에 비상한 관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문제는 불교계의 관심 뿐 아니라 다른 종교나 일반 지식인의 관심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물론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것은 구체적인 불교라는 종교의 지적, 정신적, 사회적 상황을 전제하는 불교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은 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 논쟁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는 불교의 테두리를 훨씬 벗어나서 토의될 수 있다. 깨달음'의 문제와 '닦음’의 문제는 불교인이 아니라도 종교인이라면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인 것이며 더 나아가서 어느 특정 종교에 속한 종교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삶의 참 뜻을 추구하며 인간 본래의 참모습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이 문제가 절실하게 등장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깨달음'과 '닦음"에 관하여 어떤 전문적인 논문을 쓰기보다는 이 문제가 지니는 함축성을 철학이나 기독교신학, 다른 종교나 사상에 연결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 양식을 결정해 주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깨달음'은 인간 존재의 양태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깨닫기 전의 존재 양식이 있을 것이고 깨달은 후의 존재 양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인간이 자기존재를 그 깨달음이 있기 전과는 전혀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끔 해준다. 깨우침 혹은 깨달음은 자기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인식의 상태이고 자기 이해 (self-understanding)에 대한새로운 발견이다. 이렇게 보면 '깨달음'은 존재(being)에 대한 새로운 이해요 해석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에 닦음'이라는 것은행위 (doing)에 속하는 문제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는 이유는 이 문제가 우리의 '존재'의 문제나 행위'의 문제와 직접 관련을 맺고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서양철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로 부터 Kant를 거쳐서 하이덱거(Heidegger)에 이르기까지 중심적인 문제로 다루어 왔다.
깨달음은 그것이 돈오(頓悟) 이든지 해오 (解悟) 이든지, 앎의 세계이다. 이 '앎'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factual knowledge) 을 안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 (self-knowledge)이요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 에 속하는 앎이다. 그렇기 때문에 앎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가 밀접이 관련을 맺고 있다. 나의 존재의 모습은 내가 나를 어떻게 발견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나의 존재는 내가 나를 어떻게 발견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렇게 볼 때 ‘나의 존재'와 '나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둘이 될 수 없다. 이미 Hidegger 같은 철학자는 존재론 (Ontology)과 해석학(Her meneutics)을 이런 의미에서 깊이 연결시켜 놓았다. 불교, 특히.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전적으로 달라지는 경험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경험은 자신의 존재 변화 뿐 아니라이 세상 만물이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깨달음'은 존재의 상태(state of being) 이라고도 볼 수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존재의 상태에 도달했을때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깨달음'은 지적인 의미(epistemological meaning)보다는 존재론적 의미을 더 포함하게 된다. 만약에 깨달음'의 문제를 순전히 지적인 차원에서, 혹은 인식론(Epistemology)의 차원에서만 취급하고 존재론(Ontology)과 아무 관련을 못 가진다면 '깨달음'의 종교적 가치는 완전히 잃어 버리고 말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깨달음의 경지는 앞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 인식론과 존재른이 혼연일치를이루는 경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존재와 행위의 문제
'깨달음'을 나는 존재의 문제와 결부시켰다. 그리고 깨달음을 어떤 특정한 존재 양식이라고도 표현했다. 이 특정한 존재양식은 '깨달음'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의 논쟁의 춧점은 '깨달음'과 '닦음'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말하면 '깨달음'의 세계와 행위'의 세계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앎의 세계가 존재의 세계로 연결되어 이 존재의 세계는 또한 행위의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존재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어떠한 존재'로 결정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닦음과 ‘깨달음’의 문제와 연결되는여러가지 철학적인 신학적인 문제들이 등장하게 된다. '닦음'과 '깨달음'의 문제는 불교인들의 종교적 문제나, 구원론적 (soteriological) 논의를 넘어서 인간의 기본적 존재 방식이 행위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존재'와 '행위'는 분명히 인간의 가장 기본적 두 형태이다. 이 두가지 형태 즉 '존재'와 행동'은 분명히 인간이 살아가는 두가지 뚜렷한 범주이지만 이 두 범주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버릴 때 삶은 없어지고 생명은관련을 죽고 만다. 인간을 존재의 범주와 행동의 범주를 쪼개어 갈라 놓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을 칼로 두 쪽으로 가르려는 무모한 일이 될 것이다. 사람이 참으로 사람답게 되는 것은 이 두가지 '존재'와 행동'이 서로 연결되면서 역동적으로 얽혀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상태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깨달음이든지 그 성격상 ‘갑자기','뜻하지 않게', '예기치 않게' 오게 된다. 아무리 점진적으로 깨닫는다고 해도 그 깨달음이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깨달음 그 자체는 우리를 언뜻 '놀라게 해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1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깨달음은 단순한 '앎'과는 구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냥 사실을 아는 지식은 자기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올 못끼친다. 그러나 '깨달음'은 자기 존재를 변화시키기도 하고, 새로 발견하게도 해주기 때문에 이러한 깨달음은 존재론적 지식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이 자기 자신의 존재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행위'의 문제가 자연히 따라 오게 마련이다. 행위 없는 존재는 죽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닦음이란 분명히 행위에 속하지만, 이 '닦음 의 결과로 '깨달음'이 오는 것인지 아니면 '깨달음 자체가 '닦음'을 자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교적 입장
유교적 가르침에서 본다면 '닦음'이 있지 않고는 군자나 성인같은"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물론 여기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나 유교에서 말하는 '닦음'의 뜻이나, 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나 유교에서 말하는 ‘성인군자’에 이르는 경지가 반드시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정신적 수련이나 혹은 실천과정에서 ‘존재’와 ‘행위’의 범줄로 분류해서 생각해 본다면 유교에서 말하는 학(學)이나 수(修)는 군자나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행위’나 ‘닦음’의 과정없이는 어떤 특정한 ‘존재’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점에 유교는 철저히 점진적 수련을 강조하며 동시에 갑작스런 깨달음의 상태를 경계한다.2주) 또한 닦음없이 지름길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유교적 사고방법에 의하면 닦음의 결과로 성인이나 군자의 경지에 이르기 때문에 닦음도 깨달음도 모두 점진적인 과정을 겪게 된다. 유교에서는 깨달음도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닦음의 과정속에 이 깨달음의 과정도 함께 이루어져 간다.
'공자 자신의 정신적 수련의 과정을 보더라도 그가 15세 부터 70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닦음의 연속이었다. 그의 정신적 편력을 보면 15세에 배움에 마음을 세운 후 부터 70세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닦음'을 통해서 "하늘의 뜻(天命)을 알고 이 하늘의 뜻을 따를 뿐만 아니라 70세에 가서는 '앎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와 '행위'의 세계가 서로 통전되어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자유자재로 따라갈 때 모든 일들이 옳게 이루어지는 '존재'와 '행위', 앎'과 '행위'의 모든 갈등이 극복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물론 여기서 불교적 존재 방식이나 유교적 사고 방식을 비교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겠지만 적어도 '깨달음'의 경지를 어떤 특정한 존재'의 상태로 볼때 이 '존재'의 상태가 ‘닦음'이라는 '행위' 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적 입장
불교, 특히 선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돈오돈수가 돈오점수 모두가 먼저 ‘깨달음’을 전제하고 있다.
"깨달음' 없이는 '돈수'도'점수'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禪)의 독특한 사고 방식은 '깨달음(悟)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을 위해서 '닦음'의 과정을 전혀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많은 수행을 통해서 이 "깨달음'이 이루어지려면 이 깨달음'의 상태가 유교의 경우와 같이 점진적이라기 보다는 갑자기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닦음' 혹은 '수행'과 어떤 형태로든지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頓修’니 ‘漸修’니 하는 말이 생긴 것이다. ‘돈수'라는 것도 ‘수행'이 끝나는 단계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이루어지고 완성이 되는 단계 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돈수’의 의미를 ‘修’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더 긍정적인 의미에서 ‘修’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면서 修의 의미가 갑자기 새롭게 이해되는 단계를 말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頓悟가 頓修를 가져올 때 깨달음'과 '닦음, 즉 '존재'의 차원과 '행위'의 차원을 일치시키는 돈오돈수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깨달음'과 닦음'의 구분이 없어져 버린다. 여기서는 '존재'와 행위'의 이원론(dualism)이 극복되는 반면에 '존재'와 행위 '가 동일시되어 버리는 일원론 (monism)에 빠져 버릴 위험성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과 닦음'을 분리시키는 -이원론도 경계 해야 하지만 이 둘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도 피해야 한다.
보조 지눌의 돈오점수설이 가지는 특징은, '깨달음'의 성격을 '놀람'의 상태, 갑자기 주어지는 상태로 인정하면서도 '닦음’ 의 단계를 지속적인 과정으로 보았다는 데에 있다. 즉 지눌은 '깨달음’과 '닦음' 올 분리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밀접히 이 둘을 연결시키면서 또한 동시에 '깨달음'의 상태(존재)와 이 깨달음이 '닦음'의 형태(행위)로 나타날 때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조 지눌의 입장은 '깨달음‘과 ‘닦음'이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그러나 깨달음'의 상태(존재)와 '닦음(행위)'의 상태는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는 말이 된다. 다시말해서 '깨달음의 영역과 '닦음'의 영역이 두개의 따로 떨어진 개체로 존재할 수는 없지만 '깨달음'과 '닦음'은 역시 두가지 양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이 두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과 "닦음'이 둘로 나누어져서도 안되고, 이 둘이 서로 혼동 되어도 안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頓悟頓修'는 분명히 '깨달음'의 진수를 파악한 것은 사실이다. '깨달음'이 '참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면 더 이상 '닦음 이 필요가 없을 것이고 '닦음'이 필요한 '깨달음'이라면 이것은 아직도 완전한 '깨달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깨달음'의 상태를 어떤 경지에 도달해서 그 '깨달음'이 완전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할 '닦음'이란 어떤 종류의 ‘닦음’ 일까? '닦음'의 종말을 말하는 '닦음'인지 혹은 이 '닦음'이 그 절정에 도달해서 닦음'이 홀연히 완성이 되는 단계를 말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닦음이 문득 완성의 단계에 이른다한다는 것은 ‘ 닦음'의 중간이나 끝남이 아니라 이 "닦음 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다시 말해서 '깨달음의 존재부터 저절로 흘러나온 행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깨달음'의 상태가 '행위'나 닦음의 상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닦음'과 전혀 다른 차원의 관계를 가진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면에서나 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 ‘돈오돈수’의 정당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보조지늘이 주장한 '돈오수'는 "닦음'의 성격이나 '닦음'의 모습을 좀더 현실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볼수 있다. '깨달음'이 행동으로 '닦음으로 나타나는 과정은 아무리 ' 깨달음'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닦음’은 지속적이지 일시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닦음’ (修)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지속성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닦음'이 일시적이 되어버릴 때 '닦음'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지눌은 참으로 '깨달음'의 성격과 '닦음'의 성격, 즉 인간의 존재론적 성격과 윤리적 성격을 분명히 파악하였다.
그러나결코 지눌이 이 둘을 분리한 것은 아니다. '깨달음'과 '닦음'이 서로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인간의 존재의 방식과 행위의 방식이라는 두 범주에서 볼때 이 둘은 그 특색을 달리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돈오돈수'는 '깨달음' 과 '닦음’ 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悟가 頓이면 修도 頓이어야 하므로 修가 頓이 되지 않을 때 그 悟가 어찌 悟가 될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응당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悟가 頓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修가 頓에 이르지 못할까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밑바닥에는 悟와 修 즉 깨달음과 닦음이 철저히 일치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분들은 바로 깨달음과 닦음의 일치성을 철저히 주장하게 되는 반면 돈오돈수의 悟의 차원과 修의 차원이 혼동될 가능성도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문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교 사상이나 기독교 신학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교 사상에서 보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앎(知)과 행동'(行)의 문제 나, 배움 (學)과 성인군자에 이르는 과정의 관계가 인식-존재-행동으로 이어지는 유교 사상과 관계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주자학이나 신유교사상에서 볼 수 있는 ‘理'와 '氣'의 문제와도 연결 되어서 생각될 수 있다.3주)
기독교 신학 입장
또 한편 기독교 신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신앙과 행위'와 깊이 관련될 수 있는 문제이다. '신앙'은 하나의 존재의 상태(state of being)이다. 행위'는 이 존재의 상태가 가지는 역동적(dynamic)인 면이다. '믿음'과 행위'의 문제는 기독교 사상의 역사를 통해서 여러모로 논란이 되어온 문제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서 신학자에 따라서 여러모로 해석이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간단히 초점을 말하자면 우리 인간의 죄적인 옛존재가 '새로운 존재' New Being)로 변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이다. 물론 믿는다고 결정하는 것도 행위의 일종이라 볼 수 있겠지만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행위의 결과로 보지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초창기 바울에서부터 인간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고 16세기 종교개혁에 이르러서 루터나 칼빈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던 것이다. 믿음으로만'은 성서로만'과 더불어개혁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두 주춧 돌을 이룬다. 그러나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사실은 '행위'에 대한 이해이다. 만약에 행위 '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 킬 수 있는 것이라면 구태어 믿음이 필요 없다. 그러나 반면에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심 (義認,Justitfication)을 우리가 받아드리 고 믿음으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행위'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행위는 무시해도 좋단 말인가? 결코 그렇게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바울 신학이나 개혁신학이나 최근의 신정통신.
학에 이르는 Karl Barth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주장은 행위라는 것이 믿음'을 떠나서 따로 이해되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의 결과로 행위가 나오는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이 되고 만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존재 즉 의롭게 인정 받는다는 것은 온혜의 상태'(믿음의 상태)는 행위'와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 특히 개신교 신학의 義認과 聖化의 두가지 개념이 인간의 믿음 즉 ‘존재의 상태’와 ‘행위의 상태’로 서로 연결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 받게 되는 것은 어떤 행위 결과가 아니랄 이것은 인간이 신앙의 상태에 들어갈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義認’이라는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 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비록 죄인이지만 의롭게 인정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가 다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인’ 즉 의롭게 인정 받는다는 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이나 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순간적으로 완전한 의인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행동이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義認 이후에 따라야 하는 과정을 ‘聖化’라고 한다. 이 ‘성화’의 과정은 순간적이 아니라 지속적이다. ‘성화’는 매일 매일 꾸준히 실천되어야 할 과정이다. ‘義認’을 인간 ‘존재’ 양태로 이해한다면‘성화’는 ‘행위’나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존재의 변화는 ‘주어짐’ 즉 은통으로 이루어지며. 순간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나 행위는 지속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義認’은‘聖化’를 가져 올 수 있지만 ‘성화’의 행위가 ‘의인’을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기독교의 근본 입장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기독교 신학은 '존재'의 문제를 더 근본적으로 보고 있으나 '존재'로부터 행위'의 결과가 이어져야 됨을 강조 하고 있 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 하면 성화'의 과정을 즉 '행위'가 없는 '의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값싼 은혜'로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 교 안에서도 이 문제가 제대로 이해 되어지지 못해서 '값싼 온혜'와 갑 작스런 변화'를 바라는 나머지 성 화'의 과정을 전혀 무시해 버리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행위에 집착이 되 는 율법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많이 있다.
여하간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하는 선불교의 문제는 종교나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으로서 이런 문제가 불교학자들에 의해서 토론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교계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종교나 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폭넓게 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타 종교와의 대화에도 큰 공헌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
① 종교학의 입장에서 보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종교적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경험'이라는 것은 인간전체를 포괄하는 경험이지 단순히 지적인 경험만은 아니다. 서양학자들 가운데서 특히
Rudolf Otto 같은 분은 그의 책 ‘The Idea of the Holy'를 통해서 이런 경험을 논술하였고 최근에 와서 Ninian Smart는 더 구체적으로 이 경험을 Nouminus Experience'와 Mystical Experience 두가지로 분류하기도 했다. 다음 두 책은 이 방면에 도움이 될 것이다.
Rudolf Otto, The Idea of the Holy, London,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23
Steven Katz, Mysticism and Philosophical Analysis, London,New York: Oxford Univ. Press. 1978
② 여기서 불교와 유교의 뚜렷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유교 전통온 행위 와 닦음을 거치지 않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불교적인 것이라고 철저히 배척하고 있다.
③ 한국 신유교, 특히 퇴계나 율곡과 같은 학자들은 理 ,氣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면서 특별히 理와 氣의 관계를 여러 각도로 설명하려고 했다.
199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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