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일절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국가,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예가 있더라도 이는 해당 사건이나 인물 등을 비하하거나 정치적으로 가치판단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이 RPG는 허구적 창작물로서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사회주의가 이름 값을 하려면 탐욕이 개입되지 않는 인간관계, 시기와 술책이 없는 우정, 저속한 계산이 없는 사랑이 실현되어야 한다.”
- 레프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중.
9-1. 정통성 대결
조선국민혁명군이 실제로 미래 국군의 모태와 비슷한 위상을 얻게 된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녔습니다. 당대에 “독립군”이라는 일반명사는 대부분 중국의 조선국민혁명군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북을 불문하고 조선 민중들은 진정으로 신대한의 백만 용사가 귀환해 독립문의 자유종을 울리는 장면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주아문은 조선국민혁명군 고급참모, 즉 소장으로 단번에 특진하며, 오전에는 김구를, 오후에는 김원봉을 예방하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국민혁명군의 정통성은 소련군정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상징성이었기에, 북조선보안대 역시 ‘조선국민혁명군 북조선지대’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었습니다. 전 주중소련대사이자 당시 외무인민위원회 아시아총국장이던 알렉산드르 파뉴쉬킨은 중국민주군의 린뱌오와 협상을 벌이고, 김무정, 이소민, 박일우, 윤공흠, 방호산 등 좌익 성향의 조선 출신 대원들을 북조선으로 데려왔습니다. 이들 신참 인사들은 기존의 88여단 출신 인사들, 즉 최용건, 김책, 최현, 류경수, 오진우 등과 마주했으며, 양 진영 사이에는 뚜렷한 긴장감과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중앙아시아에서 젊은 고려인 장교들을 공수해왔고, 이들 중 아나톨리 레토프, 로디온 오가이는 방학세, 허가이, 기석복 등 기존 소련파 관료들과 함께 양 진영의 조율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카자흐 SSR 크즐오르다에서 고려인 사회의 최고지도자로 추앙받던 “지나 세체노브나 리(이진하)”의 부고가 전해지면서, 이들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북조선을 한동안 비우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선국민혁명군의 위상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민전 창설 이후 다소 위축되었던 임시정부 정통론이 다시금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치안 조직으로만 활동하던 건준이 상징성만 남긴 채 뒤로 물러나자, 김구, 김원봉, 김규식은 남조선 내 모든 정파가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과도입법의회 창설을 제안하였습니다.
중도파로 구성된 정통성 있는 민족과도기구 창설을 고대하던 바민 행정장관은 이에 크게 기뻐하며, 민주의원의 수정보강판에 해당하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을 공약하고, 민선과 관선의 비율을 1:1로 하겠다고 천명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 그리고 일부 자유민주당 및 조선인민당과 조선민족혁명당 내 주류 계파 간의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여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당 좌익 세력은 통합에 반대하고 나섰고, 이들을 포섭하려던 이승만 외곽 지지자 조직인 족청계는 협동조합주의를 기반으로 한 제3정파 창설을 제안하였습니다. 생협운동에 적극적이었으나 이범석, 전진한 등이 주장한 국가협동주의 노선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남조선청우당과 기독사민당은 이에 대해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박헌영, 조동호, 이관술, 김사국, 김철수, 이영 등 조선공산당 6인 회합이 열렸고, 이들은 당 행동원들의 조선국민혁명군 입대를 장려하기로 하였습니다. 또 조선청년전위대를 조선청년총연맹(청총)과 통합해, 지역 부조 기능을 갖춘 대중동원 조직인 조선노농청년연맹(청맹)으로 확대 개편하였습니다. 청맹은 포지션이 애매해진 김두한의 민족청년단(민청)을 직속 조직으로 편입하였고, 이 외에도 조선교육자연맹, 조선예술인동맹, 조선학술자총연맹 등 외곽 대중조직들을 대폭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조공이 이강국이 주창했던 ‘신전술’을 과오로 인정하고, 1차 목표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우선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한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10. 미소공동위원회
1946년 1월부터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소 양측은 과도입법기구 구성과 관련한 모든 주요 쟁점에서 극심한 이견을 보였습니다. 미국은 남북이 따로 의원을 선출해 합치는 방식을, 소련은 남북 동시 총선거를 통한 단일 의회 구성을 요구했습니다. 선거구제, 의원정수 비율, 지방자치 범위에 이르기까지 의견 충돌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었고, 식량 문제와 인플레이션 같은 단기 현안조차 실질적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4월 5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남북 확대정치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고, 분위기 반전을 위해 비공식 회담이 덕수궁 옆 부민관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회의는 무의제·무사회자 상태로 진행되었지만,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논의들이 빠르게 전개되었습니다.
회의의 핵심은 과도입법의회의 구성 방식, 선거제도, 지방자치 수준, 그리고 선거관리 주체에 집중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민주사회주의자 권가연은 신중한 중도좌파 노선을 견지하며, 갈등을 중재하기 위한 절충안을 제시했습니다. 남북 동시 총선거 실시, 도 단위 이상의 다중 선거구를 활용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계층·직능 대표 의석 70석 배정, 지방자치기구의 자율성 확대가 주요 골자였습니다.
권가연은 이 방안이 특정 정파에 유리하다는 판단보다 타협 가능한 균형점을 제시하려는 목적에서 제안했으나, 결과적으로 조선공산당에게 유리한 구조를 만들어 주는 셈이 되었습니다. 조공의 이상이는 이 점을 간파하고 내부 분석을 통해 해당 제도의 도입이 자당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곧바로 적극 수용 입장을 취했습니다.
조공 측 인사인 허경훈은 권가연을 ‘조선의 룩셈부르크’라고 치켜세우며 과도한 찬사를 보내는 동시에 은근한 조롱을 담아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고, 조공 내부에서는 이 제안을 당 주도 하에 제도화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이에 권가연은 조공의 전위주의적, 전체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비판하며 양측 간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기독교사회주의자 박현우가 권가연에게 연합을 제안하였고, 두 사람은 대화를 거쳐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노동당(사로당)’을 공동 창당하게 되었습니다. 사로당은 좌파 민주주의와 협동조합주의를 기반으로 하며, 조공 일변도의 정치 지형에 균형을 맞추려는 대안 정당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천도교, 기독교 계열의 농민협동조합 세력과 생협운동을 포괄하며 다층적인 대중 기반을 형성하였습니다.
한편, 선거관리 문제는 회의의 또 다른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조선국민혁명군의 대표 주아문은 자신들이 선거 치안과 물류를 담당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는 곧바로 당군 개입 논란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우익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좌익 특히 조공은 혁명군이 구 임정 수뇌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결국 선거관리는 스위스, 스웨덴 등 유엔이 선임한 중립국 대표단에게 맡기되, 조선국민혁명군은 선거 관련 행정업무에서 일체 손을 떼고, 대신 조선의 국군으로서의 지위는 새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인정받는다는 절충안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사민당, 신민당과 합당 논의를 진행하기보다는, 공동교섭단체 형식의 연합 전선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이는 이 연합체를 ‘조국전선’으로 명명하였고, 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여성연맹, 예술인동맹 등 다수의 외곽단체들을 포함시켜 강력한 정치 블록을 형성하였습니다. 여기에 중도좌파계 민족자주연맹도 합류하며 조공 중심의 연합전선은 한층 더 확장되었습니다.
미국은 남북 정파들의 합의안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서덜랜드 중장은 본국에 판단을 위임하였습니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조건부 승인하였고, 소련은 즉시 수용 입장을 밝혔습니다. 조선이 사실상 좌익의 놀이터가 되었다는 것에 매우 실망한 맥아더 원수는 대외고문 보리스 패시에게 즉각 “일본국방군” 창설안을 상신하라고 지시했고, 워싱턴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0-1. 국가의 탄생
이후 실시된 전조선 과도입법의회 총선거에서는 조국전선 계열이 전체 300석 중 과반을 확보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특히, 조공과의 연합은 거부했으나 선거제도의 덕을 본 사회노동당이 의외의 선전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총선에 한한 전략적 연대 형식을 유지한 채 정치무대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다졌습니다. 친일 기득권 정당인 자유민주당을 배제한 우익 민족주의 빅텐트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는 69석을 가져가며 그나마 주요 정치세력으로서의 입지만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조공이 과도입법의회를 장악해 인민공화국을 선언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국군의 통제력을 가진 독촉 세력을 무시하기엔 정치적 부담이 컸습니다. 이에 조공과 그 우당들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호와 체제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이로써 신생 독립국의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고, 입법부는 ‘의정원’, 행정부는 ‘국무원’, 국무원에서 호선으로 선출하는 내각수반은 ‘국무령’이라 칭하는 등, 임시정부의 체계를 대거 차용한 국가 구조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수용과는 달리, 의정원은 여전히 조선공산당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공산당은 국가의 실질적 운영 전반에 있어서 자신들의 노선을 양보하지 않았으며, 헌법 경제조항에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자립적 민족경제’라는 표현이 삽입되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명문화했습니다. 법체계 역시 소련식 제도를 상당 부분 도입하였으며, 지방자치 역시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한 도-시-군 평의회 체계로 재편되었고, 지역 법원은 평의회 소속 기구로 편입되었습니다.
이후 미군정은 전반적으로 조선을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제외하기 시작했습니다. 워싱턴은 ‘대한민국 승인’ 성명을 발표하며 형식적 이양 절차에 들어갔고, 바민 행정장관은 웨드마이어의 지시에 따라 권력이양 작업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반공주의자로서의 소임을 끝까지 다하려던 바민은, 향토방위대와 해안경비대를 관할하는 통위부장 자리를 조선국민혁명군에 의한 선거조작을 거론했던 바로 그 신익희에게 맡기는 동시에, 공산당에게는 엉망이 된 식량·물가를 관할하는 악성 부처만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좌익 세력에 대한 견제를 이어갔습니다.
소련 또한 자신의 입맛대로 북조선정권을 정비해 나갔습니다. 조선사회민주당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자, 소군정은 조공 소련파와 친분이 깊은 현준혁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장으로 지명하며 북조공의 당세 확장을 밀어붙였습니다. 그 결과 사회민주당은 지역 기반까지 흔들렸고, 일부 지역에서는 평의회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극좌 성향 인사들이 득세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모스크바에서 아직 이를 진지한 위협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시기, 중국 내전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가 주도하는 민주군이 승기를 잡았고, 이에 따라 조선국민혁명군 본대 역시 ‘국군’의 자격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좌익 민족혁명당 계열의 정체성을 가졌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민족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이들에게 조공은 소련의 국제선과 연결된 외세 중심 정당에 가까웠고, 김원봉이 아닌 김구를 진정한 민족지도자로 인식했습니다. 특히 중경에서 좌익 성향 하사관들을 포용하고 조직을 재정비한 김구의 포용력이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임정정통론에 가장 적대적이던 조선공산당이 임시정부 계승을 천명하는 등 민족 대통합이 실현되었다는 선전이 줄을 이었으나, 실제 대한민국의 내부는 사회주의 세력, 중도좌파, 우익 민족주의 세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대립과 견제의 공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조선공산당은 임정 정통성 수용이라는 전략적 양보를 바탕으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지만, 우익 역시 무력은 물론 조직, 대중 기반 등에서 만만치 않은 저항선을 형성하며 새로운 정치 구도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11. 국대안 파동
1945년 9월 신지훈과 조지 윌리엄스 소령의 대담 이후부터 미군정은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관립 고등교육기관들을 통합하여 “국립 서울대학교”라는 국립 종합대학을 설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11월 전민항쟁 직후 경성대 학생총연합회의 동맹휴학과 교수·학생들의 반발은 이를 흔들었습니다. 특히 학내자치 침해를 둘러싼 논란은 격렬했습니다.
미군정청 문교부의 적극적 지원으로 경성대 총장이 된 백낙준은 경성대 학생처에서 미군 장교를 배제하고 교수 중심의 운영을 시도하는 한편, 학생자치 확대를 주장하며 휴학운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대규모로 제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공산당 주요 이론가 정태식이 주도하는 좌익 법학자들과 해방공간의 청년좌파들은 경성법정학교와 경성경전 등을 통합해 경성정치경제대학(경성정경대)을 세우고, 몇몇 전문학교들과 함께 “학내자치옹위연석회의”를 결성했습니다.
이 시기, 정경대는 미국식 학제 도입을 결사 반대하며 학내 소비에트 모델을 차용한 학내평의회 구성을 주장했습니다. 학생과 교원이 동등하게 학교를 운영하는 실험적 모델이었습니다. 1946년 6월 조국전선이 과도입법의회 총선거에서 승리하자, 연석회의의 위상은 급속히 상승했습니다.
그러나 총선거 이후 미군정의 권력이양 차원에서 문교부장으로 김창숙이 임명되면서 전혀 다른 구상이 등장했습니다. 김창숙은 운현궁 회동에서 정경대·경성대의 법학 교육기능 등 일부를 묶어 성균관으로 편입하고, 여타 교육기관은 “민립 서울대학교”로 분리하여 학내자치를 보장하자는 이원화안을 제안했습니다. 프랑스 그랑제꼴을 모델로 삼아, 성균관을 고급관료 양성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처음엔 허경훈을 비롯한 좌익 지도부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허경훈은 자리를 박차고 “만약 이 자리가 공산당 배제를 위한 음모라면, 좌익도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을 던졌습니다. 이에 김창숙은 자신은 “백범과 몽양 모두의 입당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던 비당파 지식인”이라며, 허경훈의 발언을 “피해망상”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허경훈은 이후 조공 당내 회의에서 김창숙의 제안이 조국전선 입장에서 나쁘지 않다는 계산을 내렸습니다. 성균관은 국가행정관료를 양성하는 기관이고, 유도회와 연계된 보수적 유림세력은 잘만 이용한다면 오히려 사로당을 견제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허경훈은 공식적으로 자아비판을 수행하고, 당 내부 인사들에게 김창숙 안을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전달했습니다.
한편, 권가연은 민립서울대 운영권을 좌파가 독점하게 되는 사태를 우려하며, 경성예술학교장인 중도 자유주의자 공유남에게 접촉했습니다. 독일 민주당 출신 유학파로, 안익태의 지도교수였던 공유남은 경성예술대학장이자 친일경력이 없는 인물로 사로당이 낙점한 이상적 후보였습니다. 권가연은 그에게 총장후보직을 제안하며, 교원직능동맹(전교조)을 통한 민주적 운영 구상을 전했습니다. 공유남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습니다.
박현우는 경성대가 좌파 학생들에게 점거당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정경대 제적자 출신 좌익 학생들은 철봉과 각목을 들고 경성대 본부를 장악했고, 혜화동과 동숭동 일대에는 밤마다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반면 경성대 잔류 학생들은 조용하고 내향적이었고, 실질적 조직력은 부족했습니다.
이에 따라 박현우와 권가연은 여성, 기독교계 학생단체를 만들어 최소한의 조직력을 구축하는 한편, 중도적인 교수들과 협력하여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용공 좌익 운동권을 견제하는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이에 더해 박현우는 기독교계 대학(배재·연희·숭실·세브란스 등)을 통합한 고등교육기관을 별도로 구축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은 성과를 거두어 이후 ‘예명대학교(개신교)’와 ‘가톨릭대학교’가 설립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교육체제 개편 논의에서는 독일식 학제를 차용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공유남은 “조기 진로결정이 계급재생산을 유도한다”는 독일 내 사회민주당의 비판을 인용하며 반대했습니다. 권가연은 이를 받아들여 삼균주의의 균학 이념과의 절충을 시도했고, 공유남 박사는 이를 받아 서울대의 등록금을 전액 지원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박현우는 지방 소외를 이유로 반대했고, 심지어 등록금 전액 지원같은 정책이 결국 서울대학교를 (공산당이 주도하게 될) 정부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자 이 안은 즉각 폐기되었습니다.
운영 구조 면에서는 서울대 총장을 학내 구성원이 직접 선출하고, 운영위원회가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방안이 추진되었습니다. 선거 승리를 위해 허경훈은 ‘사회과학연구서클’을 만들어 온건한 학생들을 추가로 포섭하는 한편, 급진적 행동주의에 빠진 학생들을 별도 조직으로 묶어 관리하려 했는데, 이는 당세포나 외곽조직을 무리하게 개입시키는 것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친공산당(홍명희)과 반공산당(공유남) 양측의 공약이 거의 일치하면서 총장선거는 크게 격화되었습니다. 결국 점화되고야 만 경성의학전문학교(의전)와 경성대 의학부 간 통합 문제가 기어이 틀어져, 의전 측은 차별을 우려해 통합을 거부한 채 고려대 설립을 추진하던 우익 진영에 합류했습니다.
책임론 공방의 끝에, 공산당 외곽조직 노농청년동맹(청맹) 간부위원이자 전설적 좌익 원로 이유하의 손자인 이석주는 ‘전국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하고, 무장조직 ‘사수대’를 출범시켜 서울대를 각목과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폭력의 장소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급진파 학생들을 통제할 목적의 전대협이 지나치게 성공해버린 것입니다. 당황한 공산당 청년위원회는 사로당 청년조직들과 임시동맹을 맺어 온건한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만들었지만, 사수대의 폭력에 학을 뗀 일부 학생들이 오히려 유진산, 이철승의 우익 대한청년단에 가담해 똑같이 폭력으로 응수하는 사태마저 벌어졌습니다.
총장선거는 사실상 무산되었고, 대학 운영은 각 정파가 장악한 단과대 중심의 파벌 운영으로 전락했습니다. 서울대를 공산당 계열의 전대협이 어찌저찌 장악하기는 했으나 이는 전혀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었고, 오히려 민청학련의 주도세력인 사로당계에게 공산당이 끌려다니는 결과까지 초래되자, 이강국은 허경훈, 박문규, 최용달을 불러 “녹화사업”이라는 계획을 조심스레 꺼내들었습니다..
12. 기아 위기
전조선과도입법의회 총선에서 좌익이 승리하고 곧바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명시한 헌법이 제정되자, 바민 행정장관과 미군정은 정권 이양을 명분으로 사실상의 행정 태업에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 조선의 식량 사정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귀환한 전재민 250만명이 식량 수요를 높였고, 전쟁 후유증과 물류 단절로 인해 수확량은 급감했습니다. 그 와중에 미군정은 1946년 6~7월 보리와 밀 등 하곡 수집을 단행했으며, 그 결과는 말 그대로 참상이었습니다. 공출 수준의 강제 수매가 진행되는 가운데 암시장이 번성했고, 정부 수매가는 시장 가격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미군정과 신한공사 관료들의 무분별한 정책 시행은 결국 시장 왜곡과 아사자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식량 대란의 실무적 책임은 공산당 소속 식량행정처장 홍남표와 물가행정처장 이영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바민이 공산당을 곤경에 빠뜨릴 의도로 의도적으로 임명한 인사들이었습니다. 홍남표와 이영은 급박한 식량 상황을 타개하고자 박현우, 권가연, 이상이, 신지훈 등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논의 과정에서 이상이는 남한의 곡물 유통 통제가 총체적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며, 시장 기능을 제한적으로 복원하는 ‘조선판 신경제정책’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영은 단순한 시장 개방만으로는 매점매석과 품귀 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강제력 부족이 근본 문제라고 강조했습니다. 공산당이 전평이나 전농, 청맹 등을 보유하고 있긴 했지만, 이를 강제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좌익의 무력시위로 비칠 수 있어 조심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권가연은 농협, 축협, 그리고 금련을 통해 토지개혁과 물가안정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고, 박현우는 외국 곡물 수입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국가도 정부도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신지훈은 급등한 곡가와 시장 붕괴 현상을 ‘압축된 스프링’에 비유하며, 점진적인 완화를 통해 시장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곡가 안정화의 전제로 수매가 인상을 제시했지만, 당시의 재정 사정으로는 실현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이상이는 결국 소련과 이북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하고 샤브신 부영사와 접촉했습니다. 이 교섭은 그 세부 내용에 대한 상부의 명시적 재가 없이 단독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이상이는 ‘자원 의용군’의 인도차이나 파병 가능성을 언급하며 식량 원조와 정치적 거래를 시도했습니다. 물론 아직 프랑스 식민당국과 베트남민주동맹 간에 유사사태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고, 대한민국이 실제로 구속력 있는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으나, 소련의 입장에서는 식량 사정에 도움을 주는 조건으로 한국을 압박할 도구를 가지게 된 셈이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신지훈과 박현우는 각각 식량 위기 해법을 담은 방안을 제출했습니다. 신지훈의 방안은 미곡수매제를 유지하면서도 민간, 조합, 당국 간 협치를 통해 민주적으로 약 5,000명의 ‘농감’을 선발하고, 신한공사 자산을 활용한 저리 소액대출과 현물 대여 제도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박현우의 방안은 미곡 자유화 조치를 핵심으로 하며, 암시장 단속을 위한 군·경 투입, 기독교계 감시망 활용, 농협 주도의 유통망 확장을 중심으로 좌익 배제를 노골적으로 추구한 것이었습니다.
공산당은 박현우 방안이 자신들을 행정·유통 체계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라고 보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반면 신지훈 방안은 우익이 제안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협치 구조와 좌우 연합의 여지를 남긴 것으로 판단하여, 오히려 공산당이 이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좌우 중도 세력이 신지훈 안에 합의하면서, 이 안이 최종안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신지훈의 요청에 따라 신한공사 사장직은 우익에게 배분되었고, 이 일에 큰 관심이 없었던 바민은 이승만의 심복 중 하나인 이기붕을 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승만의 다른 “외부 지지세력”인 족청이 신한공사를 장악했습니다. 이기붕을 무력화시키고 자신들의 인사로 신한공사 이사진을 재편한 족청은 전농·인민위원회에 밀리던 농협 일부를 포섭하면서 실질적인 운영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 역학 속에서 미곡 수집 및 배급에서는 전농이, 단기 소액대출과 고리채 정리사업에서는 농협이 이득을 보았습니다. 금련과 생협 등 사로당계 협동조합들도 덩달아 체력을 확보하며 전농·전평 계열에 대항할 수 있을 만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물론, 이는 사로당이 파시스트라고 경원시하던 협동조합운동의 배다른 형제인 족청이 밀착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조치들 덕분에 1946년 미곡 추수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대규모 아사와 농민 폭동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곡물 공급의 안정화와 암시장 통제는 점차 시장 질서를 회복시켰습니다. 이 조치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잊혀질 뻔한 위치에서 절묘하게 우익의 주도권을 상당부분 가져온 이승만이었는데, 그는 변영태, 임병직 등 수면 아래의 ‘진짜’ 측근들을 총동원해 통일노농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비공산세력의 단결을 촉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3. 전범 재판
1945년 일본의 항복이 가시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본 내에서는 ‘자주재판론’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스스로 자국의 전범을 처벌해야 한다는 논리였으며, 군부를 희생양 삼아 전쟁 책임을 정치적, 법적으로 제한하려는 우익 문민관료들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평화에 대한 죄”나 “인도에 대한 죄”처럼 고위 지도자의 정치적 책임을 처벌하는 데에는 국제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악용하고자 했습니다.
한편 조선에서는 미소 양국의 군정이 점차 철수하면서 남한과 북한 각각 과도정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여운형과 김구, 조봉암 등이 참여하는 남북 공동의장단이 조직되었습니다. 이들은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독립성과 정통성을 알리고자 극동군사재판소에 한국 과도정부의 이름으로 대표단을 파견하였습니다.
대표단이 도쿄에 도착하자, 예상과 달리 가장 먼저 접촉해온 것은 소련이나 중국이 아닌 일본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었습니다. 아베 겐키, 야마자키 이와오, 야마모토 이치류 등 기도 내각의 핵심 전략가들은 조선 측에 극동군사재판소에 조선인 재판관과 검사를 파견하는 방안을 제안하였습니다. 겉으로는 ‘협력’과 ‘화해’를 내세웠지만, 이는 조선을 일본 제국의 일부로 간주하려는 의도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술책이었습니다.
주아문은 이에 대해 “조선은 일본 제국의 하위 구성원이 아니라 피해국”임을 명확히 하며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일본 측의 제안이 조선을 ‘패전국의 2인자’로 포지셔닝하여 전쟁 책임을 분산시키려는 시도임을 간파하였고, 조선이 그러한 틀에 갇히는 순간 독립국으로서의 지위와 전범 배상 요구권을 상실하게 될 것임을 우려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 측은 예상치 못한 파격적 제안을 꺼내들었습니다. 만일 조선이 극동군사재판에 참여한다면, 천황 히로히토에게 극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안은 대표단 내부에서도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허헌과 이인은 천황이라는 존재가 조선인을 인간 이하로 만들었던 제국헌법의 상징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인의 손으로 천황을 단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우려한 것은, 그러한 단죄가 조선을 제국의 구성원으로 전제하는 조건 하에서만 허용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상이는 이 제안이 “정의를 미끼로 한 정치적 유인책”에 불과하다며 강경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천황 단죄의 상징성보다, 조선이 독립국임을 지키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주아문도 “조선은 일본 제국의 일부가 아닌 피해국이며, 독립국이자 승전국으로서 정의 실현에 참여하겠다”고 단언하며, 명백한 독립국 지위 보장 없이는 어떤 제안도 수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일본 측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대표단은 극동군사재판 자체에 대한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치적 압박을 가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였습니다. 이른바 ‘재 뿌리기 전략’으로 불리는 이 방안은, 재판의 정치적 의도를 드러내고 일본 우익과 문민관료의 책임회피를 전면 공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상이는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의 한덕수 및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카스가 쇼지로와 비밀리에 접촉하였습니다. 이들은 ‘문민관료 불기소’라는 은밀한 합의가 재판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극우와 군부의 반발을 자극하여 정치 혼란을 유도하는 공작을 함께 구상하였습니다.
주아문은 도쿄에 머물고 있던 중국공산당 인사 천보다와의 접촉을 통해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외교적 및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이 피해국이자 독립국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중국 측이 조선국민혁명군을 연합국 우방군으로 인정하고 군사적 지원과 교관 파견을 약속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천보다는 이를 수용하였으며, 그 대가로 대한민국은 국군 내에 중국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일정 부분 감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대표단은 기도 고이치 내각이 ‘문민관료 불처벌의 불문율’을 깨고 관념우파의 수장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를 기소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기도 고이치 내각이 정통 우익을 배신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퇴역 군인단체들이 결집하며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죠. 붕괴 직전의 기도 내각을 구한 것은 애꿎게도 극좌모험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일본공산당 일부 과격파는 우익의 반발에 편승해 총궐기를 감행했고, 극단세력 청산의 구실을 잡은 GHQ는 무력을 사용해 극좌와 극우를 모두 소탕해버렸습니다. 일공과 거의 불가분의 관계였던 조련 역시 사분오열되고 말았죠.
소련과 중국은 극동군사재판소에서 철수한 뒤, 대한민국을 ‘승전국의 일원’으로 공식 인정하였습니다. 동시에 전범재판은 “군부에 한해” 더욱 확대되었고, 기존에 기획하던 수뇌부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좌관급 이상 장교들을 포괄하는 대규모 기소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퇴위한 전 천황 히로히토조차 ‘자연인’으로서 기소되었으며, 이는 일본 내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미군이 보수 내각을 지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은 국민주권조차 명시하지 않는 반동적 헌법 체제로 향하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중화민국은 주한군사고문단을 파견하며 국군 재편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곧 국군 내 좌익 계열 세력이 급부상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김두봉·최창익을 지지하늠 좌익 지휘관들이 국군 내 권력 중심에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지청천 총참모장은 이 변화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그나마 군 내 영향력을 레버리지 삼던 우익도 매우 당황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14. 민국의 검은 양
1947년 3.1절 기념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앞두고 남북한 임시정무위원회와 좌우 정파가 단결 의지를 다지는 중요한 행사로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행사 당일, 주요 정치인들이 탄 차량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테러가 발생해 김규식, 조소앙, 장덕수 등 중도·우파 지도자들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박헌영의 자택도 습격을 받았으나 그는 무사했죠. 경찰은 족청 사업부장 박철환을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지만, 그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며 사건은 미궁에 빠졌습니다.
남북공동의장단은 사건의 중대성을 고려해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민·군·경 합동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족청, 장청, 한청, 대동단, 청맹 등 대부분의 청년단체들과의 연관성만 있을 뿐,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족청에 대한 정황 증거는 넘쳐났지만, 수사팀은 증거가 지나치게 깔끔하고 완벽하다는 점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박기성은 족청 간부들의 진술에서 사로당이 군을 통해 쿠데타를 시도하려 했다는 주장도 들었다고 밝혔으나, 신지훈은 당시 상황을 바로잡으며, 테러의 진실을 감추려는 세력의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허경훈은 이범석이 테러를 알았을 리 없다고 보며,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이범석 본인을 직접 접촉했습니다. 이범석은 허경훈과의 대면에서 족청 간부 박철환이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된 사실에 대해 조심스럽게 유감을 표하며, 자신이 모든 단원의 행동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박철환은 공산당과 민자련을 분리시키는 공작에 집중해온 인물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실질적 이익을 얻는 세력이 누구인지 반문한 허경훈에게 이범석은 공산당이 청년단을 증오하게끔 만들고 그로 인해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 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며, 이승만이나 김구가 배후일 가능성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허경훈은 속으로, 그간의 언행을 고려할 때 권가연처럼 순진한 성향의 인물이 그러한 공작을 지시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판단했습니다.
주아문과 신지훈의 조사는 테러 배후에 족청과 사로당을 동시에 타깃으로 삼아 양측을 이간질하려는 정교한 공작의 흔적을 포착했습니다. 특히, 테러에 사용된 무기의 출처가 미군의 묵인 하에 남한에 잔류 중인 구 일본군 헌병대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으며, 이는 미국 내 특정 세력—특히 24군단장 아이첼버거를 따르던 미군 정보기관(CIC)―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또한, 족청을 범인으로 지목하게끔 유도된 증거와 사로당의 식량정책을 과장되게 부각시키려는 여론전은 공산당이 이들 모두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도록 유도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이 공작의 목적은 공산당을 자극해 좌우 중도세력 간의 협력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의 정치 지형을 극단적 대립으로 몰아가려는 데 있었으며, 이는 여전히 현실화될 위험이 매우 높은 상태였습니다.
허경훈은 이범석과의 대면, 그리고 주아문과 신지훈의 조사 결과를 접한 후 극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당내 급진 인사였던 이강국이 또다시 이석주와 전대협 등을 동원해 우익 무장세력에 무력으로 맞서자는 주장을 펼쳤고, 심지어 청맹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감시해 백의사에 넘겼다는 정황이 드러나자, 허경훈은 당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철저한 내부 단속에 착수했습니다. 한편, 박기성과 주아문은 미국이 직접 테러를 감행하진 않았더라도 누군가를 시켜 조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으며, 박기성은 군 내에도 이 테러에 동조했을 인물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 무렵, 주아문은 마침내 테러 실행조의 실체를 밝혀냅니다. 전북 위도에서 미군 CIC의 지원을 받는 특작대가 활동 중이며, 지휘자는 국군 이성가 중령, 실질적 책임자는 김창룡 중위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조선 연락사무소(KLO)’로 불리는 이 부대는 장청 출신들로 구성돼 있었으며, 군본부 습격사건 이후 철저히 선별된 인물들로 조직된 비밀 부대였습니다. 주아문은 이 정보를 철저히 통제한 채 동료 박기성에게만 공유했고, 무력 진압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중, 송호성 2사단장은 소련·중국과 연계된 작전을 강하게 반대하며 국군 분열을 경고했습니다. 이에 박기성은 더는 사안의 비밀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며 격분했고, 주아문의 독단적인 판단에 대해 군사정변을 우려하며 신뢰를 철회했습니다.
한편 허경훈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자 격분한 끝에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공산당 중앙에 격한 어조의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그는 온건노선을 유지한 이유가 미국을 기쁘게 하려던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이번 사안의 해결책이 공산당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면 더 이상 자제하지 않고 적들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넣자”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본 박헌영은 위기의식을 느끼며 허경훈을 제8연대장 최남근 중령과 연결해주었습니다. 과거 장청 출신이었던 최남근은 사건을 일으킨 부대를 향해 정면 돌파하지 말고 비밀리에 제거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는 특히 일부 부대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며, 은밀한 작전을 위해 중국민주군과 함께 입국한 양주평이 운용하는 ‘서류상 국군’ 부대를 활용하라고 제안했습니다.
허경훈이 칼을 가는 동안, 박기성은 테러 실행조에 대한 정보를 조사위원회 전원에게 공유하며 사태의 중대성을 알렸습니다. 최용덕은 당장이라도 공습을 감행하자며 전투기 출격을 주장했고, 허경훈은 이에 호응하며 위도 전역을 초토화하자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주아문은 보다 은밀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그 계획은 곧 국군 내 일부 부대의 반발이라는 새로운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위도 공습 직후, 이리와 군산에 주둔 중이던 3연대와 12연대는 명령을 거부하고 자의적으로 위수령을 선포했으며, 전북도평의회는 이들의 돌발행동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 혼란을 틈타 8연대장 최남근은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서남토비사령부’ 구성까지 꺼내들었고, 국군 내 좌익 계열 지휘관들도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청천 총참모장은 사태의 파장을 인식하며 주아문에게 현장의 판단을 요구했고, 주아문은 군 내부 정치세력의 단죄는 필요하지만 내전은 피해야 한다며 온건한 ‘원격포위’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애매한 입장은 허경훈의 분노를 샀고,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언급하며 주아문에게 좌우 중 어느 편에 설지를 분명히 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신지훈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직감하고, 우익 전반이 반란세력과 함께 몰살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며 초당적 협력을 위한 설득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이 와중에 신익희는 남북 임시정무위원회와 공동의장단에 이리-군산 일대에 대한 비상계엄령을 요청하며 상황을 국가 비상사태로 끌어올렸습니다.
한발 더 나아간 신지훈은 이승만과 신익희를 설득하여, 우익 진영이 조국전선에 전격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결국 통일노농당, 대한국민당, 족청이 조국전선에 가입하였고, 이들은 ‘대한노농당’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되어 거대한 우익 정당이 탄생하였습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었던 허경훈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국방위원회 창설과 정치훈련장교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였으며, 이승만은 이범석을 초대 국방위원장으로 임명한다는 조건 아래 이를 수용함으로써 좌우 합의의 형식을 완성하였습니다.
이후 주아문은 더 이상 온건책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리·군산 일대에서의 반란 진압 작전을 단행하였습니다. 8연대와 5연대를 중심으로 한 진압군은 반란 부대를 신속히 무력화하였고, 전북도평의회의 설득을 통해 민간의 지지도 확보하였습니다.
허경훈은 군 내부 반란세력의 진압과 함께 반공 우익의 위협이 실질적으로 제거되었다고 판단하고, 자유민주당과 대한청년단의 불법화를 요구하였습니다. 국방위원장에 임명된 족청 단장 이범석은 박철환 등을 전면에 내세워 흑색 테러를 주도하였으며, 한청과 연계된 정치인들이 연이어 제거당하였습니다. 백주의 도심에서 자행된 피의 숙청 속에서 미국은 조선 내 공작을 정리하고 일본 재무장을 본격적으로 지원하는 쪽으로 전략을 전환하였습니다.
이승만은 반미 민족주의자이자 ‘자주파’의 상징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해나갔습니다. 그는 조선 내 정파들을 국제주의 사회주의 성향의 ‘평등파’와 민족주의 사회주의 성향의 ‘자주파’로 구분하였으며, 자주파의 수장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치 구도 속에서 아직 조국전선에 참여하지 않은 사회노동당은 거대한 압박에 직면하였습니다. 조국전선 비가맹 세력에 대한 배제가 차기 총선거에서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들은 조국전선에 백기투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dear0904 역시 제 주장대로 조국전선 내/외 상관없이 개별 정당에 대한 투표를 허가하고 봉쇄조항을 1%로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
@렌지파일 가자!조선공산당, 건설조선공산당, 가가호호조선공산당, 히시태그조선공산당, …
(…)
@E.E.샤츠슈나이더 그 문제도 생각해봤는데, 어차피 사회혁명당만 조국전선 외인 이상 무슨 제도를 도입해도..
@E.E.샤츠슈나이더 역시 정당법을 엄청 빡세게 잡아서(...)
@렌지파일 위성정당 메타로 가는 방법도 있죠 ㅋㅋㅋ 조국전선 외 정당을 만들어서 의원을 꿔주고...
@dear0904 그거야말로 경기공산당 강원공산당 평북공산당 읍읍..
@E.E.샤츠슈나이더 아, 생각해보니.. 개방형 명부를 채택해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나요? 물론 받아들일지는(...)
@렌지파일 선거가 대중영합대결 인기투표냐고 반발하는 것과 별개로, 유권자들은 지역과 성향을 불문하고 후보자에게 직접 투표하는 것을 선호하므로 대중적 호응은 좋을 것 같습니다.
@dear0904 그러고보니까 한국은...
자주 : 미제의 괴뢰이므로 미달성
민주 :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미달성
평등 : 부익부 빈익빈의 독점자본주의 사회이므로 미달성
달성한게 하나도 없군요(?)
@E.E.샤츠슈나이더 오.. 그럼 개방명부로 유사민주주의라도..
@렌지파일 사실 완전 개방 명부로 하면 유사민주주의 수준이 아닐수도 있죠 ㅋㅋㅋ 한 곳 빼고 조국전선 산하라는 문제점이 있지만(...) 정당별로 쪼개서 공천 하며는...
@dear0904 개별 공천은 그냥 자유민주주의라 공산당이 안 받아줄테니..
@렌지파일 그게 문제군요(...)
☢️평화 공세?
4년동안 미국의 핵무기 독점에 시달려야 했던 소련은 평화 공세, 다른 말로 “화전양면전술”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코민포름은 각지 공산당원들과 좌익 성향 지식인들을 동원해 세계평화수호지식인대회, 국제민주여성연맹(WIDF), 세계평화위원회(WPC)같은 회의체들을 창설하는 한편, 안티핀테른에 서구권 공산당원들을 대거 꽂아넣어 미국의 매카시즘에 대항했습니다.
문제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서구권에서 광범위하게 불어닥친 매카시즘 광풍이 정말로 진보좌파 성향 지식인들을 “필요 이상으로” 결집시켰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핵실험을 할 때마다 비난을 퍼부을 용도로 소련이 지원했던 세계평화수호지식인대회의 닐스 보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레오 실라르드, 막스 보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나쓰메 유키오 등 물리학자들은 이제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비난하며 주요 핵기술의 오픈소스화와 국제적 관리, 핵실험 영구정지 등을 줄기차게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소련의 주구 역할을 자처하던 프레데릭-이렌 졸리오퀴리 부부 역시 이 국제원자력과학자회의(ICAS)에 이름을 올리고 나섰습니다.
때마침 창설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자본주의는 비판하고 싶고, 그렇다고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는 싫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눈길을 끈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아니 진짜로 비엔나 인터내셔널이었다니..
🇮🇹이탈리아 내전의 결과.
3: 파시스트 세력의 최종 승리
4-5: 왕당파 세력의 최종 승리
6-7: 좌익모험주의 세력의 최종 승리
8-13: 휴전협정 조인, 이탈리아 분단
14-15: UN의 개입. 명목상 이탈리아 연방, 실질적 분단.
16-17: 이탈리아 연방 성립.
18: UN 신탁통치령 이탈리아..?
Rolling 3d6 : 6, 3, 6, TOTAL: 15
수십만명의 목숨을 갈아넣은 이탈리아 내전은 2년째 교착 상태에 놓여 조금의 진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소 양국 모두 북쪽의 모험주의자들과 남쪽의 왕당파 파시스트들을 공개적으로 후원하지는 않았기에, 평화협상은 국제연합을 통해 진행되었습니다. UN 사무총장이자 노르웨이 노동당원인 트뤼그베 리(Trygve Lie)는 베르나도트 백작을 이탈리아 문제 고등판무관으로 위촉했고, 그는 로마에 명목상의 연방정부를 두되 북쪽과 남쪽의 각 주들이 자율권을 행사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전쟁을 더 이어가고 싶은 이들은 그 누구도 없었고, 남북 각 진영 내부에서도 각자의 중앙정부에 환멸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기에, 이탈리아 특유의 분권적 색채를 살리면서도 리소르지멘토로 달성한 통일의 상징은 살리는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결국 1949년 10월 4일 스위스 루체른에서 양측 대표가 정전협정 및 “연방 창설에 관한 조약”에 서명하면서, 이탈리아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이럼 한국보다는 나은 엔딩이네요?
조약에 따르면 연방정부는 각 ‘주’들 간의 분쟁을 중재할 권한만을 가질 뿐 독자적으로 통솔 가능한 군사력을 가질 수 없으며, 사보이아 왕실과도, 토리노의 공화국 정부와 반파시즘투쟁위원회와도 별개의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각 주들은 총 4개의 ‘그룹’으로 나뉘었고, 이 그룹을 탈퇴하거나 다른 그룹에 재가입하는 것은 조약 체결일 기준으로 15년간 금지되었습니다. 각 그룹은 독자적인 통화발행권과 관세설정권을 가졌으며, 환율과 무역, 경계 재조정, 왕래 등에 대한 사항을 연방의회에서 협의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이탈리아는 명목상 통일을 유지했으나, 평화를 위해 실질적으로는 리소르지멘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 양강의 사실상 방기 속에서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된 이탈리아 내전을 종식시킨 유엔의 권위는 수직상승했습니다. 미국에게는 좌익 국제주의자들의 소굴, 소련에게는 기만적 사회제국주의 집단으로 여겨지던 유엔은 조금씩 양극화된 국제사회 속에서 독자적 행위자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이탈리아…
@E.E.샤츠슈나이더 아니.... 의도치않게.... 상징적인 창설멤버가 되버렸네요
+이탈리아는 원역사 한국보다는 낫네요 '명목상' 일단 한 국가이니.... 오우 근데 트리에스테는 전부 이탈리아것이 됬네요?
@dnjdss 유고가 한번 까불었다가 1924년 국경으로 롤백당하는 바람에 그만..
@E.E.샤츠슈나이더 워우...... 티토가 울겠군요
@E.E.샤츠슈나이더 로마는 워싱턴처럼 된건가요?
@차들어 홍차야 명목상으로는 그럴껍니다 다만 여기선 반연방주의자들의 미국(?)이 이탈리아로 현실화 된거겠군요
+Distretto Federale di Roma가 로마 연방 지구라서 헌법상 워싱턴 D. C.역할(즉 연방수도?)을 할것 같네요
@E.E.샤츠슈나이더 교황청은 어떻게 되었나요?
@렌지파일 라테란 조약이 여전히 유효합니다. 즉 로마 연방구에서 양시칠리아 왕국(?)을 편드는 중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신롬도 아니고 한 나라에 국왕이랑 대통령이 공존해요? ㅋㅋㅋ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ㅋ 마치 프로이센의 힘이 약한 북독일 연방이나 30년 전쟁 후 신롬같네요 ㅋㅋㅋ 근데 4가지 체제가 뒤섞인.....
+생각해보니까 라테란 조약이 유효하면 박현우 개인 이벤트(?)로 바티칸 시국이 나올 가능성도 적지않겠네요 실현만 된다면 34년 이른 성립일지도 모르겠네요
4화를… 곧 써보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십자군
1946년 2월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찰이 흑인 참전용사 아이작 우다드(Isaac Woodard)를 구타해 실명에 이르게 한 사건 이후, 유사한 사건들은 남부에서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마세오 스나입스(Maceo Snipes)는 민주당 조지아 주 경선에서 투표했다는 이유로 KKK에게 심하게 폭행당한 뒤 병원에 실려갔으나 ”병원에 흑인 혈액이 없다”는 이유로 수혈을 거부당한 채 사망했고, 로버트 말러드(Robert Mallard)는 조지아 주지사 선거에 투표한 직후 KKK가 난사한 권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심지어 조지아 주지사 허먼 탈마지(Herman Talmadge)는 말러드의 장례식에 경찰관들을 보내 그의 아내 에이미를 살해 용의자로 체포했고, 말러드의 자택은 방화범들에 의해 불탔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격노했지만, 전략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는 모든 군 조직 내에서 인종분리조치를 금지하는 “행정명령 제10097호”를 발령했고, 트루먼 시절에는 비슷한 시도에 대해 “군을 사회개혁의 도구로 쓰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투덜댔던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 역시 아이젠하워 앞에서는 입을 꾹 닫았습니다.
당연히 예상했던 대로 남부 민주당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가장 열정적인 인종분리주의자이자 본인부터가 KKK 회원이던 탈마지 주지사는 주경찰과 주방위군을 동원해 맞섰고, 이는 최악의 패착임이 증명되었습니다.
1949년 10월 31일, 아이젠하워는 “1807년 반역법(Insurrection Act of 1807)”을 꺼내들어 조지아 주방위군을 연방화하고, 연방보안관을 출동시켜 탈마지를 체포했습니다. 이른바, “제2차 재건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조치였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남부 군정이라도..?
엌 역시 딕시들은 연방군으로 머리마사지(??)를 해야 하네요(....) 근데 저 사건도 원역사에서 그대로 일어났나요? 몇년 앞당겨져서 일어났다든지....
@dnjdss 전부 다 실화입니다. 딕서운 이야기(…)
@dnjdss 괜히 흑표당같은게 생겼던게 아니죠..
@E.E.샤츠슈나이더 오우..... 역시 KKK를 만든 딕시들....
@렌지파일 하기사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흑인 민권운동이 일어나지도 않았으니 말이죠..... 사실 마오주의가 생기다가 만 이 시간선의 흑표당의 움직임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창설 시간대까지 진행한다면 말이죠(??)
@E.E.샤츠슈나이더 비정기 연재된다던 "아이크의 우당탕탕 딕시 때려잡기 대작전“ 1편인가요(?)
@dnjdss 극좌맹동주의(평의회주의)가 마오주의 포지션을 잡는 분위기라, 물건너서 미국 가면 “Black is the new Red(…)”라면서 전투적 아나키즘 조직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상해인민공사 보면 사실 별반 차이가(?
@E.E.샤츠슈나이더 아니..... 흑표당의 반란적 아나키즘.ver이 생기겠군요 잘못하면 일리걸리즘으로 막나갈수도....
@렌지파일 중국 다이스에서 그쪽…이 나왔으면 재밌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 ㅋㅋ
@dnjdss 이제 연방정부는 불법도감청, 폭동적 시위진압, 불법 압수수색, 불법체포, 정당방위를 빙자한 비사법적 살인 등으로 맞서는… 언제나와 같은 자유와 기회의 땅 아메리카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그러고보니 엊그제인가 트황상이 워싱턴에 군대 투입했다고...
@차들어 홍차야 워싱턴dc가 범죄율이 줄어들곤 있는데 다른 곳 평균에 비해 높고 총기범죄율도 특별히 높다보니..
@로콘 4화 올라왔습니다. 차기 이벤트 시간 댓글 확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