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개요
ㅇ 언 제 : 2022. 6. 9(목) - 6. 10(금)
ㅇ 누 가 : 한울회원 10명
ㅇ 어 디 : 안동일원(경북 안동시 서후면, 풍천면, 도산면)
ㅇ 날 씨 : 맑음
ㅇ 여 정 : - 1일차 : 봉정사 – 병산서원 – 하회마을 – 충효회관(숙박)
- 2일차 : 도산서원 – 안동댐 - 월영교
나들이여정(앨범)
1일차(6. 9/목)
안동
육해공군(陸海空軍), 그리고 해병대(海兵隊) -.
새천년이 시작되고부터 군(軍) 주임원사(主任元士)로 함께 근무하던 전우들의 모임인 ‘한울’회 정기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투병중인 짝지를 두고 홀로 경북 중북부에 있는 ‘안동(安東)’으로 향합니다.
마음이 편치 않지만, 완장(회장)을 찼기에 어쩔 수가 없네요.
안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10년)될 정도로 한국유교문화의 본고장이자 전통문화유산이 풍부한 곳입니다.
옛 선현들이 안동지세를 ’산은 태백으로부터 내려오고 물은 황지로부터 흘러와 산천의 빼어남과 인물의 걸출함, 그리고 토산(土産)의 풍부함과 풍속의 아름다움이 이곳에 있다‘고 할 만큼 길지(吉地)로 여겼다합니다.
유학명현(儒學名賢)이 많이 배출되면서 예로부터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 발달하여 볼거리도 많다죠.
총무를 맡은 믿음직스러운 육군주임원사께서 안동 ‘선비순례코스’를 계획했습니다.
옛날엔 꼬불꼬불 끝없이 S자 그리는 산길이었을 텐데, 지금은 고속도로가 뻥 뚫렸습니다.
덜렁 혼자서 가마를 움직이려니, 조금은 썰렁하네요.
그래도 낯선 곳의 방문은 늘 설레어서 좋습니다.
(그러나 의성휴게소에서 차안에 둔 지갑을 도난당해 신분증을 비롯하여 카드와 현금분실로 일로 여행 내내 우울했습니다)
충효회관/오찬
2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육군(연대급)에서 운용하는 ‘충효회관(忠孝會館)’입니다.
인천, 춘천, 청주, 그리고 계룡에서 꾸역꾸역 모여듭니다. (문경은 불참)
2년이 넘었는데요, 그래서인지 무척 반갑습니다.
배꼽시계가 점심때를 알립니다.
천년고찰 ‘광흥’사를 품에 안은 학가산 아래로 실실 움직입니다.
지하암반에서 솟아나는 깨끗하고 풍부한 용출수가 유명한 온천지역이랍니다.
조선시대 길 떠난 중앙관료들이 쉬어가는 원(院)이 있던 자리로 맛있는 ‘촌 두부’집이 있다는데, 그만 문이 잠겼네요. ㅎ
할 수 없이 봉정사입구로 이동하여 버섯찌개로 대신합니다.
꿩 대신 닭이지만, 절로 엄지 척~! ㅎ
잘 먹었습니다.
봉정사
첫 번째 탐방할 곳은 천등산자락에 있는 세계유산 ‘봉정사(鳳停寺)‘입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능인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라는데요, 우리나라 절집 중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극락전(極樂殿, 국보 15호)‘이 유명합니다.
’능인‘이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려 앉은 곳에 절을 짓고는 ‘봉정(鳳停)‘이라 했다죠.
입구부터 우람한 나무들이 녹록찮은 세월의 힘을 풍기며, 아직도 보무당당한(^^) 노병들을 맞이합니다.
우선 ’대웅전(大雄殿, 국보 311호)‘에 압도됩니다.
질서정연한 건물배치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산사(山寺)라는 평인데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천년고찰답게 덕지덕지 달라붙은 세월이 고색창연합니다.
오랜 세월의 영향으로 단청들은 벗겨졌지만, ’만세루(萬歲樓)‘의 은은함과 포근함도 인상적입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맑고 정갈한데요, 동쪽으로 약 100m 쯤 떨어진 ’영산암(靈山庵)‘까지 살핍니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ㅁ‘자로 배치된 마당공간이 주는 아름다움과 일상의 편안함이 깃든 곳입니다.
어머니의 품속 같이 몽환적인데요, 참 잘 어울리는 누각이고 정원입니다.
영화촬영장소('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 '나랏말싸미')로도 유명한 곳이라네요.
상주하는 스님이 없다는 영산암자지만, 찌든 마음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털신 한 켤레가 외롭게 놓여있네요.
툇마루엔 아직 봄이 머물러있습니다.
1999년 4월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다녀갔다죠.
우리나라 7대 산지승원(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을 드디어 몽땅 섭렵(涉獵)했습니다.
병산서원
서원건축의 백미(百媚)라는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260호)‘을 찾았습니다.
격식을 갖추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담아냈다는 평입니다.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안동 서남쪽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했습니다.
하회마을 끄트머리에 있어 기행(紀行)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는 곳입니다.
풍산 풍악서당(豊岳書堂)이 전신이라는데, 선조 5년(1572년)에 서애(西厓) ’유성룡‘이 이곳 병산(屛山)으로 옮겼답니다.
’서애‘는 도학, 글씨, 문장, 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성곽수축과 화기제작을 비롯해 군비확충에 힘쓴 인물입니다.
1607년 서애선생이 타계했는데요,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광해 5년(1613년)에 위패봉안과 함께 병산서원으로 개칭했습니다.
주름치마를 펼쳐 놓은 듯한 풍광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으로 들어서 누하진입 계단을 올라가면 서원의 중심인 마당이 나옵니다.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좌우에 두고, 강학(講學)공간 입교당과 유식(遊息)공간 만대루(晩對樓)가 마주합니다.
꽉 찬 공간에서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확 트인 공간에서 쉴 수 있게도 해준 선현들의 창의적 지혜가 돋보입니다.
펼쳐진 낙동강과 함께 병산(屛山)이 둘러쳐진 아늑한 서원모습이 장관입니다.
자연에 녹아든 건축미 -.
병산서원은 자연과 어떻게 어우러져야 하는지를 무언으로 보여줍니다.
한옥에서 채움과 비움은 하나의 쌍이라는데, 건물이 채움이라면 마당은 비움이 되는 이치입니다.
’서애‘선생이 유난히 배롱나무를 좋아했는데, 껍질 없이 속을 드러낸 것처럼 감출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6-8월 꽃이 만발하면 장관이라던데, 아쉽게도 아직 입니다.
사내들에겐 강직한 선비정신을 의미한 배롱나무는 나목(裸木)의 모습 때문인지 여인이 머무는 안채마당엔 심지 않았다죠. ㅋ
퇴계선생 제자로 24살에 벼슬을 시작하여 우의정까지 오른 ’서애‘는 국난을 예측하고 정읍현감으로 있던 무명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천거하는데, 이때가 임진왜란 2년 전입니다.
’서애‘가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고, 어쩜 조선의 명운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나서면서 다시 뒤돌아봅니다.
모진 세파에도 서원을 지켜온 병산과 함께 시류에 휩쓸리지 않던 결연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하회마을
다음은 물돌이동 -,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122호)‘입니다.
600여년을 풍산 ’류(柳)‘씨가 대대로 살아온 동성마을로 낙동강 상류인 화천(花川)이 마을전체를 감싸 돕니다.
하회(河回)란 마을이름도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감싸며 흘러 유래됐습니다.
강류에서 마을 쪽은 백사장인데 비해 건너편은 층암절벽에 여러 정대(亭臺)가 자리할 만큼 승경면모(勝景面貌)를 갖춰 조선시대부터 태극형(太極形)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形)의 풍수명기(風水名基)로 알려졌습니다.
전통유교문화 상징공간으로 가장 한국적이며, 독창적인 문화를 간직한 씨족마을입니다.
또 자연에 순응하고, 서로 교감하는 소통을 통해 건전한 공동체적 삶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풍산으로부터의 진입도로와 연결된 큰길이 마을 중심부를 동서로 관통하며 북촌과 남촌으로 나눕니다.
2010년 7월 전승문화가치를 평가하여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양진당(養眞堂, 306호)과 충효당(忠孝堂, 414호) 이외에 중요 민속 문화재로는 북촌댁(84호), 원지정사(85호), 빈연정사(86호), 작천댁(87호), 옥연정사(88호), 겸암정사(89호), 남촌댁(90호), 주일재(91호) 등이 있습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쓰이던 하회탈(국보 121호)은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9개의 탈이 전하지만 이중 3개는 분실됐다고 하네요.
하회별신굿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별신굿이 열리면 방방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는데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하회마을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이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세트가 필요 없을 정도로 옛 전통의 모습이 잘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송정(萬松亭, 천연기념물 473호)은 하회마을 북서쪽 강변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는 소나무 숲입니다.
강 건너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해 1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답니다.
참 당당합니다.
이번엔 꼭 ’부용대(芙蓉臺)‘에 올라 강물이 감싼 독특한 하회마을을 보고 싶었는데, 또 숙제로 남깁니다.
강가에 높이 80m가 넘는 높이로 깎아지른 듯 서있는 암벽인데요, 낙동강이 이곳에 이르러 추월담(秋月潭)과 옥연(玉淵)을 만들어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서애‘가 낙향하여 머물던 ’옥연정사(玉淵精社)‘엔 3정승(유성룡, 노수신, 정전)이 놀았다는 삼인석도 있다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강과 어우러지는 경관도 참 빼어난데요, 이곳에서 ’서애‘는 임진왜란을 회고하며 징비록(懲毖錄, 국보 132호)을 썼습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임했던 ’서애(西厓)‘ -.
'징비(懲毖)'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인데요, 귀향하여 임진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이런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염원으로 남겼습니다.
왜란 전 일본과의 교린관계를 비롯하여 전란에 임한 국민적 항쟁과 명나라의 구원, 그리고 바다제패에 대한 당시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임진왜란을 연구함에 있어 대표적 역사자료로 평가됩니다.
언제 함 읽어봐야 할 텐데...
만찬
만찬은 충효회관에서의 소고기파티입니다.
안동도 소고기로 꽤 유명하다죠.
막초 한 순배 돌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옛이야기가 소환됩니다.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부사관 신분으로 청춘을 몽땅 군(軍)에서 보낸 이들입니다.
아직도 열정들은 그대로인데요, 계룡대(鷄龍臺)의 추억들이 잊을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젠 옛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알아주는 이 별로 없지만,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몸 바칠 수 있는 각오는 변함없습니다.
어쩌다보니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분노할 기력들은 충분합니다. ㅎ
초여름 밤이 깊어갑니다.
다음 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