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크로키
(차이의 찬가)
(창세 11,1-7)
장 들로르므 강의록에서(1994년 여섯 번째 만남)
1 - 문맥 속에서 살펴본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역시 대중적이지만,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적힌 그대로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회자한다. 이 짧은 이야기는 문맥에서 단절되어 있으면서 노아의 후손들의 족보 중간에 끼어있다.(창세 10장과 11,8-32) 노아의 후손은 이미 땅에 퍼져있고, ‘그들의 언어, 나라, 땅’을 가진 부족들을 낳았다. 족보는 민족들의 목록이다(70 민족으로, 이 숫자는 완전수다). 곧 세대들의 이야기로 들어간 것이다. 이 족보는 창세 1,28을 반복한 9,1의 축복을 예증한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여기에, 우리 이야기는 ‘아담의 후손들’(5절)의 분산이라는 다른 판본을 제시하며, 일종의 이야기 밖으로 투사된 ‘기원 이야기’ 장르를 되찾는다. 이것은 ‘지혜의 글’로써, 인류의 분산과 언어의 다양함 아래 감추어진 쟁점에 관한 숙고꺼리를 제공한다.
2 - 11,1-7를 주의 깊게 읽어보자
세부사항들을 주목하라. 이 이야기를 탑에 대한 이야기, 교만에 대한 이야기,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신의 질투로 인해 벌어진 처벌 이야기로 읽는다면 우리는 이야기의 세부사항들을 상실해 버리게 된다. 과연 텍스트의 어떤 요소들이 이야기를 이처럼 요약하도록 정당화시키는가? 또 어떤 요소들이 고려되지 않았는가?
3 - 악은 어디 있으며, 대책은 무엇인가?
a) 행위자들은 누구인가?
․ 텍스트는 단지 ‘온 세상’(1절)이라 말한 다음, ‘그들’, ‘아담의 후손들’(5절)이라 한다. ․ 그것은 하나의 국가도 한정된 한 그룹도 아니다.
․ 온 인류가 ‘아담의 후손’이란 형상 아래 모여 있다.
b) 단순히 그저 한 탑의 문제일까?
․ 4절에서, “그들”은 성읍을 세우고,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고 계획한다.
․ 이 두 야망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 그들은 무엇을 겁내는가?
․ 이 겁냄과 2절에서 그들의 이동의 끝에서 그들이 하는 것을 비교해보라.
․ 그들의 공간이해 방식 :
높이(‘하늘에 닿는 탑’)와 넓이(분산의 거부)로 고려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위/아래 그리고 높이/넓이에 따라 위치시키는 이 구별된 방식을 과연 어떻게 생각하 는가?
c) 야훼는 무엇에 맞서 개입하시는가? 야훼가 그의 하늘에서 위협받았는가?
․ 야훼는 ‘이름’과 ‘악의 원인’에 맞서 탑을 세우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개입하신다.
(악의 원인이었던 ‘같은 말’은 히브리어로는 ‘단 하나의 혀’[이미 1절에 등장한다])
․ 3절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내자’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화가 있는가? ‘나’ 앞에 대화 상대인 ‘너’가 있는가?
서로 같은 낱말을 쓰고, 같은 말을 반복할 줄만 아는 이 ‘우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것을 하는 문제이지,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아니다.
․ 그런데 ‘이름을 날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가 자기 이름을 자신에게 줄 수 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름인가 혹은 자신을 위한 이름인가?
6절에서, ‘저들은 모두’, ‘그들이…것은 무엇이든’을 주목하라.
d/ 야훼는 시간 속에서 보지만, 그들의 계획은 공간에만 관여한다.
6절과 4절을 비교하라.
자신에만 집중된 꿈은 시간 속에서 유지될 수 있는가?
그럴 때 역사는 어떻게 되겠는가?
4 - 결과:
a) 분산(8절): “거기에서”
․ 그곳은 하나의 전부처럼 자신에 집중된 한 점이기 보다는 하나의 출발지점이 된다.
․ 그곳은 고지(高地)의 꿈이 되는 대신에 수평적 움직임의 출발점이 된다.
b) 이름을 만들려고 했던(이름을 날리자) 곳에 부여된 한 이름(9절)
․ 이 이름은 꿈이 아닌 하나의 역사에 참조케 한다.
c) 이것은 처벌인가?
아니면 기원의 동일한 관계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보장하는 경계들 속에 인류를 위치 시키면서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내민 손일까?
바벨탑 이야기와
야곱의 사다리와(창세 28,12-15)
성령 강림(사도 2장) 이야기와 비교해보라.
장 들로르므의 강의록에서(1994년)
수정 정리: 마리 테스, 안데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