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쓰는 일기
이태호
우선 모든 사회적 계급장을 떼야 한다. 물론 재화(財貨)의 껍데기도 벗어야 한다.
한마디로 알몸, 상태 야만이 입장할 수 있다.
날씨가 추워선지 지난주보다 수증기가 더욱 자욱하다. 마치 해무에 젖은 갯마을 같다.
키 낮은 수도가랑이 양쪽 벽으로 64개가 있다. 반면, 키가 큰 샤워 꼭지는 31개다.
물이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용도의 차이는 있다. 누군가 금방 다녀갔는지 똑, 똑! 남은 물방울들이 떨어진다. 샤워기 앞에 섰다. 일단 샤워를 먼저 하기 위해서다. 그다음, 조리개를 한껏 조이고 주변을 둘러본다. 구미에 알맞은 피사체를 찾는 것이다.
성(性)만 달랐지 마치 프랑스화가 앵그르의 ‘터키목욕탕’을 보는 것 같다. 하나같이 다른 몸뚱이, 그에 따른 동작이 나름대로 자기 삶의 여정을 풀어내고 있다. 욕탕을 채운 사람들은 젊은이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더 많다. 수도꼭지 하나에 두 사람이 있는 곳도 있다.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지간 아니면 형제나 조손일 것이다. 그들의 몸동작과 손놀림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손길마다 담뿍, 정성이 담겼기 때문이다. 왁자지껄 수다스러운 수도꼭지 주변에는 단체로 온 사람들이 십중팔구다.
희뿌연 수증기 속으로 흥미를 잡아당기는 피사체가 어른거렸다. 사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잔뜩 구부러진 몸뚱이다. 이리저리 젖히면서 때를 밀어주는 사내의 등짝이 젊어 보인다. 나는 머릿속에 숨긴 줌렌즈를 꺼내 가까이 잡아당긴다. 파인더(finder)에 비치는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 찰칵, 찰칵! 순간순간의 동작을 머릿속에 담는다. 아무래도 접사 렌즈를 사용해야만 더욱더 사실감이 있을 것 같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들 옆자리가 비었다. 얼른 일어나 나란히 앉았다. 때수건을 꺼내 들고 때도 없는 허벅지를 문질렀다. 그들의 동작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허벅지가 얼얼하다. 계속 그곳만 밀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쪽으로 고개 좀 돌리세요.” 잘 안 돌아가는 것 같다. 사내는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아버지의 턱과 빗장뼈 사이에 손을 넣고 닦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참 잘하신다. 역시 우리 아버지와 목욕을 하면 신난단 말이야~” 하지만 아버지는 묵묵부답이다. 모든 신경세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분의 CPU(중앙 처리 장치(中央處理裝置)는 이미 작동 불능 상태이다. 그런데도 아들은 사랑으로 땀을 만들어 낸다. 내가 보기에도 구석구석 때를 벗긴다. 말은 못 하시더라도 “아, 시원하다. 우리 아들 참 고맙다.”라고 그분의 가슴은 말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들의 효행에서 아버지를 향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완전히 해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피사체가 저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때밀이는 끝났다. 사내는 길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몸을 닦기 시작했다.
나는 그분의 아들에게 내 등 좀 밀어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사내의 등을 밀어줄 기회이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사내의 아버지 노릇을 대신 해주고 싶었다. 너른 등판이 믿음직스럽다. 별로 때가 없을 것이라는 사내의 말을 무시했다. 겨드랑이와 옴폭 들어간 엉치뼈 부분까지 밀고 닦았다. 감사하다는 사내의 인사를 뒤로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온천탕으로 들어갔다.
너른 공간에는 대온천탕과 열탕, 온탕 등 갖춰질 것은 다 갖춰진 잘 알려진 온천이다.
탕 안에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를 물속에 박고 숨을 가장 오래 참는다는 향유고래 흉내를 내는 분도 있다. 그런가 하면 물개를 닮은 사람도 있다. 노인 한 분이 뜨거운 탕 안에 몸을 담그자마자 거짓말을 한다. “아~ 엄청 시원하다.”
나도 잘 사용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입천장이 벗겨질 정도의 뜨거운 육개장 국물을 마실 때마다하는 거짓말이다. “야, 이 국물 진짜로 시원하다.”
600을 양분하여 300씩 세고 들랑날랑 왕복을 한 다음 탕에서 나왔다.
벽에 걸린 둥그런 시계의 시침을 보니 아직 멀었다. 한 번 더 원을 그려야만 아내와 만날 수 있다. 한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궁리를 했다. 그래 역시 누드화 감상이 가장 좋다. 불알을 수건으로 가리고 타일 바닥을 천천히 걸었다. 모두가 열심이다. 때를 미는 손길들이 부산하다. 코를 풀거나 세수하는 소리도 요란하다. 입장할 때 감투이거나 껍데기는 모두 벗었으니 모든 사람이 같을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몸피의 형태와 동작, 가끔 하는 말속에 그 사람의 삶에 이력서가 있다. ‘외모만 보아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옳은 말이다. 하지만 홀라당 벗은 상태에서는 다르다. 최소한 그 사람의 과거형과 현재진행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탕 안, 기포 발생기에서 거품이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동행에게 말했다.
“저것 말이야, 마치 구절초 군락지에 핀 꽃 같지 않니?” 동행이 말했다. “이 자식은 지난번에도 천장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서로 잡아먹는다더니…….” 그 사람은 분명 문학인이거나 그쪽에 소양(素養)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벽을 등지고 앉아 열심히 이빨을 닦는 사람도 있다. 위아래, 좌우로 계속하여 칫솔질한다. 내가 280을 세었으니 나누기 60을 하면 5분 정도 걸렸다. 나에 비교하면 다섯 배나 많다. 칫솔질을 마치자 곧바로 면도한다. 긁은 데 또 긁고 민다. 별로 털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다음, 세수한다. 길쭉한 튜브에서 치약 같은 것을 짜낸다. 손바닥에 비비더니 한참 동안 얼굴과 귓불까지 정성들여 닦는다.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양쪽 콧구멍을 여러 차례 후빈다. 안에 있는 거추장스러운 이물질을 모두 끄집어낼 요량이다. 팽, 패 애 앵! 코를 푸는 소리 또한 음악적이진 않다. 나는 그 사람을 지켜보면서 결벽증 환자는 아닐까? 짐작하여 보았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언행은 누군가로부터 받은 학습효과의 작용이다. 그런 것들을 나무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습관으로 고착되었다면, 천하장사도 못 말린다. 아, 학습효과라…….
얼추 아내와 해후할 시간이다. 다른 사람은 팬티를 시작으로 속옷부터 입는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패딩까지 상의를 모두 입고 아랫도리를 챙긴다. 둘러봐도 나처럼 역순(?)으로 입는 사람은 없다. 칫솔질 오래 하기 금상 수상자나, 얼굴 오래 닦기 시합 준비생을 이상하다고 여길 필요가 없다. 정작 이상한 녀석은 바로 내가 아닐까?
3주 전에는 참으로 멋진 그림이었다. 빨간색 모닝 위에 노란색 은행잎 여럿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떠나는 가을에게 편지를 쓰듯 옴찔옴찔 움직이는 모습도 보기에 참 좋았었다. 아마 그때 그들이 담은 노란 가을편지는 내 가슴에도 남아 있을 것이다.
썰렁한 은행나무 가지에 구름 한 점 앉았다가 얼른 자리를 뜬다. 삭풍의 냄새를 구름이 먼저 알아차린 것 같다.
북서풍이 사납다. 전봇대를 붙잡고 있던 ‘오리 백숙 집’ 현수막이 호되게 귀싸대기 맞는다. 야무지게 한 대를 얻어터지더니 비틀거린다. 겨울이 오는 목소리가 날카롭다.
카 오디오에 음반을 밀어 넣었다.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을 Langlade(랑글라드)의 기타 소리로 듣기 위해서다.
*회원여러분, 바람 소리가 사납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지진 피해 국민들의 한숨 소리가 들립니다. 참여는 못 하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는 간절할 것 같습니다.
첫댓글 대중목욕탕 풍경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셨습니다. 요즘엔 거의 집에서 해결하고 대중목욕탕에 가지 않으나 두 아들이 어렸을 때, 그리고 큰애가 장가 가기 하루 전날 유성온천 목욕탕에 가서 등을 밀어주고 내 등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사회적 계급장 떼고 財貨의 껍데기도 벗어야 한다"는 서두의 표현에 이끌려 이태호 선생님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이들 어렸을 때는 해외 파견근무 중이었고 녀석들이 크니 함께 가서 등을 밀어주고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증 또한 한번도 밀어 드리지 못한 것이 늘 마음이 아프답니다. 주일에 한번씩 덕산 온천에 다닙니다. 온천탕 풍경 또한 삶의 향기가 따뜻하게 풍깁니다. 날씨가 매섭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부자간의 때밀이 장면에 찡하네요. 착한 아드님을 위해서라도 그 어른이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태호 선생님의 글을 읽노라니 지난 주말의 도고온천이 생각나네요. 세세한 묘사에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목욕탕에 가면 버릇처럼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핍니다. 참으로 다양합니다. 특히,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없는 사람 거의 없더라고요. 수술 자국을 보면 그 사람의 아픔을 짐작하기도 하지요. 그 재미로 자주갑니다.^&^
사진 보고 글 읽고, 글 읽다가 사진 보고
사진은 눈을 경이롭게 만들고, 글은 울렸다가 웃겼다가 갖고 노네요~~
목욕탕 풍경을 씨리즈로 엮어볼 계획입니다. '벌거숭이의 내면' 같은거요. 축하드립니다. 호서문학 대상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능하면 참석하여 축하드리겠습니다.
동네 목욕탕과 이발소,말만 들어도 어쩐지 친근감이 가네요. 요즘은 서로 등을 밀어주는 풍경은 볼 수 없더군요. 바깥 바람이 차니 따뜻한 목욕탕의 훈훈함이 그리워지는 계절, 감기 조심하세요, 판콜!
네, 저도 판콜! 입니다. 역시 목욕은 시원하게 등을 밀어야 끝난 것 같습니다. 저는 저보다 나이든 분의 등을 자주 밀어드립니다. 그래야만이 제 등도 밀 수 있거든요.^&^자주 목욕하시여 건강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분들 목욕탕 풍경은 그러네요~^^
낯 모르는 이들끼리 등도 밀어주곤 했는데..사모님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집니다~^^
다음 모임에는 우리 대전수필문학 회원님들 단체로 온천여행 어떻습니까? 대전 유성도 좋고, 아니면 일본 온천도 좋고요. 함께 목욕을 하면 친분이 더욱더 두터워 진답니다.
우리 사회가 모두 계급장 떼내고 사는 사회였음 좋겠습니다. 우리 수필예술 카페에는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사람사는 이야기로 꽉 차있습니다. 떠뜻한 마음 간직하며 내일 또 와야겠네요. 건강들 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립니다. 글에 힘이 들어 있고 문장이 튼튼하신 것을 보니 여전히 청춘이십니다.
자주 들려서 후배들 등좀 팍팍 밀어주십시오. 오늘도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