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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 [몸의 기능] [의식의 역량]
1 욕망하는 생산(La production désirantes, 7-15, 15-. [자연-생산]
2. 기관들 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s- 15-22 (25-) [자연-산업] <등록>
3. 주체와 향유(Le sujet et la jouissance - 22-29 [사회-자연] <소비>
4. 유물론의 정신의학(Psychiatrie matérialiste- (29-43, 번 43-)
5. 기계들(Les machines- 43, 번 61.
6. 전체와 부분들 - Le Tout et les parties. 50, 69
[여기 사회체에서 제기되기보다, 철학적으로 전체와 부분은 오랜 문제거리였다. 벩송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논리적 사고들이 부분의 합을 전체로 상정(정초)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는 원자론자들이 원자의 총합이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벩송에서 사유는 전체에서 어떻게 부분으로 갈라져나갔거나(분화), 또는 복잡한 것을 갈라서 분할하여 사유하는 방식에서 방법적으로 주의해야 할 것을 말한다. 그 중에서 생명과 의식에서는 전체에서 부분이 갈라져 나왔지만, 한편 그 부분 각각 속에도 전체의 권능(잠재성)이 들어 있으며, 의식에 내재해 들어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부분은 전체와 더불어 지속하면서, 기억과 유전으로 어제-이제-아제의 통시적 연관을 만들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다른 부분들과 관계와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한다.
이 부분들이 양의성을 갖고 있어서, 한편으로 원자들의 결합으로 다른 한편으로 전체에서 분산 또는 분화되는 과정이 있다. 전자에 각각의 부분 대상들이 각자의 종적 차원에서 고유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이데아들이 각각이 고유성이 있다는 것의 유추 또는 유비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이데아론의 본땃거나, 데모크리스의 원자론의 개념작용을 한세대 후배인(33년정도) 플라톤이 추상작용을 통해 이데아들[형상]을 만들 수 있다고 유비적 비교를 해볼 수 있다. 관념이든 개념이든 대상을 쪼개서 각각의 고유성을 인정하게 되면, 각각은 속성을 유지하게 되고, 부분대상화된다. 신화에서 신들이 속성을 지니고 부분화되는 것도 같은 유비일 것이다.
이 (원자적) 부분을 부분대상으로 정신분석학에서 먼저 다루어졌다기보다, 부분대상으로 고착시킨 추억이 정신적 질병을 일으킨다고 여겨 그 원인을 탐구했다는 것이다. 그 탐구가 부분대상의 해석을 의식 속에 고정된 것(부동)으로 파악하기에 해석(헤르메노이틱)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생성적) 부분들은 전체와 연속성 속에 다른 계열들과 연대 또는 연결이 이루어져 있어서 그 해결(해소)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는 태어나는 갓난애는 어느 계열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삶의 터뜨리고 생산하며 살아갈 것이라 한다. 그런데, 그 애기의 삶을 어느 부분 속에서 정초하려고 하였다는 것이, 프로이트류의 가족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라 한다. 우리가 보기에 한 개체로서 인격이 태어나는 것은 가족관계보다 더 넓고 깊이가 있는데, 한 가정에 국한시키려는 정신분석은 현재 제도와 관습에 복속 또는 예속시키려하는 작업으로 환원되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류들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에는 개체를 자본주의 국가에 복속하는 것이고, 나아가 20세기 후반에서 급속히 금융자본의 발달로 제국에 예속되는 방식으로 나가간 것이 라깡쪽이 아닌가 한다.
이런 프로이트-라깡으로 이어지는 예속의 길이 프랑스의 학문에서도 1968년 탈구조주의를 형성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프랑스 사상에서는 스콜라시대에서도, 완전한 사고의 신격화에서 시작하는 사고자들과 자연의 이법에서 사유하는 그리스 자연철학을 빌어오는 사유자들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듯이, 두 길은 공존해 왔다. 그런데 탈구조주의 등장으로 후자의 길이 전면으로 나오게 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전히 자유를 추구하던 개체와 특이자들이 국가제도와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탐욕 때문에 자본주의의 미분화에 복속되는 경향으로 빠졌고, 게다가 자본 제국의 그물망이 더욱 미세하게 개체들 각각에게까지 침투되는 과정 속에 있다. 이 후자의 자유 추구자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 제국 권력에서 이탈을 사유하는 쪽에서, 도덕적으로 니체를, 형이상학적으로 벩송을 끌어내고, 탈구조, 탈코트, 탈영토와의 길을 가는 분열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역동적 흐름을 생성하는 노마드 또는 리좀이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이어가는 세계사상사의 전면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저자들은 생각한다.
이런 사유의 배경에는 19세기말에 프랑스의 공동체주의자들, 즉 무권위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정치경제학의 이항 대립에서 밀려나 있다가, 그래도 공동체의 토대 위에서 시작해야 하며, 다음으로 중첩적으로 산업사회의 대립구조 그리고, 더욱 두께를 두텁게 넓게 가진 제국에 대해 토지+산업+탈코트에 의한 저항과 항거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하는 것이 초기의 문제제기 이다.
이 책이 1972년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신호탄인 셈이고, 푸꼬가 “감시와 처벌(1975)”이 그 다음에 나왔으며, 푸꼬가 방향을 바꾸어, 즉 표상의 인식론에서 삶의 현실론인 인간성(자연성)으로 전향하면서, 고대의 성에 관해 다루기 시작하면서 “성의 역사 1(1976)”가 나온다. 이에 비해 들뢰즈/가타리의 “앙띠외디푸스”는 니체의 도덕론을 넘어서 사회 정치를 논하면서도, 형이상학의 깊이에서 자연(본성)의 생성을 다룬다. 생성, 그 용어가 욕망하는 생산과 같은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프로이트의 소설같은 이야기보다, 푸꼬의 후기 스토아사상에 맞추어 전개한 도덕론보다도, 현실에서 그리고 제국에 대한 저항과 봉기로서 제기된 역동적 권능을 제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셈이다. (56TKJ)]
[사회 구성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분 기계들은 처음부터 어떤 부속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부분은 현실의 평면(두께있는)의 전체와 연결과 연관 속에 있다. 평면의 표면위에서 전체가 부분들의 이접과 연접인데, 전체를 연접과 관계들로 자기 성향을 규정하고, 이접의 배제의 부분을 제외하고 계산할 때, 배제의 부분은 단절되어 탈영토화 된다. 그럼에도 삶이란 생산의 총체인데, 상품의 생산을 총체로서 수적으로 양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충만된 기계를 설정하는 것은 상품경제의 계산이며, 욕망하는 기계들의 총합은 생산의 종합이다. 이 종합의 기본 단위를 무엇을 설정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 기관없는 신체를 기준으로 욕망하는 기계를 구체적 현실태로 삼는다.
이런 논의의 토대로 단위들의 연결, 선접, 연접의 종합에서 배제의 변증법보다, 단위들의 접합[분절]에 따른 생산하는 기계로서 생성의 자기 활동에 관심을 갖는다. 세계는 일차적으로 연결이며, 사회의 비사회성으로 이접이지만, 삶의 양식을 위하여 사회로 연접이 필요하다. 단위들의 접합은 쓸모있거나 실용적인 것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실재적 상태를 문제 삼는다. 예를 들어 사회체에 들어있지 않는 단위들도 삶의 방식을 생성하며 살아간다. 배제에는 그 경계 밖의 단위들을 완전히 적대시 또는 악으로 여기면서도, 자기 영역으로 그것들을 재편입하고자 끊임없이 강제한다. 이 재영토화는 상품의 이윤저하를 지체하게 할 수 있고, 잉여가치의 확장을 은폐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은 재영토화의 비용을 분담할 의사는 없다. 이 재영토화의 길로 가는 생명력 없는 자본의 동인을 생명체의 추동력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을 없을까?
사회체라는 구성체의 판을 다시 짜보면 어떨까? 자연의 생산, 자연과 인간의 종합적 생산으로부터 ... 여기서 경제 즉 아낀다는 의미는 다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고, 자연과 종합은 자연과 생태적으로 동화-공감-공명의 길로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40MLD)]
1.6.1. 다양체의 지위 - Statut des multiplicités 50-52
[수학에서 다양성(multiplicité)도 단위이며, 존재론의 일자, 즉 전체이다. 시대적으로 계몽주의 18세기에 절대자로 수렴된다.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산으로 전개된다. 수학에서는 무한의 전개로 다양성의 해명에서 불확실성과 확률로 나간다. 생명의 다양성 또는 다양체는 실체이자 속성이며 그리고 그 부분으로서 양태로 드러낸다. (42LMB)(56SMJ)] - [다양성 개념작용(conception)의 다의성은, 전체나 개체(불가분자)의 다의성만큼이나 다양하다. 누가, 무엇을 대상으로 사용하고, 또는 체계 속에 정립하였느냐에 따라 다르다. (56SMJ)]
욕망하는 기계들에서 전체가 동시적으로 작동하지만, 그러나 중단들과 단절들, 고장들과 부실들, 간헐들과 짧은 회로들, 거리[간격]들과 조각들 안에서이며, 즉 그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un tout)로 결코 재통합하지 못하는 총합(une somme) 안에서이다.절단들은 여기서 생산적이고, 그 자체로 재통합들이다. 이접들인 한에서 이접들은 포함적이다. 소비작업들 자체는 이행이요, 생성이며, 되돌아옴이다. (50)
문자기계의 수준에서 문제를 그것의 엄격함에서 제기할 줄 알았던 이는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이다. 단편들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생각할 것인가? 그 단편들이 서로 간에, 차이인 한에서 차이의 연관들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 단편들이 서로 간에 연관으로 삼는 것은 단편들 자신의 차이이다. 상실된 기원적 총체성 자체에 참조함이 없이 도래할 결과의 총체성 자체에 참조함이 없이도 [단편들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생각할 것인가?]실사(substantif)로서 사용된 다양체(multiplicité)라는 범주는 일자도 다자도 넘어서고, 일과 다의 술어적 관계도 넘어서며, 다양체 카테고리만이 욕망하는 생산을 설명할 수 있다. 욕망하는 생산은 순수 다양체이며, 단위(l’unité)로서 환원될 수 없는 주장이다. (50) [실체이자 속성으로 다양성만이 욕망하는 생산에 관여한다.(40MLD)]
우리는 무미한 진화적 변증법의 회색화법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 우리는 곁에 있는(à côté) 총체성만을 믿는다. 우리가 부분들 곁에 그러한 총체성을 곧 만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 부분들의(de) 전체이지만, 오히려 이 부분들을 전체로 묶지는 못한다. 이 부분들 전체의(de) 통일성[단위]이지만, 이 부분들을 통일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통일성[전체]는 마치 따로 혼성된 새로운 부분처럼 이 부분들에 첨가되어 있다. (50)
“이 통일체[단위]는 출현하지만, 마치 따로 혼성된 이런 저런 조각처럼 이번에는 일체에, 즉 영감으로 탄생된 일체에 적용된다.” -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발작(Balzac, 1799-1850) 작품의 통일성에 대해, 또 자기 자신의 작품의 통일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51) ...
이것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은 탁월한 분열성의(schizoïde) 작품이다. 사람들은 죄책감과 죄책감의 고백들은 거기에서 웃기이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클라인 용어들로, 사람들은 울증의 처지는 더 깊은 분열성의 처지를 위해 하나의 덮게[담요]일 뿐이라고 말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법[률]의 엄격함들은 겉으로 온일자(l’Un)를 항의를 표현할 뿐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반대로 조각난 세계들의 사면[형 면제]에서 그것들의 진실한 대상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조각난 세계들에서 법률은 온전체로 재통합을 전혀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광기 속에서 자기[법]의 순진무구함을 길어 올린 것으로부터 틈들을, 분산들을, 파열들을 측정하고 분배한다. - 그렇기 때문에 죄책감이라는 표면상의 주제에, 프루스트에게서 다른 주제 전체가 짜여져(얽혀) 있다. 그 다른 주제 전체란 앞의 주제를 부정하고, 두 성들 사이의 칸막이 안에서, 샤를루스의 만들에서도, 마치 알베르틴의 졸음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식물성의 순진한 주제이다. (51)
그러므로 프루스트가 말하기를, [작품의 의미에서]전체는 생산되고, 전체 자체는 부분들 곁에 한 부분으로서 생산되며, 전체는 통일되지도 총체화 되지도 않으나, 그러나 전체는 관통되지 않은 관들 사이에 괴상한(abberantes) 소통들만을 창설하면서[만들면서] 부분들에 적용한다고 한다. (51)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에 철도여행에서는 전체를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관점의 통일도 없다. 전체나 통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여행자가 이 창에서 저 창으로 “정신없이 바라보면서 간헐적이고 대립적인 단편들을 가까이 접근시키기도 하고 안감을 대듯이 짜맞추기도 하는” 횡단선(la traversale)에만 있다. 가까이 하기, 안감 대기, 그것은 조이스(Joyce, 1882–1941)가 “다시 꾸미기(re-embody)”라고 불렀던 것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하나의 전체처럼 생산된다. 그러나 자기 자리에서, 생산과정에서, 그것[전체]이 통일화하지도 못하고 또 전체화하지도 못한 부분들의 곁에서 생산된다. (51-52)
전체는 부분들과 공존할 뿐만 아니라, 전체는 그들과 인접하고, 그 자체 따로 생산되며, 부분들에 적용된다. 유전학자의 예(52) “여러 가지 아미노산은 세포 속에 개별적으로 동화되고, 그 다음에 주형과 비슷한 메커니즘을 통하여 적당한 순서의 자리에 배치된다. 이 메카니즘에서는 각 아미노산에 특유한 횡적 연쇄가 자기 고유한 위를 차지한다.” (52)
기계론(le mecanisme)이나 생기론(le vitalisme)이나, 욕망하는 기계들의 자연(본성)을 파악하지 못하였고, 욕망 속에 생산을 끌어들이고 또 기계의 움직임 속에 욕망을 끌어들이는 이중의 필요를 파악하지 못했다. (52)
1.6.2. 부분적 대상들 - Les objets partiels 52
충동들을 그 대상들과 함께 집적된 전체로 진행하게 하는, 충동들의 진화는 없다. 게다가 충동들을 나오게 하는 원초적 전체성도 없다.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은 부분적 대상들, 즉 폭발, 회전(rotation), 진동의 세계에 대한 놀라운 발견을 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대상들의 논리를 놓쳤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첫째로 그녀는 부분 대상들을 환영(fantasme)으로 생각한다. (52).
둘째로 그녀는 분열-편집증적 부분대상들이 하나의 전체에, - 원초적 국면에서 기원적 전체이든지 나중에 울증의 지위에서 오는지(꽉찬 대상) 간에, - 귀착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시켰다. 그녀에게 부분적 대상은 전체적 인격들에 체취(선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전체는 결국에는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러하다: 부분적 대상들이 그것들 자체로서는 외디푸스를 날려 보내기에(faire sauter, 폭파하기에) 충분한 임무[책임]를 했으며, 그리고 소위 말하는 외디푸스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내재[무]의식을 표상하는, 무의식을 삼각형화 하는, 욕망하는 생산 전체를 사로잡는 임무를 면제시켰다. (53)
여기서 제기된 문제는 선외디푸스적(pré-oedipien)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외디푸스와 관계에 있어서 얼마만큼 상대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외디푸스적(pré-oedipien)”이란 것은 발생면에서 또는 구조면에서 아직도 외디푸스적와 연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욕망하는 생산의 절대적으로 반외디푸스적인(anoedipien) 성격이다. 그러나 왜냐하면 멜라니 클라인은 전반적 인격들과 꽉찬 대상들 같은 모든 관점들을 보존했기 때문에, - 그리고 또한 아마도 왜냐하면 클라인은 국제정신분석학회와 최악의 상태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협회는 “외디푸스가 아닌 자라면, 아무도 여기에 들어오지 말라”고 문 앞에 적혀 있었다. - 그녀는 외디푸스의 굴레 벗어버리는데 부분적 대상들을 이용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녀는 외디푸스를 묽게 하고, 외디푸스를 작게 하고, 외디푸스를 다수화하고, 외디푸스를 어린 나이에까지 확장했다. (53)
1.6.3. 오이디푸스 비판, 오이디푸스적 신비화[기만] - Critique d'Oedipe, la mystification oedipienne –53
우리가 여기서 정신분석가들 중 가장 덜 외디푸스화 하고 있는 예로서 클라인을 들고 있는 것은 외디푸스를 욕망하는 생산의 척도로 삼으려면 얼마나 무리를 해야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53)
[클라인의 개혁 운동] 이것은 암시가 아니라, 테러리즘에 속한다.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은 쓰기를, [“딕(Dick)사례 분석], (53)
“처음에 나를 찾아와서, 간호원이 나에게 그를 인계 했을 때, 그는 어떠한 감흥(émotion)도 표출하지 않았다. 내가 미리 준배해 두었던 장난감들을 그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는 아무 흥미없이 그것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큰 기차를 들어 작은 기차 옆에 놓고, 이 기차들에게 ‘아빠 기차’와 ‘딕 기차’란 이름을 붙여서 내가 그것들을 지칭했다(je les désignai). 그는 내가 딕이라고 불렀던 기차를 들고, 그것을 창이 있는 굴려서 가서, ‘정거장(Gare)’라고 말한다. 내가 설명했는데(je lui expliquai), ‘정거장은 엄마야, 딕은 엄마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 딕은 역시 세면기가 어머니의 신체를 상징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몸이 물에 젖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였다.”이건 외디푸스라고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따귀를 맞을 것이다. 그 정신분석가는 이제 이렇게 묻지 않는다. “네게 있는 네 욕망하는 기계들은 뭐지” 그렇지 않고 이렇게 소리 지른다. “내가 네게 말할 때에는 아빠-엄마라고 말하라!” 멜라니 클라인도 마찬가지‥…(54)
멜라니 클라인도 마찬가지다‥…이렇게 되면 모든 욕망하는 생산은 짓눌리고, 부모의 이미지들에 향하게 되고, 선외디푸스적 단계들에 맞추어 열지어 놓고, 외디푸스 속에서 전체화한다. 그리하여 부분대상의 논리는 사라진다[무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외디푸스는 이제 우리에게는 이 논리의 시금석(la pierre de touche)이 된다. (54)
내재의식은 인물들을 알지 못한다. 부분적 대상들은 인물로서 부모를 대표하는 것이 이니요, 가족 관계를 지탱시켜주는 것들도 아니다. 그것들[부분대상들]은 욕망하는 기계들 속의 부품들이요,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생산의 진행과 생산관계들에 연관되며, 외디푸스의 형상 속에 등록되는 것에 연관하여 우선적인 것(premiers, 최초대상들)이다. (54)
1.6.4. 어린아이는 이미‥… - L'enfant déjà‥… [en famille] 54-55
[어린이는 사실은 가족적이지 않지만, 살아온 과정 때문에(만들어 진 것으로) 가족적이다. 아빠엄마 놀이 말고 기차놀이도 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배는 여자를 뜻하는 것만이 아니듯이 항구도 항상 여성의 상징인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Freud, 1856-1939)와 융(Jung, 1875-1961)의 불화에 관해서 말할 때, 그 출발점이 사소하고 실천적인 것이었음을 잊어버린다. [우선] 융은 정신분석가가 전이(transfert)에 있어서 자주 악마, 신, 마법사로 나타나며, 그 역할들이 부모의 이미지를 넘어선다고 지적했다. 나중에는 나쁘게 돌아갔지만 출발점은 좋았다. (54)
문제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성적 특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적 관심[성관심]의 가족적 특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어린이가 자라면, 더 이상 가족적이지 않은 사회관계들 속에서 파악된다는 것을 인정한다.(54) ... 이 사회 관계에 가능한 두 가지 길이 있다. ..
하나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나중에(par après)”의 형태로 성욕이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승화되거나 중화된다고 보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이 관계들이 성적인 것이 아닌 에너지를 작동시키며, 성욕이 이 에너지를 이번에는 신비적 “저넘어(au-delà)”로서 상징화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보는 길이다. - 이 두 길에서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 사태가 악화된다. (55) 욕망하는 기계 즉 부분 대상은 아무 것도 표상[대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리자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 관계들의 뒷받침이고, 동인들의 분배자이다. 그러나 이 동인은 인물들이 아니고, 관계들은 간주관적이 아니다. (55)
브래드버리(Ray Bradbury, 1920–2012)는 육아실을 생산하는 욕망과 집단 환영(fantasme)의 장소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때 그는 위의 사실(생산연관들)을 밝히고 이다. 이 장소는 부분 대상들과 동인들을 결합시키는 일만 하는 곳이다. (55)
어린이는 항상 가정 안에 있다. 그러나 가정 안에서 그리고 처음부터 비가정적인 무서운 경험을 직접하고 있는데, 정신분석은 이 경험을 놓친다. [예로서] 린드너의 그림. (55)
[어린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부모 사랑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하는 생산에 있어서 부모의 위치와 기능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다.(56)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외디푸스 문제 전체이다: 어떤 힘들이 작용하여 외디푸스 삼각형화가 닫혀지는가? 이 삼각형화가 자기 스스로는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표면에다가 욕망의 물줄기를 통하게 하는 것은 어떤 조건들 아래서인가? 어떻게 이 삼각형화가 모든 면에서 이것을 넘는 경험들과 기계적 작동들에 대한 어떤 유형의 등기를 형성하는가?
어린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전적으로 욕망하는 생활을 한다. 욕망의 대상들 및 욕망의 기계들과 더불어 온갖 비가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의 생활은 직접적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부모와 관련이 없지만, 생산 진행의 등록의 관점에서 보면, 이 등록의 아주 특별한 조건들 아래(사랑 또는 미움과 더불어) 부모와 관련되어 있다. 심지어 이 조건들이 생산 진행 자체에 대해 반작용하더라도(피드백, feed back) 말이다. (56)
1.6.5. 고아로서 내재의식 - L'inconscient-orphelin
어린이가 자기의 삶을 체험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부분 대상들의 한 가운데서, 그리고 욕망하는 생산의 비가족적인 관계들 안에서이다.(56)
“나는 여덟 살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늘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왜 사는지 자문했던 것을 추억한다. 나는 여섯 살부터 마르세이유 블랑카르드 거리(정확히 59번지)의 어느 집에서 어머니라고 하는 어떤 여인이 내게 준 초콜릿빵을 먹으면서 ...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위하여 또 이 사실이 나에게 어울리는 일인지 그리고 어울린다면 어떤 점에서 어울리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숨을 쉬려했던 것이 생각난다.” (56) -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쉰둘]의 글인데, 1950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말년에 썼다면 40여년 전을 추억하는 것인데 ... ]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숨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기관들 없는 내 신체에서 쉼쉬는 기계란 무엇인가? 어린이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다.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코기토에서처럼, 부모는 이 물음 속에 없다. 이 물음이 부모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이야기되었고 표현되었다는 의미에서)과 이 물음이 부모에 연관하고있다는 생각(부모와 자연적 관계의 의미에서)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57) - [어린이는 질료적 존재이다. 형상이 덧씌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자체이다. 어머니는 그것을 잘 안다.]
왜냐하면 내부[무]의식은 고아이기 때문이고, 그 자체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에서 생산된다. 무의식의 자동생산이 생기는 것은 바로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주체가 부모없이 자기 발견했던 지점이요[선천적이란 의미에서], 또한 사회주의 사상가가 생산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을 발견한 지점에서이다. 바로 거기에서 순환[통일성]은 부모로의 무한정한 퇴행에 비추어 자기[무의식] 독립을 발견한다. (57) [가타리와 들뢰즈는 공동체주의(공산주의)가 먼저라는 말을 아끼고 있다. 생명체는 종의 공감성화가 토대로서 깔려있다. 공산주의가 기본이다. (56TKF)]
난 아냐 Ja na pas
엄마 아빠의 것이 à papa-mama
(나는 아빠-엄마에 속해 있지 않아, ) (57)
1.6.6. 정신분석학에서 잘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 Qu'est qui ne va pas dans la psychanalyse?
우리는 “과정(processus)”의 두 가지 의미가 어떻게 혼동되어 있는지 보았다. 자연 안에서 다이몬의 형이상학적 생산으로서 과정과 역사 속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의 사회적 생산으로서 과정이 어떻게 혼동되어 있는가를 우리는 보았다. 사회적 관계들 과(et) 형이상학적 관계들은 나중에(par après), 또는(ou), 저넘어(au-delà)를 구성하지 못한다. (57) [형이상학과 신학의 차이, 과와 나중에... 중세 스콜라에서도 문제였다.]
이 관계들이 부분적 대상들, 생산자업의 동인들, 반생산작업의 요인들과 더불어, 욕망하는 생산의 법칙들을 그 생산일체 속에서 따르면서, [직물처럼] 짜여지는 것은, 이미 어린이들 생활 속에서 이며, 젖먹이의 가장 기본적인 행실들 때부터이다. 이 욕망하는 생간의 자연[본성]이 어떤 것인지를, 또한 어떻게, 어떤 조건아래, 어떤 압력들 아래 외디푸스적 삼각형화가 과정의 등록작업 속에 개입하는 지를, 처음부터 알아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널리 퍼진 일반화된 외디푸스주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된다. (58)
정신분석에 대한 로렌스(Lawrence, 1885-1930))의 반발을 상기하고 잊지말자. 적어도 그는 정신분석이 성욕을 발견한 것을 보고서, 여기에 두려움을 느껴 정신분석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인상을 받았는데,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이 성욕을 부르주아 장식들로 만든 괴상한 상자 속에, 몹시 역겨운 일종의 인위적 삼각형 속에 가두고 있는 중이었으며, 이 인위적 삼각형은 욕망이라는 생산작업으로서 성관심 전체를 질식시켰고, 새로운 양식 위에 “더러운 작은 비밀”, 가족적 작은 비밀을 만들게 하기 위하여, 즉 정신분석학이 온자연과 온생산작업이라는 굉장한 공장대신에 사적인 집안 극장으로 꾸민다는 순수한 인상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성관심이 더 많은 힘을 즉 잠재성을 가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58)
그리고 아마도 정신분석학이 “그 더러운 작은 비밀을 소독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현대의 참주-외디푸스의 가엾고 더러운 비밀이 없어지지 않았다. (58)
이것은 우리를 낮추고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우리를 죄인이 되게 하는 낡은 시도 [인 셈이다. 이에 대한 반발과 저항은 공산사회 건설에 있다.] (58)
푸꼬(Foucault, 1926-1984)는 주목하였다: 어떤 점에서 광기와 가족의 연관이 19세기에 부르주아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 발전에 정초되었는지를,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의 책임과 그들의 우발적 죄책감을 평가했던 기능들을 가족에게 부여했는지를 주목했다. ... 정신분석학은 광기를 “부모 콤플렉스” 속에 집어넣고, 죄책감의 고백을 외디푸스에서 결과 되는 자기 징벌의 모습 속에서 재발견하는 정도에서, 정신분석은 혁신하지 못하고, 오히려 19세기 정신의학이 시작했던 일을 완성한다. [정신분석학은] 심정적 병리학으로부터 도덕화된 가족적 담론을 높이는 일, 그리고 광기를 “온 가족의 반쯤 실재적이고 반쯤 상상적인 변증법”에 연결 시기는 일, 거기[외디푸스]에서 “아버지에 대해 반대하는 끊임없는 시도”를 해독[암호 풀이]해 내는 일, “견고한 가족제도에 반대하여 또한 가장 고풍스런 상징들에 반대하여 본능들의 듣지 못하는[고집센] 장치”를 풀어내는 일이[완성이]리라. (58-59)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효과적인 해방의 시도에 참여하는 대신에, 가장 일반적인 부르주와 억압 작업에 가담하고, 이 억압 작업은 유럽의 인간성을 아빠-엄마의 멍에에 묶어 두고, 이 문제를 가지고서는 억압 작업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59)
(40MLD) (옮, 4:04, 56SMC) (8:32, 56TKJ) (9:14, 56T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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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1799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 프랑스 소설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 수필가, 저널리스트, 인쇄업자. 1829년부터 1855년까지 출간된 90편이 넘는 소설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은 작품인 인간 희극을 남겼다.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신경과 의사, 정신분석가. Freud, Cinq psychanalyses, tr. fr. [1935], PUF, p. 297.
1871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발작(Balzac) 작품의 통일성의 예(51)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8).
1875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스위스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가.
1882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심리학자, 어린이 심리학, 정신분석학자. 어린이 정신분석학(The Psychoanalysis of Children 1923)
1882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1941) 아일랜드 소설가, 문학비평가. Ulysses, 1922
1885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영국작가, 아롱의 좆(Aaron's Rod, 1922: La Verge d'Aaron)(tr. fr. Gallimard, p. 199).
1896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 프랑스 작가, 시인, 시각예술가, 수필가, 극장주. 반 고흐 사회의 자살(Van Gogh le suicidé de la société, 1947) (9) Le Pèse-nerfs, 1925
1907 블랑쇼 (Maurice Blanchot 1907-2003) 프랑스 소설가, 문학비평가, 프랑스철학자.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 악시옹 프랑세즈(l'Action française)에 가담했다. 그때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5-1995)를 만났고, 유일한 친구라고 말한다. L'Entretien infini, 1969, Michel Foucault tel que je l'imagine, 1986
1911 루쉬(Joseph Harold Rush. 1911–2006), 미국 물리학자(박사). 의사-심리학자(parapsychologist). The dawn of life, 1962)(L'Origine de la vie, tr. fr. Payot). Foundations of Parapsychology: Exploring the Boundaries of Human Capability, 1896(공저: Hoyt L. Edge; Robert L. Morris; John Palmer; Joseph H. Rush)
1920 브래드버리 (Ray Douglas Bradbury, 1920–2012) 미국작가, 영화극작가. 환타지, 과학적 픽션, 공포물, 불가사의, 실재적 픽션에 관해 썼다. The Illustrated Man, 1951(fr. L'Homme illustré)(SF 단편 18편 모음집).
1926 푸꼬(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1961.
(9:29, 56TKJ)(10:08, 56TL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