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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시간에 호텔에서 체크 아웃을 마치고 서둘러 테르미니역으로 향한다.
오늘은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이동하는 날이다. 이탈리아에서 내가 아끼는 문화유산을 하나만 꼽으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판테온)을 꼽겠지만, 하나의 도시를 꼽으라면 나는 죽으나 사나 피렌체다. 굳이 어떤 이유를 달지 않아도 무조건 나는 피렌체가 좋다. 그 도시와 골목들과 그곳의 느낌들이 늘 그리운 사람이다. 오늘이 바로 이번 여행에서 간절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꽃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플로렌스로 이동하는 날이다.
이탈리아 기차여행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유명한 노선은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역 구간이다. 고속철로 약 1시간반 정도 소요된다. 이 노선은 늘 여행객으로 붐비며 그런만큼 요금 또한 거진 항공편만큼이나 비싼편이다. 이탈리아의 기차 이용요금은 얼핏 비행기 여행을 닮았다. 사전에 미리 예약을 하면 한참이나 저렴하고 당일에 가까워질 수록 비싸진다. 같은 날이라 해도 시간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며 항공 운임을 초과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 그만큼 금전적인 혜택을 충분히 볼 수 있는것이 이탈리아 기차 이용의 팁이라면 팁이다.
로마시대에 이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동서고금의 명제를 탄생시킨 이탈리아인 만큼 기차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거의 완벽에 가까울만큼 커버한다. 지난날 이탈리아 기차여행 하면 '잦은 연착과 불친절' 등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순전히 나의 경험에 의하면 이제는 먼 과거의 선입견이라 말하겠다. 출발 시간과 도착시간을 어긴적이 이제껏 딱 한 번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열차내에서 위급한 환자가 발생하여 고속철을 시골 간이역에 비상상황으로 세우고 환자를 앰블런스에 옮겨 태우느라 벌어졌던 단 한 번의 비상 지연사태였다.
이탈리아 고속철도는 시간엄수를 생명처럼 여긴다. 다만, 이러다 보니 로컬철도인 레지오날레(Regionale)가 모든 악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이탈리아 철도는 복선이기는 하지만 워낙 교통량이 넘치다 보니 고속철도 외에도 시골 소도시들을 모두 들리며 운행하는 완행철도(레지오날레)가 적은 횟수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완행철도는 고속철도와 대단위 화물운송 노선에 늘 치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빈번하게 시골 간이역에 발이 묶여서 고속철과 화물차량에 철도를 내어주고 짬이 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레지오날레는 어찌되었건 현지인들의 생활을 위한 필수 노선이다. 부득이 레지오날레 노선을 이용해야만 하는 기차 노선이 아니라면 여행자들 입장에서는 레지오날레 이용에 대한 불편을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 기차를 간략하게 구분해 본다면.......... 이탈리아 국가가 운영하는 국영 철도(Trenitalia)가 있다. 이 국영철도의 연장선상에 유레일이 있다고 보면 된다. 시속 300km를 주파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의 유명 대도시들을 연결해 주고 있다. 비용은 저가항공을 능가한다.
다음으로는 최고급 스포츠카를 생산하는 기업인 페라리사가 철도사업에 뛰어들어 만든 온통 빨간기차인 이딸로(Italo)가 있다. 항공기급의 서비스와 안락한 여행을 추구하며 철도사업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며 뛰어들은 사설철도업체이다. 웬만한 이탈리아의 대도시들을 커버하고 있다. 덕분에 트랜이탈리아(국영 고속철)가 독점하던 노선과 높은 비용을 낮추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보고 있다. 하여, 여행 전에 미리 트랜이탈리아와 이탈로를 부지런히 검색해 보면 거의 횡재에 가까운 혜택을 누릴수도 있다.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로마와 피렌체, 그리고 피렌체와 베네치아나 로마에서 베네치아로 이동할때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이 바로 이딸로 라는 온통 시뻘건 매혹적인 열차라보 보면 되겠다.
세부적으로 따져 본다면 이외에도 여러가지 기차가 있지만, 이탈리아 철도 하면 무조건 우선적으로 트랜이탈리아(국영철도)와 이딸로가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여기에다가 소도시 마다 죄 다 들려가는 현지인들의 생활을 위한 필수 교통수단인 완행열차(레지오날레)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별도로는 로마에서 시칠리아까지 연결해주는 야간 침대열차가 있다고 하나 더 첨부해야 하겠다.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출발해서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으로 가자면 이탈리아 중부의 아름다운 소도시와 마을들을 여럿 지나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중간 경유지인 오르비에토(Orvieto), 코르토나(Cortona), 아레초(Arezzo)는 이탈리아의 여행이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소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들 소도시에는 고속철도가 서지 않는다. 완행열차인 레지오날레를 이용해야만 이들 소도시 여행이 가능하다. 아니라면 로마나 피렌체를 여행의 기점으로 삼고 렌터카나 버스를 이용해 다닐 수 있다.
우리는 오늘 로마에서 피렌체로 이동하는 중에 이들 세 도시중에 한 곳을 들러보기로 하였는데, 내가 예전에 다녀 보았던 오르비에토를 꼭 챠밍여사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결국 오르비에토 방문을 결정하게 되었다.
코르토나는 고대 포에니 전쟁 시절에 알프스 산을 넘어 온 한니발 군대가 주둔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초토화 시기는 작전의 중심이 된 주둔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도시이다. 주요 교통의 요지로서 이곳에서 레지오날레를 환승하고 나면 비로소 로마를 떠나 피렌체의 영역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가져도 좋겠다.
아레초는 피렌체의 위성 소도시쯤으로 생각해도 무방하겠다. 하여 같은 시기에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사조를 함께 격었으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비롯한 수많은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탄생시킨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만큼 피렌체 못지않을 정도로 르네상스의 아름다운 유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대단히 귀하고 소중한 소도시 이다. 유럽을 통털어 손에 꼽힐 정도의 벼륙시장이 열리는 곳으로도 여행자들 사이에 명성이 높다.
아쉽기는 하지만........ 부득이 남은 짧은 일정상 다음 여행으로 미루고........ 레지오날레를 이용해 우리는 마침내 오르비에토역에 도착 했다.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오르비에토는 레지오날레로 1 시간, 오르비에토에서 피렌체는 1 시간반이 소요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고속철에 철로를 내주고 화물열차에 철로를 내주기를 반복하다보니, 우리가 겪은 소요시간은 로마에서 오르비에토가 1 시간반, 오르비에토에서 피렌체가 2 시간45분 이나 소요되는 참으로 고된 여행길이었다.
오르비에토(Orvieto) 라는 여행지가 이렇게 한산 할 수도 있단 말인가?
우리를 태운 레지오날레가 긴 여정 끝에 마침내 오르비에토에 도착했다. 대합실로 향하면서 피렌체를 향해 출발하는 기차를 배웅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방금 기차에서 내린 사람이 우리를 포함해서 대여섯 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얼핏보아 대부분이 현지인 모습이다.
이날 우리의 목적은 로마에서 피렌체로 이동하는 중간에 오르비에토를 다녀가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여행사를 끼고 하는 오르비에토 여행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배경으로 유명한 '천공의 도시'로 알려진 치비타 디 반뇨레죠(Civita di Bagnoregio)를 포함시켜서 하는 일일 여행상품이 특히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 크게 사랑받고 있다. 지난 번 까지의 여행에서 나 또한 치비타를 다녀오지 못하였던지라 이번 여행에서 기회가 허락된다면 하고 나름 기대하고 있었던 처지였다.
기차역 대합실에 들어서자 마자 같은 건물에 들어있는 간이매점으로 향했다. 우리의 휴대 짐(배낭)을 보관시키기 위해서 였다. 오르비에토 기차역에는 코인 락커가 없다. 대신 마을버스표나 커피와 간단한 스낵류와 잡화를 파는 간이매점에서 짐을 보관해 준다. 물론 여타 도시의 코인 락커 정도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짐을 맡기면서 혹시 오늘은 치비타 여행이 가능하려나 싶어서 오르비에토와 치비타 사이를 오가는 마을버스 시간을 물어보니 한쪽 벽에 걸려있는 시간표를 가리키며 덧붙이는 말이 '오늘은 일요일 이라서 치비타를 오가는 마을 버스가 쉬는 날입니다. 다른 방법은 택시를 이용하는 방법뿐인데 광장 건너편에 줄 서있는 택시 기사분들과 직접 상의를 해보세요' 라는 답변이 되돌아 왔다. 그제서야 오늘이 일요일 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기간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박물관이나 미술관 예약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요일 개념이 필요치 않게된다. 날짜만 주위하며 기억하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여행에서 치비타 왕복 택시비를 흥정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기에...... 치비타 여행은 부득이 생략하기로 하고, 오늘은 느긋하게 오르비에토만 둘러 본 이후에 오후 기차편으로 피렌체로 이동하기로 하고 마저 오후 피렌체행 레지오날레 기차표를 구매해 둔다.
영화 때문에 치비타를 '천공의 도시'라 각인되다시피 하게 되었는데, 따지고 본다면 오르비에토 역시 천공의 도시임에 는 틀림이 없다.
구릉지대 깎아지른 바위 벼랑위에 겨우 빼곡히 들어선 마을이 바로 오르비에토(Orvieto) 이다.
치바타 디 반뇨레죠(Civita di Bagnoregio)는 일본 만화영화를 통해 '천공의 도시'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무거운 짐(배낭)을 맡기고 나니 몸과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 할 수가 없다.
기차역 대합실을 나서면 작은 분수대가 놓여있는 시골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카엔 광장(Piazza Cahen) 이다. 광장을 가로질러 건너면 그곳에 푸니클라를 타는 곳이 있다. 표를 구입하고 푸니클라에 오르면 약 5분만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벼랑을 단숨에 올라 공화국 광장 앞에 내려 준다. 비로소 진짜 오르비에토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물쭈물 어쩌고저쩌고 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다. 최신형 마을버스가 문앞에서 벌써부터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니클라에서 내리자 마자 대기하고 있던 마을버스에 오르면 멋스럽고 옛스러운 오르비에토의 마을 골목길의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 또 다시 약 5분만에 중세의 건물들로 빼곡히 둘러싸인 너른 광장 한켠에 여행자들을 내려준다. 그곳이 오르비에토 여행의 시작점이 되는 두오모 광장이다. 산 아래서 구입한 푸니클라 티켓에는 푸니클라와 마을버스의 왕복 비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오르비에토를 제대로 둘러보고 다시 올때 처럼 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아주 간혹은 나처럼 하산 길에 마을버스나 혹은 푸니클라까지를 사양하고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걸어서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옛 그림속의 오르비에토를 바라보면 이런것이 '천공의 도시' '난공불락의 성채도시' 라는 생각이 절로 생겨난다.
오르비에토 여행은 이제 본격적으로 여기 두오모 광장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아뿔싸........... 그만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추웠다.
한기를 잔뜩 머금은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마구잡아 헤치며 사정없이 파고 들어온다.
하늘은 파란듯 보이지만 군데 군데 짙은 먹구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사로운 햇쌀이 반가울때쯤이면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서 삽시간에 하늘을 온통 구름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간간이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말짱한 하늘이 드러나고 삐끔이 햇쌀이 내비치기를 오전내내 반복하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불쑥뿔쑥 나타나 다가오는 세찬 바람은, 내가 세 번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처음 격어보는 전혀 반갑지 않고 조금은 불쾌한 느낌까지 전해주고 있는 아주 몹쓸 녀석처럼 여겨진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겉옷을 꺼내 걸쳐 본다.
오늘이 분명 1월 중순이라면 어쩌면 추운것이 너무도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숙소에서 인터넷 검색으로 대한민국의 뉴스를 찾아보니 교통이 두절 될 정도로 내린 폭설에 이어서 살인적인 한파가 닥쳤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비닐 하우스들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 앉았고, 한파도 인하여 수도 계량기가 파손되어 여기저기 물난리까지 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거기에 비한다면야 절대로 춥다고 이야기조차 꺼낼 형편이 못하겠지만.......... 또,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가 중국을 넘어서 유럽에 상륙하였으며 대단히 심각하게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는 소식이 그제부터 뉴스에 올라있다. 일본에도 전염이 되었으나, 아직 한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그나마 다행스런 소식도 듣고 있다. 이제 이번 여행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부디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오늘 아침 로마를 떠나 올때 아침 기온은 영상 11도 정도였다. 북쪽으로 더 올라왔으니 오르비에토의 기온은 영상 8도는 되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바람이었다. 바람이 구름을 몰고와 햇쌀을 가리면서 느끼는 체감온도는 아마도 대략 영상 4도나 5도쯤 되지 않을까? 하여 처음으로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 걸쳤다.
우리나라는 여름이 우기(雨)에 해당하지만, 유럽은 대부분이 겨울이 우기(雨)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였던 터키의 내륙(아나톨리아)은 우리나라의 날씨와 거의 비슷하다.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고 눈이 많이 내린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의 유럽 대륙에 인접한 이스탄불은 거의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드물고 눈이 샇이는 경우도 드물다. 그런 이유로 이스탄불은 한겨울이라 해도, 적어도 대한민국의 겨울을 경험한 사람들로는 비교적 아주 수월하게 여행을 한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셔츠에 가디건이나 바람막이 정도면 추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는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날부터 떠나오는 새벽까지 우기(雨)의 집중포화를 맞아야만 했다. 거의 대부분의 이스탄불 여행을 우중에 강행해야만 했고, 중간중간엔 엄청난 폭우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도 날씨를 원망하지 않았고 감기 몸살에 시달리지 않은 상태로 터키를 떠나 몰타로 향했었다.
몰타의 날씨야 그야말로 예술이라 하겠다. 1년에 320일 이상을 더없이 쾌청한 날씨로 달고 사는 몰타 사람들이 사뭇 부러울 지경이었다. 12월 31일에 도착한 몰타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기온마저 영상 16도에서 18도를 가리켰다. 겨울은 온화한듯 따스하고, 오히려 여름은 시원하게 느껴지는 여행자의 천국이 몰타였다. 몰타에서는 반바지로 배낭만 달랑 걸머메고 여행을 했었다.
다음으로 몰타를 떠나 찾아간 시칠리아 또한 날씨는 정말로 예술이었다. 비가 내린것은 한나절 정도였고 언제나 맑고 쾌청했다. 아침에 영상 14도에서 한낮에 16, 17,18도 정도면 겨울천국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부지런히 걷다보면 더위를 느끼고 땀방울이 솟아나 저절로 반팔 소매와 반바지가 떠오를 지경이 시칠리아였다.
바다를 건너는 야간열차를 타고 시칠리아에서 로마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겨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 시내의 도로변과 공원마다 노란 오렌지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익어가고 있고 사방에 온갖 꽃들이 피어 있지만, 따스하고 온화한 지중해에서 내륙의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 오고나니, 그제서야 이탈리아 반도에도 겨울이 있기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로마의 겨울은 선선하면서도 아주 약간은 싸늘한 느낌 정도라고 해야 하겠다.
그런 상황에서 한참이나 더 북쪽에 있는 고풍스런 중세도시 오르비에토에 도착하고 나니 비로소 이탈리아반도의 겨울이 어떤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르비에토 옛 도심으로 올라가는 푸니클라에는 우리 말고 달랑 세 명의 여행객이 더 있었다. 공화국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마을버스에 올라타고 언덕을 가로질러 올라 두오모 광장에 도착했다. 버스에 내리자 마자 함께 올라 온 여행객들도 어느틈엔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거의 텅비다 시피한 마을버스로 막 올라온 처지였는데 두오모 광장엔 어디선가 이삼 십명은 되어보이는 여행객들이 몰려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다 더욱 놀란것은 그사람들 모두가 한국인들 이라는 사실이었다.
두오모 광장 언덕길 모퉁이에 최신형 벤츠사 미니버스 두 대가 서 있고, 이 한국인 여행자들은 모두 그 미니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패키지 여행객들 이었다. 지금 이탈리아의 유명한 여행지인 오르비에토에는 온통 우리를 포함한 한국인들로만 가득했다. 넘쳐나고 있다고 해도 결코 틀린말은 아닐것 같았다.
아주 잠시 인솔자인 한국인 가이드에게서 오르비에토 여행의 주의 사항과 스케줄을 설명듣고는 삼각 깃발을 앞세운 인솔자를 따라 순식간에 긴 행렬을 이루며 두오모 성당 안쪽으로 우루루 사라져 갔다. 오랜시간 연습과 훈련을 거듭하기라도 했던것처럼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동안 우린 먼 발치에서 이 당혹스런 순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중간에 한국인 개별 여행자를 만나면 인사도 나누고 정보도 나누고 덕담도 나누지만........ 단체 여행자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거나 서둘러 발걸음을 다른곳으로 옮기곤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단체 여행객들에 대한 바램이나 기대치가 점 점 퇴색되기 시작해서, 내가 상당히 기피하는 중국인 여행객들과 별반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기 시작하면서 부터 생겨난 버릇이라고 해야겠다. 우선 소란스럽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보이지 않는 오만함에다가 지나치게 과도하게 치장에만 온갖 정성을 쏟는 불편함들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여행을 추구하는 성향에서 비롯되었으리라. 가치관이 편협하고 교양이 부족하며 갑자기 돈벼락을 맞다보니 손바닥만큼의 염치도 없어 보여서 기피한다는 일부 중국인 여행객들과 시간이 지날수록 점 점 구별하기가 어려워지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인 여행자들이라고 나는 솔직해 고백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뜨거운 커피에다 막 구워낸 빵으로 오늘의 여행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추위를 달래보기 위해 두오모 광장 주변으로 늘어서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잠시 쉬다 보면 앞선 여행객들과의 거리도 좀 생겨날테니 말이다.
일전에도 들렸던 박물관 옆의 아주 오래된 카페에 들러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카페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역사 기록물 자체였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의 건축물을 고스란히 뼈대를 유지한 채 부분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의 카페로 사용 중이었다. 중세의 시간과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져 왔다.
벽면마다 아마도 카메라 발명되어 기록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후부터의 모든 오르비에토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오르비에토 도심을 건축하던 모습에서 이탈리아 내전과 제 1차 2차 세계대전중에 오르비에토가 겪었던 참화와 참상들이 사진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지금 보여지는...... 지금 남아있는 모습들이 결코 오르비에토의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들이 그곳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오르비에토가 저들에겐...... 또 오르비에토가 이탈리아 역사에는 어떤 의미였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가 있었다.
왜 교황들이 그렇게 오르비에토에 애착을 가졌는지 까지도 말이다.
아마도...... 한 30분은 좀 지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우리가 방금까지 저 카페에서 머물렀던 시간 말이다.
우리가 막 카페에서 나와 오르비에토 도심을 거닐어보려고 시작하려는 참이었는데 말이다. 그동안 밖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역시나 두오모 광장으로 올라오는 모퉁이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있는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사람들 역시 모두가 한국인들 이었다. (뭐야? 오늘 오르비에토는 한국인들이 전세 낸 날인가?) 하고 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과도한 치장과 옷차림이 낯익은 것이........ 좀 전에 우리가 카페로 들러갈 즈음에 두오모 여행을 시작하였던 한국인 단체여행객들이 분명했다. 그 순간 언덕에서 불쑥 아까의 그 벤츠사 미니버스가 나타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인 여행자들이 서둘러 미니버스에 올라 탔다. 그러자 삽시간에 미니버스는 언덕 아래로 골목길을 빠져 내려갔다. 모두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다면........... 저사람들은 로마에서 미니버스로 1시간을 달려왔거나, 피렌체에서 1시간반을 달려와서는........ 불과 30분만에 오르비에토 여행을 모두 마치고 이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아마도 서둘러 인근의 치비타 디 반뇨레죠로 이동을 했을것으로 짐작된다. 오르비에토와 치비타를 한 프로그램으로 엮는 여행상품을 선택한 패키지 여행객들일 것이다. 오르비에토를 30분만에 여행했다고? 그야말로 기네스북에 오를 사태가 아니겠는가?
막말로 '그럴거면 오르비에토에 왜 온거야?' 라고 물어보고 싶다. 로마나 피렌체의 그럴싸한 레스토랑에 폼나게 자리잡고 티본 스테이크나 자르면서 이름난 한국인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슬라이드 사진이나 보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한국에서 로마까지 오려면 직항로로도 11시간이나 날아와야 한다고.......... 아하!!!! 인증샷이 필요했나 보구나?
한무리의 한국인 단체 여행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오르비에토는 쓸쓸할만큼 적막하고 고요했다.
이따금씩 우리곁을 지나가는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가움에 '챠오' '챠오' 저들과 인사말과 함께 환한 미소를 주고 받는다.
지금 오르비에토는 통째로 우리가 전세냈다. 어느 방향으로 어느 골목길에 접어들든 우리는 지금 무한 자유다.
가진것이라고는 시간과 배짱뿐인 우리가 오르비에토를 통째로 접수했다.
누군가가 떠나면서 우리는 무한 자유와 행복이 생겼다. 조금은........ 아주 쬐끔은 추위 때문에 불편하지만 말이다.
사실 오르비에토 여행에 대해서는 지난 여행에서 나름 여러가지를 다룬적이 이미 있었기에 비슷한 여행기를 반복하기 보담은 오르비에토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 조금은 다름 관점의 이야기들을 이번 여행기에서 다루어 보기로 해야겠다. 하여...... 너무도 호젓하게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마음껏 누렸던 오르비에토 산책 사진과 함께 조금은 낯설고 색다른 오르비에토의 이야기를 조금 나누어 보기로 하자.
오르비에토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서 약간 북쪽으로 걸쳐있는 드넓은 구릉지대인 움브리아 지방의 한 작은 지방단치 단체로서, 구릉지대의 너른 초원 위로 불쑥 솟아오른 터프 절벽 위에 들어선 성채와 같은 요새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유일하게 사방 어디로도 바다와 접하지 않은 움브리아 지방이기에 흡사 내가 살고 있는 충청북도를 닮았으며, 유구한 역사를 따지자면 내 고향 충주랑 상당히 닮았다고 해야겠다. 대단히 중요한 역사의 고장이다.
움부리아의 초원에 서서 깎아지른듯한 바위벼랑 위의 난공북락의 요새처럼 보이는 오르비에토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나의 뇌리에는 또 하나의 고대 도시가 떠오른다.
오르비에토 여행을 하기 전이나, 한참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방금 전의 내 생각처럼 오르비에토를 바라보거나 생각하면서 다른 고대 도시를 떠올리는 사람이나 이야기나 책자를 나는 이제껏 만나 본 적이 없다. 나만의 착각일까?
오르비에토를 찾은 한국 여행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전혀 망설임 없이 치비타를 떠올리겠지만....... 글쎄다. 일본 만화영화에 '천공의 도시'로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된 치비타는 나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언제 소멸될지 모른다는 우려로 하여 최근들어 오르비에토를 능가하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도시는 결코 아니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오르비에토(Orvieto)를 나름의 근거에 의거하여 '움브리아 폴리스(Umbriapolis)' 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오르비에토를 바라보거나 떠올릴때마다 자연스레 연상되는 고대도시는 바로 그리이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 라는 점을 사전에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파르테논 신전이 서 있는 아크로폴리스(좌)와 터프 언덕에 세워진 오르비에토(우)는 여러면에서 상당히 닮았다.
도시의 구조와 형태가 닮았다는 것은, 그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의 목적과 용도도 서로 닮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르비에토 하나만을 주의깊게 살펴보기 보담은 많은것이 비슷한 아크로폴리스를 세세하게 살펴봄으로써 비교분석을 통하여 좀 더 깊이있는 오르비에토에 관한 새로운 시선과 관점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오르비에토를 차라리 움브리아 폴리스라고 부르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그리이스는 여러개의 도시(Polis)들이 하나의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생겨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폴리스(Polis)는 오늘날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여러 사람이 모여사는 집단 주거생활 공간을 뜻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폴리스가 '도시'를 의미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랄 수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그리이스어로 '높은'을 뜻하는 '아크로(Acro)'와 '도시 이전의 언덕'을 뜻하는 '폴리스(Polis)'가 협쳐서 생겨난 표현으로, 아테네 어디에서나 올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의 의미로 처음 쓰였다. 이들 도시국가들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발전해 나가자 몰려드는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하여 더이상 좁은 산자락 언덕으로는 감당 할 수가 없게되자, 점차 언덕을 버리고 강을 끼거나 비옥한 너른 평야지역으로 이동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폴리스'의 의미가 오늘날과 같은 '도시'의 의미로 쓰여지게 되었다.
로마라는 고대국가 또한 문명사적 계보는 그리이스 보다 좀 후에 등장하여 승계하는 것처럼 역겨지고 있지만, 그 기원으로 따지자면 기원전 8세기 경으로 비슷하게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좀 더 세세하게 구분을 해보아도 그리이스와 로마의 기원은 짧게는 50년 정도 로마가 뒤쳐진 것으로 볼 정도일 뿐이다. 문명적인 개화가 그리이스에 비해서 로마가 좀 뒤쳐졌다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르비에토는 분명 '움브리아 지방의 높은 언덕'이라 표현해야만 했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움브리아폴리스(Umbriapolis)' 라고 불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크로폴리스와 오르비에토의 쓰임새는 전혀 달랐다.
아크로폴리스는 신성한 '신의 영역(聖域)' 이었지만, 오르비에토는 평범한 사람들이 생활하는 '세속(世俗)의 영역' 이었다. 그것이 달랐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일반 대중의 접근이 허용되는 지역은 아고라 광장 까지였다. 그리이스인들은 이 광장에서 토론을 하고 도편 투표를 통하여 추방자를 결정하는 등 다분히 초보적인 수준의 민주주의를 실행했었다. 광장 보다 높은곳으로는 누구도 허락없이는 올라갈 수 없었다. 언덕의 상층부는 출입통제가 철저한 '신들의 영역' 이었던 것이다. 그곳은 신전의 제사장이나 무녀나 신탁을 얻고자 하는 군주만이 출입이 허락되는 장소이자, 올림푸스 산에 기거하는 신들을 위해 마련된 아주 특별한 장소였던 것이다. 이 엄격한 전통은 그리이스가 멸망 할 때까지 그대로 존속된다.
그리이스를 멸망시키고 점령한 로마군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그야말로 초토화 시켜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남아있는 잔해가 그 당시 참화에서 겨우 살아남은 모습 그 자체이다. 로마는 새로운 로마의 신전을 무수히 많이 세웠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리이스에서 파괴해 버린 신화속의 신들이 모두 로마의 신전으로 옮겨져 여전히 존속하게 된다. 로마의 신전도 역시나 철저한 통제가 뒤따른 별도의 성역이었다. 신관과 제사장과 무녀와 군왕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이 규율이 깨진것은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던 시기로 로마의 됨 한복판에 '판테온(Pantheon)'의 등장과 함께였다.
왕국을 넘어서 세계지배라는 제국의 길에 들어선 로마는 정치력과 군사력으로 영토는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지만, 그 점령지 마다의 백성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저마다 다른 종교심까지 점령하고 지배할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여 내린 결론이 영토는 점령하고 조세를 징수함으로 생활권을 보장해 주되, 로마에 적의를 품지않는 선에서의 종교적 자유는 허락하다는 통치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로마가 점령한 광활한 영토만큼이나 전역에 다양한 종교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게 허락한 것이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로마의 한복판에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만신전(판테온)'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어느나라 백성, 어느 지역의 특정 종파나 종교인이던 로마에 볼 일이 있어 들리게 되면 너 나 없이 누구나 서둘러 판테온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어디엔가 자신들의 신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라는 제국을 영토는 군대가 다스리고, 생활은 로마방식의 문화가 지배하고, 종교는 판테온을 통하여 자유와 배려를 허락하는 융통성으로 마찰을 비켜나갈 수 있었다. 고대 신전의 엄격한 출입통제 전통이 이 판테온에서부터 산산히 부서져 나가게 되었다. 판테온은 모든 종교, 모든 신앙인에게 언제나 자유롭게 열려 있었던 것이다.
판테온은 모든 인종과 종교와 신분과 사회계급으로부터 무한한 자유를 허락한 해방공간 이었다.
하지만, 판테온이 가진 무한한 자유는............ 기독교(로마카톨릭)의 등장과 함께 처절하게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독교가 내세운 유일신 사상은 결국........ 판테온에 기거하던 수많은 신들을 모조리 처참하게 살해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이 정녕 신의 뜻이었을까? 아님 유일신을 빙자한 극소수의 최고 종교지도자들이 벌인 희대의 사기극이었을까?
하지만 오르비에토는 사뭇 달랐다.
신석기 시대부터 이미 터프 언덕에는 사방으로 동굴을 파고 사람들이 기거하기 시작했다. 신들이 기거하는 성스런 장소가 아니라, 구릉에 쏟아져 들어오는 홍수와 거대한 맹수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불쑥 솟아있는 바위벼랑의 상층부에 동굴을 파고 집단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이들은 집단 거주와 집단 생활을 통한 자체 방어의 필요성을 두루 공감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바위벼랑을 외벽 삼아서 처음에는 목책을 치고 이어서 돌을 쌓아 요새화를 꾀하면서 언덕위에 대단위의 주거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오르비에토가 탄생한 것이다.
에트루리아시대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오르비에토는 도시로 발전했다.
북쪽에서 침범한 고트족은 오르비에토를 로마정벌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고 마침내 서로마는 멸망했다. 비잔틴의 유스타니우스 황제가 옛로마의 영토 탈환을 위해 파견한 벨리사리우스에 의해서 해방을 맞았고, 이 시기에 요새는 더욱 공고하게 확충되었고, 궁전, 교회, 탑들이 지어졌다.
뒤이어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당사자들과 권력자들이 수시로 오르비에토를 드나들게 되었으며, 그들 모두가 피난처, 은신처, 별장으로 한결같이 오르비에토를 탐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기에다 한 사람 더......... 아니 최고의 막강한 권력이 오르비에토에 관심을 넘어 눈독을 들였으니 바로 교황이며 교황청이었다.
당시의 교황들은 한결같이 너무도 간절하게 오르비에토를 가지고 싶어했다.
결국 오르비에토는 교황(교황청) 소유의 세속적 지배력이 작용하는 영지로 전락하게 된다. 교황령이 된 것이다.
오르비에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황령(敎皇領)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교황령이란 교황의 지극히 개인적인 세속적 지배권이 행사되는 영토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은 교황령이 피핀의 기증(754년)에 생겨나서 이탈리아 왕국의 멸망(1870년)까지 약 1천백 년이 넘게 행사되었으며, 놀랍게도 이 기간은 중세의 암흑기와 일치한다. 이는 상당히 크고 깊고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현대에 들어서 교황령은 분명히 상실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제 2차 세계대전의 격변기에 교황은 파시스트 뭇솔리니와 비밀 협약을 맺었다.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벌어진 협약식(1929)에서 교회(로마카톨릭)가 파시스트의 독재를 묵인해 주고 제 3세계의(이탈리아, 독일, 일본) 집단 야욕에 침묵해 주는 댓가로 로마시 안에 독립된 자치국가인 바티칸 시국을 건국하게 하고 재산과 안전을 보장해 줌으로써 비록 부분적이나마 교항청의 영토와 주권이 회복되었으니, 교황청을 절대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교황이라고 볼 때 옛 교황령이 어느정도 복권 내지는 재현되었다고 보아도 무방 할 것이다. 교황령은 이 순간에도 버젓이 현존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지금의 바티칸(교황청)은 그런 흑역사 위에 재건 되었다.
그럼 바티칸이 내어 준 침묵과 묵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의 칙령을 통해 이 날의 침묵과 묵인이 씻을 수 없는 수많은 죄악을 만들어 냈노라고 고백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 히틀러와 뭇솔리니와 일본 천황의 야욕과 침략과 아우슈비츠 학살 같은 인류의 비극에 교회가 침묵하고 외면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수많은 생명을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갖은 비인간적 참상과 문화재 약탈 앞에서 비겁하게도 교회는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받는 선에서 침묵했노라고 고백했다. 그 댓가로 지금의 바티칸이 버젖이 온전하게 남아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교회가 목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어린양(인류)을 재앙속으로 내친 것이다. 그 이면에는 구세주께서 당부하신 말씀이나 교회의 존립이 아닌 오로지 성직자들의 안위만이 목적이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중세시대 교황령의 그늘에 숨어있던 교황의 민낯을 다시 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겉으로는 언제나 자비와 정의와 인류의 구원을 부르짖었지만, 속으로는 교회의 존립도 아닌 오로지 극소수의 최고 성직자들만의 세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속을 뛰어 넘어서 죄악만이 넘쳐났을 뿐이다.
보기에 따라 여러 시각차들이 있겠지만, 최초의 교황령을 나는 (라테라노 궁전) 이라고 생각한다.
카타콤베(그리이스 로마의 지하무덤)를 전전하면서 목숨을 걸고 숨어다니며 신앙을 지켜내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를 공인해 준 콘스탄티누스 대제야 말로 은인 중에 은인일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더하여 그리 오래지 않아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하게 되었다. 세상이 달라졌고 교회의 지위와 성직자들의 권위가 꿈도 꾸어보지 못한 단계로 격상 되었다. 피지배자에서 하루아침에 최고 지배자의 지위에 오르게 된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론 그 사태(기독교 공인)로 인해 초대교회 내부에 엄청난 파열과 대결을 양산해 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하여 사도들도 뿔뿔히 흩어졌고, 이후 300년이 지나면서 이제 세상에선 제대로 기독교를 만나 볼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로마의 박해와 추격은 날로 심해졌고, 예수의 복음을 생생하게 전해주던 1세대 기독교인들도 모두 떠나고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감시가 덜한 멀고 먼 세상의 변방에서나 겨우 신앙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나톨리아 내륙 깊숙한 카파도키아가 그 대표적 기독교인들의 은신처였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초토화되자 기독교 지도자들은 흩어져서 안디옥, 데살로니카,알랙산드리아를 거점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박해가 극심하던 시기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알렉산드리아 였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날....... 로마가 기독교에 호의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더니....... 기독교의 대표들과 로마제국과의 정식 협상을 제의받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계를 이끌어 왔고 대표하는 지도자들은 대부분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 데살로니카의 지도자들임을 세상과 역사는 확실하게 이를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베드로의 후예를 자부하는 로마에 주재하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쩌면 이것이 엄청난 기회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의 대표임을 자인하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협상 테이블에 마주하고 앉아서 기독교의 미래를 포함한 수많은 사항들에 대하여 협의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모든 기독교계가 이들의 파행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성지 예루살렘의 멸망을 끝까지 지켜보았던 사도 야고보의 후예들은 분노를 넘어 로마의 지도자들을 이단으로 파문시킬 정도였다. 알렉산드리아를 지켜오던 성서의 저자인 마가의 후예들도 마찬가지 였다. 이어서 안디옥이나 데살로니카를 넘어서 온 세상이 기독교인들이 한 목소리로 '로마의 지도자들이 전 기독교를 대표할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다'고 항의 했다. 하지만 이런 정당한 요구들을 로마의 지도자들은 차단하고 외면했다. 이미 로마라는 어마어마한 기득권의 달콤한 유혹의 덫에 빠졌음이요, 그 기득권을 자신들이 혼자 독차지 하기로 마음먹고 난 후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도 베드로의 후예' 이며 충분히 기독교를 대표 할 만하다고 천명하고 자신들을 (로마카톨릭)이라 부르게 했다.
이제 (로마카톨릭)은 제국 안에서의 최고 종교가 갖게되는 모든 권위와 풍요를 자신들만의 몫으로 정당화 시켜나갔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성토하는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로마카톨릭)의 휘하로 들어와 지휘를 받을것을 요구했다.
이시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새로운 로마의 국교인 기독교(로마카톨릭)을 위하여 많은 성 베드로 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라테라노 대성당도 그 중의 하나였다. 당시의 교황 처소(교황청)는 바티칸의 자리가 아니었다. 성 베드로 성당(바티칸)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으로 순례자들의 성지순레를 위한 기념 교회이자 숙소였다. 황제는 로마의 정반대편에 있는 라테라노 성당에 붙여서 최고 성직자를 위한 거처(궁전)을 지어 기증했다. 이것이 첫 교황청이자 교회에 대한 첫 기증이었으며, 여기에서 교황령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다. 교황은 라테라노 궁전에 머물면서 집무를 했고, 필요시 마다 로마시내를 가로질러 성 베드로 성당을 방문하는 형식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현 바티칸)이 생겨날때까지 같은 일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 기독교는 양분되었다.
이탈리아의 로마만을 차지하면서도 스스로 모든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제국이라는 기득권에 승선한 (로마카톨릭)과 로마카톨릭을 제외한 온세상의 기독교가 뭉친 (그리이스 정교회)로 양분되었다.
이때부터 로마카톨릭은 승승장구하였고 스스로를 '파파', 즉 교황 이라는 새로운 직책이 생겨나게 되었다. 점차 로마카톨릭은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잃어갔다. 교만해지고 타락해지는 새로운 지배권력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들의 탐욕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교회가 위세를 드높여 가면 갈 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제국은 점점 위세를 잃어가며 쇠락해져 갔다. 결국 제국의 통치자는 너무나 광대한 제국의 영토를 지켜낼 힘이 부족함을 깨닫고 제국을 둘로 나누어 통치하기로 했다. 동로마는 보따리를 싸서 멀고 먼 소아시아와 국경지대인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했다. 하지만 교회는 가지 않았다. 제국의 최고 지위에 올라 모든 기득권을 한참 누리고 있는 교회지도자들이 그 멀고 먼 이방지역의 미개척지로 모든 부와 향락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옮기고자 했을리가 만무였다.
하지만 고트족의 침략으로 서로마는 멸망하였고, 겨우 교회의 존재만을 회복한 로마카톨릭은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은 거지신세로 전락했다. 로마카톨릭에 환멸을 느꼈던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한 동로마는 그리이스 정교회를 새로운 교회의 중심으로 삼고 국가 이름을 비잔틴 제국으로 바꾸고 1천 년을 더 유지해 나간다. 비잔틴의 최고 전성기인 유스티니아스 황제 시절엔 옛 로마영토 회복을 주창하면서 희대의 명장 벨르사리우스를 파견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전 유럽을 통일하게 되는데, 이때 새롭게 로마를 정복한 비잔틴의 정교회는 로마카톨릭을 접수하여 비잔틴 정교회의 로마지부로 격하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비잔틴 제국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자, 유럽 전역에는 수많은 영주들이 저마다 들고 일어나 봉건국가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혼란이 시기를 로마카톨릭은 제 2의 도약기로 발판을 삼고자 절치부심하였다.
프랑크 왕국에 군왕이 죽자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서로 죽이고 죽는 내란으로 번져갔다. 여기에서 기회를 찾은 교황은 왕위 서열에서 한참이나 밀려 난 피핀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 부정한 방법으로 피핀은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부정한 방법의 왕위 찬탈은 교황의 지지로 어찌되었건 정당화 되었다. 피핀으로서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왕위에 오른 피핀은 로마를 찾아 교황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앞으로 신명을 다 받쳐서 교황과 교황의 권위를 사수하는 수호자가 되겠다' 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였다.
교황의 계략은 적중했다. 승리자 피핀이 스스로 자신(교황)의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신 앞에 맹세까지 한 것이다.
그 순간부터 교황은 과거 서로마제국의 전성기 시대로 되돌아 갔다. 유럽의 모든 절대 강자 군주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자신이 종교지도자 라는 사실을 망각해 갔다. 세속의 절대 군주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권력을 탐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며, 온갖 부정한 짓꺼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창고마다 금은보화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으며, 교황의 사저에 귀부인 미망인이나 유부녀에서 심지어 창녀까지 드나들기 시작했다. 교황들이 배출한 사생아들이 온갖 추잡한 사회문제로 비화되는 일까지 비일비재 하였다.
이제 교황은 유럽의 세속 군주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만이 수많은 군주들 보다 더 높은 유일한 존재라고 떠들어 대기 시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교권(敎權)과 황권(皇權)의 다툼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것이다.
교황의 오만과 방종과 타락과 끝없는권력에의 집착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선 사람이 있었다.
교황 한 사람의 그릇됨으로 세상이 점점 아비규환 지옥으로 타들어 가는데도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이나 세상에 흩어져 있는 대주교들 중 누구도 나서서 제재를 하지 않는 상황이 끝없이 반복되고만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그들은 모두 교황의 끄나플이거나 한통속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거룩한 신(神)은 언제나 처럼 침묵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로스 5세가 교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교황은 기다렸다는 듯이 태연하게 그를 교회에서 파문시켜 버렸다. 분노한 황제는 '신(神)을 대신해 타락한 교황을 심판하겠다' 면서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에게 교황청을 점령하고 괴수를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교황의 수호자를 자처한 피핀의 아들 샤를 왕(샤를마뉴 대제) 조차도 이미 여러차레 카를 황제의 스페인 군대와 싸워 패한 경험이 있었으며, 프랑크 왕국 자체의 내분으로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하여 이래나저래나 교황의 독선과 탐욕에 환멸을 오랫동안 느껴왔던 유럽의 군주들중 누구도 선뜻 나서서 황제에 맞서려는 사람이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교황이 설마설마 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황제의 명령을 받은 독일지역에 주둔하던 황제의 군대가 로마를 침공했고 교황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황제의 군대가 교황청에 들이닥치자 용감한 스위스 용병 근위대 600명이 처절하게 항전하다가 몰살 당했다. 스위스 용병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교황은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테베 강변에 위치한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쳤다. 수색과 추격이 시작되었다. 테베강의 물길을 이용해 배를 타고 도망치려던 교황은 15일 동안 산탄젤로 성에 은신하였지만 결국엔 체포되고 말았다. 황제는 교황의 모든 지위와 권한을 빼앗고 산탄젤로 성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황제는 교황의 타락함에 대한 교회와 죄값으로 점령군 병사들에게 3일 동안의 약탁을 허락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로마 대약탈' 사건이다. 점령군은 온 로마를 몰려다니며 궁전과 귀족들의 저택과 나아가 교회들을 싹쓸이로 털었으며, 약탈이 끝나면 방화를 저질렀다. 황제가 허락한 약탁은 어떤 제한이나 규정도 없는 무한한 범위의 약탈이었던 것이다. 거부하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무시하고 무자비하게 죽여 버렸다. 부녀자뿐만이 아니라 노인에서 아이까지, 더 나아가서는 수녀들까지 닥치는대로 강간하고 살해했다. 부자와 귀족들은 앞다투어 스스로 온갖 보물과 재산을 내어놓고 자신과 가족과 여자들의 안전을 구걸할 정도였다. 이 모든것이 교황과 교회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댓가였던 것이다.
네로 황제 시대의 '로마 대화재 사건' 이나 서로마를 멸망시킨 '고트족의 점령 사건'은 애시당초 비교조차 되지 않을만큼 '로마 태약탈 사건'은 참혹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로마 전역에 온전한 건물 하나 제대로 남은것이 없고 성한 모습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서, 인구 100만의 이 위대한 도시가 로마 대약탈 사건 이후에는 로마에 상주한 인구가 대략 2만에서 3만 이었다는 기록에서 그날의 참상을 엿볼 수 있다. 가히 초토화 되었던 것이다.
6개월 동안 산탄젤로 성의 지하감옥에 갖혀있던 교황은 가까스로 그곳을 탈출한다. 로마를 싹쓸이하고 초토화 시킨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물러간지 한참 지나서 였다.
교황의 눈 앞에 나타난 로마는 예전에 그가 알던 로마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곳은 아비규환 지옥이었다.
두려움에 젖은 교황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도망쳤다. 그때 교황이 도망친 곳이 바로 오르비에토 였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오르비에토로 도망친 교황은 서둘러 사방으로 교황청 소속의 군대를 소집했다. 교황의 친서를 프랑크의 샤를 왕에게 전하도록 사자를 파견했다. 바위 벼랑 위의 성벽을 수축하고 비상식량을 저장하고 우물을 점검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제국의 추격대를 대비하였던 것이다. 위기가 닥치면 바위벼랑 위에서 장기 수성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친서를 받아 본 샤를 왕이 서둘러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교황을 구원해주러 달려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되돌아 온 사신의 답변은 뜻밖의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샤를이 현재 왕궁을 벗어나 반대편에 있는 다른 지역의 분쟁에 참여해 전쟁을 치루고 있기에 올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더럭 겁이 난 교황은 서둘러 짐보따리를 다시 쌌다. 샤를의 군대가 곁에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교황은 서둘러 마차에 올라 이탈리아 북부의 알프스 기슭을 돌아 프랑스 지역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샤를 왕 소속의 군대를 만나 두려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프랑스로 건너 갔다.
하지만 교황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교황을 뒤쫓는 추격대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로마 대약탈을 흡족하게 마친 점령군은 카를 황제에게 보고서를 올렸고, 황제는 미련을 두지 말고 현지로 돌아가 본래의 임무에 전념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교황의 탈출 보고를 받았음에도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늘을 대신해 못된 망아지 같은 교황을 혼쭐내주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결론 지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태로 과연 교황이 정신을 차렸을까?
글쎄 올씨다..............
주변 정세가 잠잠해 지자 교황은 귀가를 결심했다.
이번 귀갓길에 프랑크 왕국의 샤를 왕이 친히 군대를 동원하고 로마까지 동행에 나섰다.
로마 도심은 페허로 변했지만 테베강 건너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온전한 모습 그대로 였다. 같은 기독교인의 처지로 점령군으로서도 차마 로마카톨릭의 본산지 까지는 약탈하지 못한 것이다. 더 다행스럽게 판테온도 이때 온전하게 살아 남았다.
샤를 왕의 은공에 감격한 교황은 또 한 번 놀라운 기지를 발휘한다. 아니지. 잔머리를 초월하는 꽁수를 찾아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사(예배)에 초대받은 샤를 왕이 도착하자 마자 느닷없이 성대하게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사전에 미리 교황이 철저하게 사전에 깊은 의도를 가지고 준비를 해 두었던 일이었다.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성한 제단에서 샤를 왕이 진정한 프랑크 왕국의 황제라고 선포하면서 준비해둔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뜻밖의 사태에 크게 놀라기는 했지만, 교황의 선언으로 이제부턴 자신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 황제에 버금가는 당당한 같은 반열의 황제에 오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새삼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더하여 이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로마카톨릭의 중심이자 핵심 제단이 아닌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황제의 관을 받았다. 그리고나서 교황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저의 아버지 피핀이 한 약속이 앞으로도 영원할 것' 이라고 서약했다.
이제 샤를마뉴 대제로 불러야 하는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부터 영원한 라이벌인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 황제와 자신이 대등한 신분이 되었다는 감개무량한 생각으로만 가득 찼다. 시간이 지나 샤를은 이날의 이벤트를 몹시 후회하게 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교황의 속셈은 전혀 다른데에 있었다.
이제까지 세상은 교권(敎權)을 가진 교황과 세속의 권력(皇權) 최고 정점에 올라있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 황제 사이의 싸움으로만 비춰졌으며, 군사력이 약한 교황이 늘 밀리는 이미지로 낙인 찍혀 있었다. 이 기점에서 카를로스 5세에게 늘 불만을 가지고 대적하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 왕이 등장한 것이다. 세상의 그 누가 보아도 왕은 황제에 비하면 지위가 한 단계 낮은것이 자명하다. 교황은 그 미묘한 틈새를 노렸고 정확하게 파고 들었다.
샤를 왕을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그동안 자신의 정적이어던 카를로스 황제를 대신 맞아 싸우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아가 교황이 샤를 왕을 황제에 임명함으로써 임명권자인 교황은 샤를 황제 보다 한단계 높게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샤를 황제와 카를로스 황제는 동격의 지위와 신분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샤를이던 카를로스이던 황제라는 직위 자체가 교황의 발 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계산이었다.
결론적으로 그 계산은 정확하게 대부분 들어맞게 된다.
유럽의 절반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샤를 황제를 호위무사로 부리고 있는 교황을 누가 감히 능멸하거나 무시할 수 있겠는가? 로마 대약탈 사건으로 이제는 정신을 새롭게 차릴 줄 알았던 교황은 이전보다 몇 배 온갖 악행을 자행하기 시작한다. 더우기 교황의 직책이라는 것이 종신제였으니.......... 하늘이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하루빨리 교황이 죽기를 바라는 기도를 할 수 밖에.......... 그런데 말이다. 그런 기도 자체가 교리에 어긋나는 엄청난 죄악이 된다면........
이제부터 사사건건 교황은 '황제 위에 군림하는 신성한 권력'을 앞세워서 온갖 짓꺼리들을 벌려 나간다.
적극적으로 교황령을 앞세워 온갖 기부를 강요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교회는 부를 축적해 가기 시작한다. 부가 쌓이면 향락에 취하게 되고 결국에 타락하게 된다. 한 번 부와 권력과 향락에 취하게 되면 절대로 그치거나 멈출 수가 없게되는 것이다. 이젠 기부를 넘어 강요를 하고, 심지어는 모략을 하거나 암살을 해서라도 교황이나 교회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시대가 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교회가 교황의 이름으로 군대를 가지게 된다. 중세시대 교황 알렉산드로 6세나 율리오 2세 등은 자신이 직접 철갑옷을 두르고 일생의 대부분을 군대를 이끌고 다니며 전쟁을 통해 정복사업을 벌이면서 교황령(영토)를 늘려간 교황으로서 너무도 유명하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했을까?
세상은 수많은 국가로 나뉘어져 있고 수많은 군주가 다스리고 있지만, 세상이 곳곳에는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들어서 있다. 언젠가부터 이 교회들은 자급자족을 추구하면서 인근에 텃밭이나 때론 농장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어느 국가 어느 군주 아래에서도 이들 교회의 터나 텃밭이나 농장은 해당국가 군주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교회의 본원인 로마카톨릭, 그러니까 교황청의 재산이라는 것이 유사 이래로 불문율이었다. 그러니까 온 유럽에서 교황의 재산목록에 포함되는 교회의 재산만도 가늠이 안될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십일조에 감사헌금에 이런저런 기증에다가 농장에서 나오는 수익금과 교회가 은밀하게 시장경제에 관여해서 얻어들이는 무자료 수익금을 포함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부자 집단인 것이다. 솔직하게는 이 모두가 교황의 재산인 것이다.
그런데 왜 역대 대부분의 교황들은 그렇게 돈에 환장들 하셨을까? 존경과 추앙이면 되었지....... 권력을 탐해서 더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남들에게는 형이상학적인 죽음 이후의 천국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댓가로 복종과 재물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지상에다 천국보다 황홀한 자신만의 천년왕국을 꾸며놓고 향락에 취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들은 죽거나 천국에 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직전이랄 수 있는 13세기만을 국한시켜 살펴보아도 교황 우르바노 4세(1261~64), 교황 그리고리 10세(1271~76), 마르티노 4세(1281~85), 교황 니콜라스 4세(1288~92),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 등 5명의 교황들이 이곳 오르비에토로 피신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었다.
교황들은 오르비에토 두오모에 나란히 붙어서 있는 오르비에토 교황 궁전인 (팔라초 솔리아노)에 머무르면서 업무를 보았다. 로마나 아비뇽이 아니면서도 정식으로 교황이 거처할 궁전을 두었으니, 로마카톨릭에 있어서나 교황들에게 있어서 오르비에토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새삼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교황들의 피난처나 은신처 뿐만이 아니라 때론 병치료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별궁의 역활로서도 대단히 중요했다고 하겠다. 중세시대 교황의 역사에는 암살이나 독살의 기록 또한 적지 않다. 비일비재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그런면에서 오르비에토는 일단 안전지대나 안전 가옥으로서는 최고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바위 벼랑 위의 성채에 올라오는 길목만 막아 버리면 얼마든지 은신이 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오르비에토에서 어떤 이유로건 사망한 교황은 하나도 없다. 교황의 무덤도 하나도 없다.
그냥 무수히 많은 교황들이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이곳에서 수많은 생각과 계획들을 세웠을 것이다. 긍적적인 일이었든지 혹은 정당하지 못한 음모였든지 말이다.
오르비에토를 가만히 거닐다 보면은......... 왜 교황들이 이곳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약간은 짐작 할 수가 있다.
지나간 먼 역사속의 사건들이 하나 둘 저절로 느껴진다.
한마디로 속세(모략과 암투)에서 뚝 떨어진........... 하늘나라와의 사이에 놓여있는 유일한 안전지대라는 느낌 말이다.
-- 많이 길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오르비에토 여행)을 2부로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